2010/04/19 00:25 : 걸상 위의 녹슨 공책

'사막으로 가면 새벽이 온다. 별이 지는 즈음이면 지평선 끝에서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가 난다고 한다. 그 소리는 차갑게 식은 바위의 껍질이 깨지는 소리라고 한다. 그 파도소리가 그치면 먼동이 터온다. 너는 그것을 차마 믿을 수 있는가?'

"너는 그것을 차마 믿을 수 있는가?" 어린 남자의 필체였다. 갱지의 섬유질 속으로 볼펜의 기름을 밀어내며 퇴적된 글씨는 공들여 또박또박 쓴 것이었다.

친구가 써서 보낸 책일까 하고 생각했지만, 글 밑에 '1979년 5월에 책을 읽고...'라고 쓰여 있었다.

그 글을 읽자, 사내의 속에 깃든 외로움이 느껴졌다. 삼년전 이 글을 적었을 때, 그는 단지 고등학교 1학년이었을 뿐이다. 어린 나이에 사막의 적요를 떠올리며 자신에게 믿을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외로움이 믿어지지 않았다.

바위가 바스라지며 내는 소리를 가늠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선애가 갔다는 경포대의 파도소리가 떠올랐다. 선애의 아픔과 그녀의 생애의 어느 날 문득 아로새겨진 균열들이 떠올랐다. 선애는 자신 속에 그어진 틈을 매우기 위하여 화장을 하고 술을 마셨지만, 오히려 나는 누군가 자신 속으로 거칠게 밀고 들어와 무료한 생활에 균열이 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다로 갔다면, 거친 바람에 비벼진 파도소리와 푸른 비린내를 뿜어내는 포말을 바라보다 허벅지가 전율로 가볍게 떨었을 것이다. 미친년처럼 치마를 걷고 바다를 향해 오줌을 지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사타구니 속으로 스며드는 바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혹시 책에 나온 글인가 하고 뒤적여 보았지만, 사막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책에서 몇편의 글을 읽었다. 밤은 깊었다. 단편들은 줄거리가 없는 무료한 것이었지만, 자신들에게 닥쳐온 절망을 삶의 무의미로 묵묵히 감내해가며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서사시였다.

책을 덮고 자리에 누웠다. 형광등 밑으로 벌레가 동그라미를 그리며 바삐 날고 있었다. 옆 방은 잠이 들었을까?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밤바람이 찼다.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산의 고요 때문인지 홈통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는 시끄러웠고, 마당 개수대 쪽에선 세수대야와 깡통 위로 물이 떨어지며 팅통소리를 냈다. 간혹 빗줄기가 굵어지는지 바람소리인지 쏴아 하는 소리도 들렸다.

문을 열고 누가 없는지를 확인한 뒤 양치질을 하고 세수대야를 처마 밑에 끌어다가 세수를 마쳤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을 때, 사내는 비닐봉투를 들고 빗줄기를 피하려는 듯 달려왔다. 그의 옷은 흠뻑 젖어있었다.

"어딜 다녀오세요?"
"아무래도 아침은 먹어야 할 것 같아서 라면을 사러 갔었어요. 라면 괜찮지요?"

겉옷을 벗어 물을 떨며 물었다.

"그런데 어떡하죠, 여행을 온다고 왔는데 이렇게 비가 와서...?"
"어짜피 이 곳에는 소금강도 없는 걸 아무렴 어때요."하고 그를 향해 웃어주었다.

하루 사이에 친해졌는지 한결 말하는 것이 편했다.

라면을 끓여 먹은 우리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다 정선가는 버스가 오는 시간에 맞춰 숙소를 벗어났다.

그는 감기가 드니 입으라며 자신이 아침에 입었던 웃옷을 건네주었다.

"그 옷은 투습방수포로 만든 윈드자켓이라 왠만한 비 쯤은 문제가 없을 겁니다. 누추해보여도 며칠 전 빨아서 깨끗하니 입으세요."하고 빗 속으로 성큼 들어섰다.

얇은 나이론 천으로 된 옷은 바람을 막아줘서 그런지 꽤 푸근했다. 옷에서는 아무런 체취도 느껴지지 않았다.

주간지를 머리 위에 쳐들고 그의 뒤를 따라가자, 그는 자켓의 목 부근에서 지퍼를 열고 모자를 꺼내 머리에 씌워주었다. 그의 머리는 물방울이 흘러내렸고 코에선 가는 김이 새어나왔다.

다리를 건너 가게의 처마에 서서 버스를 기다렸다. 그는 추운지 자신의 팔을 문지르며 발을 굴렀다. 그의 속눈썹에 물방울이 맺혔다. 물방을이 맺힌 눈을 보자 갑자기 나의 볼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자켓을 벗어 그에게 돌려주었다.

"이 옷 꽤 따스하던데... 저는 안젖었으니까 이제 그 쪽에서 입으세요. 감기들겠어요."
"그럴까요? 괜찮을 줄 알았는데, 꽤 춥네요."

비가 많이 내렸는지 개울물은 불어있었고 풍경들은 비에 젖어 짙은 녹색으로 변해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나?" 그는 하늘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언제 서울로 돌아가시나요?"
"일박이일로 떠나왔어요."
"그렇담 오늘 올라가셔야겠네요."
"다른 곳을 들렀다 오실려고요?"
"그런 생각도 했지만, 이왕 동행이 된 김에 서울까지 동행을 하기로 하지요."

혼자 내려왔는데, 혼자 올라가지 못하겠느냐고 만류했지만, 앞으로도 여행할 시간은 많으니 함께 올라가겠다고 했다.

비를 그으며 가방에서 책을 꺼내 그에게 돌려주려고 했다. 그는 가져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책의 맨 뒷장에 그 쪽에서 쓴 메모가 있던걸요?"하며, 그에게 건냈다.

"희안하네요. 이런 글을 써 놓았을 줄은 몰랐어요. 그땐 글씨도 참 못썼네요."하고 웃었다. 그의 미소는 천진스러운 동시에 눈썹 때문인지 시원해 보였다.

버스로 올라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고, 우리는 원주로 갔고 고속버스를 갈아타고 서울에 당도했다.

날은 개었지만, 어느덧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만 헤어질 시간이네요. 저 때문에 괜히 여행을 망쳐버린 것이 아닌가 미안한 생각만 드네요."하고 말한 그는 "그럼 안녕히 가세요."라며 정중히 인사를 하고 버스정류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가 떠나는 것을 보자 슬퍼졌다. 무엇 때문에 슬퍼졌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 슬픔은 오래되고 가슴 한켠에 벅차게 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한번 툭 터지면 그만 하염없이 쏟아져내리고,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빠져나가고 나면 가슴이 텅비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가 좋았고 가버리면 외로울 것 같다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몰랐고 단지 하루를 스쳐가는 사람일 뿐이었다.

단지 그가 가버리면 가슴 속에 꼭꼭 눌러놓았던 슬픔의 마개가 툭 빠져버리고 말 것만 같았다.

울음이 나올 것 같은 가슴을 억누르고 소리쳤다.

"잠깐만요!"

그가 발길을 멈췄고,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머리 속은 뒤죽박죽이었고, 온갖 생각들이 내 목을 움켜잡고 있었지만 간신히 내일 시간이 있느냐? 함께 축제에 가줄 수 있느냐?고 떠들고 있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동안 나만 바라보더니,

"정말이신가요... 저같은 놈하고... 축제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죠? 혹시 학교 앞에 만날 장소와 시간 만 알려주시면...?"

잠긴 목을 크음 크음해가며 간신히 약속장소와 시간을 알려주고, 빨개지는 얼굴빛을 어둠 속에 가리기 위하여 황급히 아무 택시나 잡았고, 고마웠다고, 덕분에 잘다녀왔다며 인사를 하고 택시에 올랐다.

그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오랫동안 내가 탄 택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2010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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