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13 21:50 : 걸상 위의 녹슨 공책

봄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난치병에 하나인 포도막염에 걸린 때문인지도 모른다. 봄날이 되면, 햇빛이 안구 안쪽에서 잠자고 있던 세균들을 들쑤셔 깨운다. 이 놈들은 빛을 잡아먹고 증식을 시작한다. 안압이 올라간다. 그러면 바라보는 사물 위에 옅은 안개와 빛이 얽혀 떠다니곤 했다.

일반안과에 가면 녹내장이란 진단을 내리곤 했다. 그래서 서울대병원이나 공안과 같은 곳에 가야만 했다. 한참동안 차례를 기다린 뒤, 암실처럼 어두컴컴한 곳에 놓인 현미경과 같은 것 앞에 눈을 들이밀고 앉는다.

의사는 아무 소리도 없이 동공 안으로 노란 불빛을 쏘아대며 안저에 가라앉은 것들을 탐사하기 시작한다.

의사의 숨소리를 들으며 망막에 맺히는 불빛이 교도소의 안마당을 샅샅히 흝어가는 서치라이트같다는 생각이 든다.

망막이 빛의 얼룩들로 얼얼해질 즈음이면,

"세균이 많이 자랐네요. 약은 늘 쓰던 것 아시죠? 그걸로 처방을 해드리지요."
"그것을 쓰면 시력이 조금씩 나빠져요."
"할 수 없지요, 그만한 약이 없으니. 빛이 밝은 날엔 썬그라스를 쓰면 좋은데..."

병원으로 오면서 썬그라스라도 사서 써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 말을 듣자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그가 망막을 지나 내 가슴 속의 비밀이라도 들여다 본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무뚝뚝한 의사는,

"자 그럼, 성간호사!" 하고 자신이 앉은 의자를 굴려 책상 위로 가서 나의 진료카드 위에 뭔가를 썼다.

간호사는 눈동자 위로 몇가지의 안약을 떨어뜨린다. 그 안약들은 포도막염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다. 단지 병원에 온 환자를 위로하기 위한 맹물과 같은 위약일 것이다. 내가 넣던 안약이 비강을 통해 흘러드는 맛은 약간 쉰내가 난다. 이렇게 맑은 맛은 아니다.

진료실을 벗어날 때면 마치 말기암 선고라도 받은 환자처럼, 문 앞에 서서 손수건으로 눈 가를 훔치게 된다.

암실같은 진료실을 벗어난 탓인지 병원복도는 무척 밝지만, 눈동자에 감도는 안약 때문에 사물들은 굴절되어 약간 어지럽다.

그렇게 봄이 오면 내 눈 깊숙한 곳에서 포도상구균이 자라고, 안약을 넣었고, 시력이 떨어져 안경을 새로 맞추고 하는 일들을 몇년동안 계속했다. 그래서 봄날이 되면 햇빛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눈물이 아닌 안약이 흘러내려도 슬프다.

병원을 나섰다. 병원 앞의 화단에서는 초록색 사이로 노란장미와 같은 것만 피어있지, 더 이상 초봄을 장식하던 벚꽃과 같은 것은 없다.

봄도 여름도 아닌 어중간한 이 계절이고 햇빛만 눈부시게 산란할 뿐이다.

아직도 봄이라는 것은, 단지 허벅지 사이로 스쳐가는 바람 속에 아직도 미미하게 나마 냉기가 감돈다는 것, 그것 정도?

이유없는 피로감을 느낀 나는, 잠시 병원 본관 앞의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보았다. 봄이라서 그런지 파란하늘은 나즈막했다.

바람결에 미미하게 라일락 냄새가 몰려왔다.

오월은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다.

그는 이제 내 곁에 없다.

2010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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