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교;Manichaeism

Manichaeism

마니교는 절충주의(ecklecticism)이다. 모든 종교의 장점을 흡수하여 만든 종교는 결국 그 종교의 본질을 잃고 만다. 敎祖 마니(216.4.14~274 ?)는 젊은 시절 이미 생명의 책, 샤브라칸, 신비의 책, 마니서한, 교훈집, 거인의 책 등 마니교의 경전들을 형성했으나, 그의 종교는 조로아스터교를 바탕으로 기독교의 영지주의적인 요소, 불교, 바빌로니아의 원시신앙 등을 섞은 것에 다름아니다.

그의 종교는 본질이 절충주의인 탓에 마니교의 아이덴티티가 없이 늘 변형되어 다른 유사종교처럼 변질되곤 했다. 중세 유럽에서 마니교와 유사한 가르침을 가진 이른바 新마니교라는 종파가 다시 나타났다. 바울로파(7세기 아르메니아), 보고밀파(10세기 불가리아), 카타르파 또는 알비파(12세기 프랑스 남부)와 같은 집단은 마니교와 매우 비슷하여 마니교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마니교와 직접적인 역사적 연관성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비록 마니교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밝힐 수 없어도, 중세의 신마니교 속에서 그노시스적인 성향을 엿볼 수 있으며, 아리우스파적인 요소 또한 찾아볼 수 있다는 면은 있다.

동방에서는 투르키스탄, 중앙아시아 방면에 퍼지고, 7세기말에는 唐에까지 전파되었다. 唐에서는 한때 금압을 받았으나(732), 부활되어 장안 등에 회당이 건립되었지만, 843년 또 다시 금지되었다. 당을 거쳐 몽고의 유목민인 위구르족에 전파되었고, 그 후 위구르인이 투르키스탄 방면으로 이주한 후 다시 중앙아시아의 마니교가 성행하였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13?14세기에 쇠퇴, 소멸하였다. 중국에서는 일월교(日月敎)로 원대에 유입되어 결국 명교(明敎)로 변천되고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명교의 힘을 빌어 나라를 건국하여 明이라 칭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말 말세에 미륵이 나타남으로써 개벽이 일어나고, 증산의 말을 믿는 자들이 후천세계에서 복락을 누린다는 사상과 혼합하여 강증산이 증산교를 세우고, 이 증산교가 세포분할하여 천리교, 천리교가 다시 세포증식하여 대순진리회에 이른다.

이 마니교는 종교 역사 상 가장 탄압을 많이 받은 종교 중의 하나인 데, 그것은 조로아스터교와 같이 선신과 악신이 싸우는 과정에서 인류 종말론이 극단적으로 표출되어 정권과 대치되는 특성을 지닌다. 그래서 정권 안보차원에서 늘 탄압을 받게 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