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벗어나자 남한강이 보였다. 녹색 물빛이 가득한 양수리를 지나자 풍경은 단순해졌다. 맥락을 잡을 수 없는 산과 들의 곡선들의 끝없는 뒤엉킴. 산과 들은 차별없는 녹색의 음영들 속에 녹아나고 있어서 여기와 저기의 차이를 분간할 수도 없었고 눈에 띄는 풍경도 없이 5월의 단조로움만 차창을 스쳐지나고 있었다.
여행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이 그쳐버린 것은 갈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늦은 저녁, 빛은 사라지고 알전등 빛이 희미한 어느 마을에 당도했으나, 하룻밤을 묵을 곳조차 찾지 못하고 어두운 골목을 그림자처럼 배회하는 낯선 그림자 사이를 스쳐지나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아니 그런 생각보다 나는 하룻밤을 지내는데 얼마를 지불해야하는 것인지 돈은 충분한 것인지, 낯선 식당에서 홀로 식사를 하는 처량함과 불결한 화장실을 가야하는 것등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낯선 것을 용납할 수 있는 관대함이나 용기가 나에겐 없었다.
잠시 졸았고, 깨어나 차창 밖의 짙어진 녹음 속의 산촌의 정경을 바라보다 보니 문득 제천이었다.
꺼먼 분진이 떠다니는 플랫폼을 지나 대합실의 개찰구 위에 걸려있는 시각표를 몇번인가 본 끝에 바다로 가는 표 대신에 정선으로 가는 표를 끊고 말았다.
출발까지 삼십분 쯤 남았다. 역을 벗어나자 5월의 폭양에 달궈진 아스팔트에서 후끈 열기가 올라왔다. 제천 시내는 높아야 삼층짜리 건물 밖에 없는 야트막하고 초라한 곳이었다.
그때 햇빛이 어지럽게 눈 앞을 스쳐지났고, 처음으로 눈 앞에 안개와 같은 것을 느꼈다. 눈꼽이 낀 것이라고 생각하며 눈물이 나오도록 몇번이나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고 서있는 동안 사람들이 몽롱하게 내 곁을 스쳐지났고, 역전 앞이 턱없이 넓어지는 느낌이 들면서 아무 연고도 없이 그 곳에 서 있는 자신이 막연하게 느껴졌다.
대합실로 돌아가 매점에서 콜라와 함께 산 주간지를 맨 뒷장부터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열차시각이 신경쓰여 집중이 되질 않았다.
평일이라 그런지 그늘진 대합실 안에는 객지로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만 보였다. 행색은 곱게 차려 입어도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고, 다들 지치거나 무료해 보였다. 그들 사이로 청년이 보였다. 어깨에 그다지 크지 않은 배낭을 걸치고 시각표를 한참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간혹 손에 든 책을 들여다 보고 시각표를 다시 쳐다보다가 매표소로 가서 표를 끊었다. 그는 물이 빠진 검정색의 웃옷을 걸치고 있었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작업복처럼 입던 군복에 물을 들여입던 스몰복같았다. 머리는 잡초가 웃자란 것처럼 부시시했다. 배낭을 맨 것을 빼곤 그 또한 집으로 돌아가는 여느 사람과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배낭 한쪽 귀퉁이에 손으로 그린, 피스 마크를 보자 대학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개찰을 시작했다. 자리를 잡으려고 그러는지 사람들은 뛰거나 바삐 걸었다. 객차 안에 들어서자 자리는 많이 비어있었다.
열차는 기적을 울리며 출발했고 산으로 산으로 달려가는 것 같았다. 완행열차는 역마다 섰고 사람들은 머리에 물건을 이거나 짐을 들고 자그마한 개찰구를 지나 바삐 사라졌다. 역에 설 때마다 객차 안의 사람들은 줄어들고 대신 한가한 오월의 햇빛이 초록빛 공단으로 된 자리 위에 노랗게 떨어졌다.
영월을 지나자 탄좌가 시작하는지 철로주변은 검은 빛이 감돌았다. 무연탄 분진 위에 예미, 자미원은 자리잡고 있었고, 사람들은 잿빛 담벼락 밑에 서서 열차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도 흑백이었고, 마을에는 꽃이라곤 단 한번도 피지 않은 것 같았다.
차창 밖으로 눈을 대고 마을을 바라보았다. 마을은 계곡 쪽으로 가파르게 굴러내렸고, 열차가 출발하자 언덕 아래로 마당과 골목이 내려다보였다. 마을 옆으로 흐르는 시커먼 개천 옆에는 하늘색으로 회칠을 한 수용소같은 사택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주변에는 나무도 없었고 찌든 빨래들은 잿빛 마을을 더욱 우울하게 했다. 아이 몇명이 열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마을을 둘러싼 산의 곳곳에는 나무로 만든 갱도의 입구가 있었다. 입구로 부터 골짜기로 석탄이 흘러내렸고, 무너진 산은 피폐해보였다. 그런 마을들은 철로를 따라 하염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잿빛 마을과 긴 터널을 지나고 증산을 지나자, 협곡이 나왔고 그 밑으로 강물이 흘렀다. 강물의 한쪽은 짙은 녹색이었고 한쪽은 탄광에서 흘러온듯 흑빛이었다. 금을 그은 듯 나뉘어져 흐르던 물은 여울이 있는지 협곡의 끝에서 잿빛 물거품을 내며 뒤섞이더니 협곡 사이로 사라졌다. 열차는 협곡을 U자로 건넜다. 맞은 편 절벽 위에 지나온 철로가 아슬하게 보였다.
열차는 계곡을 따라 한동안 달렸다.
승객들이 내린 열차 안은 거의 비어 있었고, 몇 사람 만 차창 밖을 보고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은 제천에서 보았던 청년이었다.
산 사이로 햇살이 투명하게 퍼지면서 제법 너른 들이 내려다 보이더니 "다음 내리실 역은 정선, 정선입니다." 안내방송이 나왔다.
아까의 청년이 일어나 입구 쪽으로 나갔고 나도 뒤를 따랐다.
마을을 보자, 너무 멀리까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개의 다리가 강물 사이로 걸쳐져 있었고 좁아터진 들 위로 가촌처럼 늘어선 시골마을에 내려섰지만, 어디로 가야할 지 몰랐다. 그래서 플랫폼에 있는 나무의자에 잠시 앉았다.
함께 내린 승객들은 썰물처럼 역을 빠져나갔지만, 청년은 플랫폼에 서서 열차가 떠나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저어기~ 여기 사세요?" 무심결에 그렇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말을 건 사람이 누군가인가를 확인하려는 듯 약간 눈을 찌푸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아뇨. 이 곳은 처음입니다."
짧게 말한 그는 어깨를 으쓱, 배낭을 추겨올리며 개찰구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역을 벗어난 그는 역전 앞에 서서 한동안 마을을 둘러보더니, 길 건너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벌써 오후 두시를 넘었고 아침을 거르고 온 것이 생각났다. 허기가 몰려왔지만, 남자에게 무안을 당한 느낌 때문에 다른 식당을 가려고 했다. 하지만 눈에 띄는 식당은 그곳 밖에 없었다.
식당 안에는 방수포 대신 비닐을 덮어논 서너개의 탁자가 있었다. 청년은 이미 주문을 한듯, 문을 열자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책에 코를 박았다. 보고 있는 책은 열차시각표였다.
곁을 지나 그의 등 뒤의 자리에 앉았다. 먼지가 앉고 바랜 벽의 메뉴판에서 잔치국수를 골랐다.
청년은 계속 시각표를 보고 있다. 시각표의 이쪽 저쪽을 보아가며 모나미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치곤하더니 식사가 나오자 배낭 속에 책을 집어넣었다.
잔치국수가 나왔다. 국수는 멸치다시를 하지 않았는지 밍밍한 반면 짰다.
"혹시 어디로 가십니까?"
청년이 어깨를 내 쪽으로 삼분지 일 쯤 돌리고 물었다.
입 속에 국수가 잔뜩 든 까닭에 한동안 우물거리다가,
"바다로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그래서 어디로 가야할지...?"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무런 댓구없이 몸을 돌려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몇 젓가락을 뜨지도 않았는데 잔치국수는 금새 바닥나 버렸고 나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 계산을 하려고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거스름 돈을 받고 있을 때,
"이 곳에 대해서 아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갈 곳이 없으시다면 저와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하고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은 바람소리같았다.
2010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