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뉴스

죽은 새의 꿈으로 들어가 황량한 거리의 조감도를 본다. 하지만 그것의 생은 나비와 풀벌레의 생존에게는 율법이었고 난다는 것에 대한 우울의 이유였을 뿐이다.

우울증 : 우울증으로 자살을 했을지도 모른다.

자살했기 때문에 우울한 것이다. 우리는 죽은 자에게 죽음의 이유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우울이란 영혼조차 중력가속도를 벗어나지 못하여 기어코 이 도시의 변경을 서성이는 이유이며,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거나 구두에 광을 내고 마침내 사랑에(을) 빠졌(잃었)다고 웃(우)는 이유다.

– 무슨 짓이든 하는 것이 이 거리의 양식이고 우울은 나날의 한 형식이다 –

지피지기 : 적과 나를 아는 것이 아니다. 적에 입각하여 적의 적인 나를 아는 일이다. 백번을 싸우고 위태롭지 않기 이전에 고개를 떨구고 한번쯤은 울어야 할 일이다.

자신의 생을 자신의 눈으로 가늠할 수 없는 자들이 죽은 영혼에게 산 者가 갈 길을 묻는다. 영혼의 갓길에 주질러 앉아 발라먹을 잠언은 없다. 약도 또한 산 者가 죽음에게 죽음에 대하여 해줄 말이 없는 것마냥 엉성하다. 단지 아는 것은 사람을 무서워하는 관계로 귀신들은 텅빈 곳에서 어두운 허물을 갈아입고 사람들이 자신을 해할까 무서워 혀를 깨물고 피를 흘린다는 것이다.

– 있지조차 않는 것이 외로워 내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니 –

이번 겨울은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길고양이의 발은 젖었고 나는 미끌어졌으며 봄에는 꽃이 화사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고단하기가 그지없다.

너의 손가락은 길고 투명했다. 늘 네 손톱에 붕숭아 꽃물을 들이고 그 빛이 손톱 위에 머물다가 손톱의 변두리로 밀려가 마침내 사라지는 그 날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싶었다.

손톱 끝에서 불현듯 빛이 사라진 날, 식어가는 커피잔 너머에 있는 너의 사랑의 가녀린 운명에 대하여 단죄하려고 했다. 손끝에 피멍이 들도록 네가 현을 뜯어도 나의 가슴은 텅빈 곳이 없는 관계로 비명하지 못했다.

구절리 : 2009년 03월 08일, 1978년 3월 13일에 그 곳에 함께 가기를 바란다. 미래를 잃은 나는 과거를 희망한 후, 있지조차 않는 시간의 유적을 여기에다 적는다.

함께 갈 때, 우선 아무 말없이 열차의 밖을 본다.

– 고요를 통신하고 서로를 숨쉬었고 결과는 침묵이었기에 –

우리는 탄광촌에 뒤덮힌 분진과 헐벗은 산모퉁이로 봄이 오는 소리를 기적소리와 섞었다. 열차는 함백을 지나지 않는다.

1978.03.13일 저녁 : 바람이 거칠게 불었고 타지에서 온 사람에게는 통금이 있다. 역사의 난로는 철거되었고, 청량리행 비둘기호는 3월 14일 03시 50분에 출발한다. 플랫폼의 차가운 벤치에서 그 시간까지 다가올 망령된 시간들에 널어놓은 무수한 음표들을 선로를 향해서 던진다. 거기에는 오늘도 섞여있다.

깜빡거리는 시간 20100128132853으로 부터 : 너에게 가닿는 시간은 1091=11,574d:1h:46m:40s, 11,574d≒31y:251d이다.

– 그 거리가 이렇게 기나길고 무의미하리라곤 차마 생각하지 못했던 숫자다 –

시간은 깊다. 이제 너의 체온은 일만개의 태양이 스쳐간 지구의 온도와 닮아있다. 하지만 아직도 대지 속에 감도는 향기를 맡을 수 있고 매일 저녁은 그 이전보다 그윽하게 익어가곤 한다.

내일의 날씨 : 뭐라고 해도 내일이 되어봐야 알 일이다.

더 이상 내일에 대하여 기대하기를 포기했고 빨래를 널면 그 뿐이다. 나에겐 기대할 어떤 것도 없다.

– 안된 소식이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기대할 것을 만들기 위하여) 자식을 낳는다 –

뉴스가 끝난 후 : 공허해지고 사유는 예전처럼 바닥에 깔린다. 할 수 없이 연속극을 본다.

– 사유의 공식은 0Kg X 9.8N = 0KgN, 즉 무중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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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ost Has 8 Comments

  1. 마가진

    글을 읽으며 왠지 자꾸 공허함을 느끼게 되는군요..
    하루를 5분이란 짧은 토막을 남긴 시간입니다.
    편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1. 旅인

      공허한 느낌을 받은 이유는 제가 보는 시각을 틀어놓은 탓일 겁니다.

      왜 쓸쓸하게 쓰여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김경주식으로 쓴 글입니다.

  2. lamp; 은

    여인님!!! (그저 크게 불러보고 싶어서요~)
    어제는 조용한 곳에서 책읽고 차 마시면서 사람들 구경하다가
    책 마지막 장에 글을 써놓았는데.. 내용인 즉은…
    (여인님의 단어를 빌려 조금 바꾸었어요)
    적에게 있어 적은 나이고 나의 적은 그라고 생각하면
    나도 적도 서로 나이고 적이고..

    이 많은 사람들. 모두 다르다 생각하지만 같은 사람들.
    다르다고 말한다면 단지 내가 다르게 볼 뿐.
    선한 사람은 그렇다 치고…
    악한 사람의 그 악함 역시 가만 들여다 보면 나에게도 있으니
    타인을 단죄할 아무것도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는 곳에 이르렀어요.

    덧.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를 찾아보려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아주 나중에서야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따위는 없었다고…
    이유따위는 없다고… 그게 세상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1. 旅인

      ‘적의 적으로서 나’는 김훈씨의 칼의 노래에서 나옵니다. 그 구절을 보고 지피지기는 백전불태의 의미가 평면적인 것이 아니라 적의 적으로 나를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칼의 노래에서 보면 이순신은 왜적들을 증오하거나 미워함 없이 그들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상황이 늘 저 사람들을 적으로 또는 친구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3. 클리티에

    어김없이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면 봉숭아잎을 찧어
    손톱끝에 칭칭 동여매고 갑갑한 하룻밤을 보내던 과거의 ‘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막 지나가는 여름을 내 손끝에 붙잡아두고 그렇게 일찍부터 첫눈을 기다리곤 했죠.
    그렇게 첫눈이 오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다 믿지는 않았지만
    멀리 떨어진 계절과 계절이 만나는 짜릿하고 신비한 순간에는
    어떤 마법같은 일이 일어날 것도 같았어요. 믿음보다는 그런 설레임이었죠.
    과정이 결과보다 행복하다 할까요?

    그러나 그저 자연스럽게 시작되길 바랬넌 내 사랑이
    도시 한가운데 피는 눈꽃처럼 덧없는 소망이었다는것을 깨닫고 그 이후 부터는
    손톱에 봉숭아물을 안들였네요.

    뉴스를 보니 내일밤부터 눈, 비 소식이 있다네요. 이번해는 눈 소식이 참으로 많네요..
    여인님, 좋은 주말 보내셔요..

    1. 旅인

      날씨가 우중충하네요. 그런데 이런 날씨가 마음에 듭니다. 오히려 맑은 날에 비하여 사물이 더 잘보이는 것 같고…

      클리티에님은 서울에 살면서도 봉숭아물을 들여본 적이 있으신가 보네요?

      손톱 끝으로 초생달 모양으로 색이 사라질 무렵의 여자들의 손가락은 얼마나 예쁘던지…?

    2. 클리티에

      늦은 밤도 아닌데 꽤나 감성적인 댓글을 달았군요. >_< 과거의 '저'는 꽤 어렸어요. 꼬마아이였습니다. ㅎㅎ 남녀의 '사랑'을 기대한것도 아니었구요. 어렸을때 시골에 계시는 할머니랑 살았더랬어요. 그때 할머니께서 여름이 끝나갈 무렵 봉숭아잎을 찧으셔서 손톱에 물을 들여주셨지요. 그때 추억이 문득 생각이 났더랬습니다.

    3. 旅인

      봉숭아물을 들인 그 꼬마는 얼마나 귀여웠을까?

      저도 할머니와 몇개월을 보냈는데 저의 할머니는 좀 살벌한 할머니라서… 저보고 천하에 숭악한 눔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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