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16 12:30 : 걸상 위의 녹슨 공책


동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1박 2일의 동행은 솔밭에 스미는 5월의 햇살처럼 조용했고 무덤덤한 것이었다.

그와 함께 화암약수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곳에 가면 소금강이 있다고 했다. 조양강을 건너 외길을 달려 삼십분 쯤 가자 개울가에 집이 몇채 있었다. 거기가 화암이었다.

우리를 내려논 버스는 사북으로 가는 신작로로 들어섰고 꼬리에 먼지를 남기며 사라졌다. 오후 세시의 햇살은 벌써 그림자를 길게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자를 보자, 내가 이정표도 없는 외딴 곳에 서 있으며 더 이상 내일은 오늘과 같은 모습이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버스가 떠난 쪽을 바라보는 사내의 모습에서 어쩐지 외로움이 느껴졌다. 남루한 모습과 삐쭉삐쭉 자란 머리카락 사이로 단정한 콧날과 입술, 턱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그의 입술은 좀처럼 열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눈을 크고 속눈썹이 길었다. 어려보였다.

"학생이예요? 혹시 고등학생?"
"아니요. 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잠깐만요"하더니 가게로 들어가 뭔가를 한동안 물은 뒤 나왔다.

"어떻게 하지요? 가게에서는 소금강이라는 소리는 처음이라고 하네요. 제가 길을 잘못 찾아온 모양이네요. 분명 열차시각표에는 여기에 정선 소금강이 있다고 적혀있는데..."
"괜찮아요. 저도 꼭 어디를 가자고 이 곳에 온 것은 아니니까요."

숙소를 잡기 위하여 다리를 건너 화암약수 쪽으로 갔다. 산장인 듯 집 한채가 산 그늘 밑에 자리잡고 있는데, 집 위로 큰 떡갈나무들이 가지를 벌리고 있어서 마당에 들어서자 한기마저 느껴졌다.

중년의 여자가 나왔는데, 서울에서 여행 온 것처럼 화사하게 화장을 했고, 시원스런 미모였다.

"평일이라 방이 충분하기는 한 데, 애인이 함께 와서 방을 따로 쓰겠다니?"하며 아무 방이나 맘에 드는 방을 쓰라며 방값은 오천원이라고 했다.

사내는 깍을 생각도 않고 만원을 내고,

"혹시 소금강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소금강이야 강릉 근처에 있지 여기 있을 턱이 있나? 그건 그렇고 우리집에서 화암약수로 백숙을 끓이는데, 필요하면 말해요. 우리집 백숙 때문에 여기온다는 손님들도 있어요."

사내는 열차시각표를 펼쳐 보여주며 소금강에 대해서 다시 물었고, 주인은 몰운대 옆의 광댓골인가? 잘모르겠네 하더니, 거길 가려면 택시를 대절해야 한다며, 거기보다 여기의 경치가 더 좋다고 하며 사라졌다.

방값을 치르기 위하여 오천원을 꺼내 사내에게 주자,

"점심이나 사시죠. 그럼 들어가 쉬세요. 신발은 방 안에 들여놓는 것이 좋을 겁니다."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숙소가 정해지자 마음이 놓였다. 베개를 내려 잠시 누웠다. 몸이 나른했지만, 방 밖에서 아주머니가 "이 방이 맞나? 산골이라 추워서 불을 피워야 하는데... 아가씨?" 하며 불렀고 "네, 아주머니 이 방이 맞아요."하고 방문을 열어보여 주었다. 주인은 "참말로 두사람이 내외하네?"하며 떠났고, 다시 누웠다. 옆방 문이 드르륵 열리고 하는 소리들이 낮잠처럼 몰려왔다. 하지만 차를 타고 어디론가 멀리가는 것 같은 미지근한 멀미 때문에 일어났다. 뻐꾸기가 울었다. 그 소리를 듣자 봄 날의 오후가 온 몸으로 스며드는 기분이었고 혼곤했다. 방문을 열고 다리가 있는 개울가로 갔다.

개울로 내려가자, 사내가 거기에 있었다. 개울물을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의 얼굴은 오후의 햇살이 물들어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참 좋죠? 이렇게 낯선 곳에 앉아 오후의 햇빛을 바라본다는 것이..."

사내와 나는 자갈을 집어 개울물에 집어던지면서 한마디씩 이러저런 것을 물었다.

그는 "그렇구나. 제가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았네요."하며, 이름이 여민이라고 했다. 그는 뭘 물어보면 아주 새삼스럽다는 둣이 "그렇구나."하는 말을 붙여가며 드문드문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렇구나. 거기는 대학 2학년이구나. 저는 올해 간신히 들어갔죠. 머리가 다 자라려면 한달쯤 더 기다려야 하나봐요. 남들은 벌써 장발이던데..."

짐짓 젊잖게 말하지만 속에는 아이가 하나 들어있는 것 같은 그의 말투는 귀여웠다.

우리는 "그러니까 그쪽은..." 등등으로 서로의 이름을 죽여가며 드믄드믄 이야기를 나눴다.

여행이 처음이라고 했다. 고등학교 다닐 동안 여행을 무척 하고 싶었지만, 가출 한 번 못해 봤다며 웃었다. 중간고사도 끝나고 축제가 시작되었지만, 아무 관심도 없기에 배낭을 매고 무작정 떠났다고 했다.

"여자친구가 축제에 가고 싶었을텐데...?"
"여자친구요? 없어요." 시무룩하게 말하고 개울을 향해 또 돌을 던졌다.

퐁당!

그 말을 듣고 왜 나도 남자친구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을까?

개울 위로 오후의 빛이 내려앉았고 개울은 황금빛으로 어지럽게 반짝였다. 산과 산으로 하늘은 오목했다. 숲의 정적을 깨치려는 듯 새들이 울었고, 개울물은 바위 틈에 뒤채이는 소리를 내며 서쪽으로 흘렀다. 바람이 불었다.

"참 좋네요. 이곳은 호젓하고 아늑하네요."
"그렇군요. 이렇게 사람이 없다니..."

좀더 개울가에 있다가, 몇 집 안되는 마을을 한바퀴 둘러본 뒤 숙소로 돌아왔다.

무료하여 제천에서 산 주간지를 읽고 있는데, 옆 방으로 오라고 했다.

그의 방에는 저녁이 차려져 있었다. 그는 어색한 듯 서두르는 표정으로 코펠에서 밥을 퍼서 내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혹시 밥을 사먹을 수 없을 때를 생각해서 비상으로 준비해 온 것이라, 반찬도 없고 맛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백숙은 정말 먹고 싶지 않아서..."

"저한테 시키시지... 다른 것은 몰라도 밥은 제법 하는데..."하며 방을 둘러보았다.

짐도 별로 없고 하루만 머물다 갈 것이지만 그의 방은 단정했다. 몇권의 문고판 책과 공책 그리고 열차시각표가 볼펜과 함께 있었고 옷은 한쪽에 개어져 있었다.

"책을 많이 읽나요?"
"아니요. 간혹 소설이나 읽습니다. 왜 읽는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별루 재미도 없는데 말이죠."

식사를 마치고 책을 한 권 빌려 방으로 돌아왔다. 불을 피운 방은 더웠다, 방문을 열고 문지방 근처에 앉아 책을 뒤적였다.

책의 뒷장에 볼펜으로 눌러 쓴 그의 글이 보였다.

2010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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