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를 읽다 10 (향당편)

향당편은 공자의 평소 행동거지, 의식주에 대한 것과 생활습관을 거론하고 있다. 이 기록들은 공자의 대화 속에서 이렇게 먹고 입어야 하며,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논의된 것이 아니라, 후인들에 의하여 관찰된 공자의 외면적 행동들일 뿐이다.

이러한 후인들의 기술은 평소 실질적이고도 합리적인 공자를, 형식적이고 고답적인 인물로, 인습의 굴레에 얽매어 있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하는 측면도 있다고 보여진다.

분명 공자의 행동거지나 먹고 자는 일은 당시의 환경과 공자의 합리적인 사유가 접목되면서 적당한 생활태도로 드러났을 것이지만, 공자가 성인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후인들은 형식적인 측면에 경도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사 상을 앞에 놓고 니가 맞다, 제가 맞다, 친척끼리 멱살잡이를 하는 것이 다반사였지만, 한번 조선시대에 있었던 예송논쟁의 성격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예송논쟁의 의미

이 예송논쟁을 통해서 조선의 실학이 어떤 배경에서 안출되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인조는 소현세자에게 아들이 있음에도 소현세자가 죽자, 적장손(嫡長孫)으로 잇는 원칙을 위배하고,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다. 효종(봉림대군)이 죽자 그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喪)에 어떤 복(服)을 입어야 하는 것을 갖고 정파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 계열은 1년상을 주장한 데 반하여, 남인 계열은 3년상을 주장함으로써 기해예송(1차 예송)이 본격화된다.

이와 같은 시비가 붙게 된 이유는 서인(후일 노론 소론으로 갈라짐)들은 자식이 죽었을 때 그 부모는 적장자일 경우 3년상을, 그 이하부터는 1년상을 입는다는 성리학의 예법(宗法)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을 한 것이며, 남인들은 둘째로 태어났더라도 왕위에 오르면 장자와 같다는 차장자(次長子)설을 내세우며, 왕의 禮는 선비나 서민들과 다르다(王者禮不同士庶)고 반박한다.

결국 이 논쟁은 경국대전에 첫째나 둘째나 다 1년복을 입게하는 규정(國制朞年喪)에 의거하여 결말지어지고 이로 인하여 서인들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사실 경국대전의 국제기년상은 논리적인 맥락 상에는 서인이 주장하는 종법에는 맞지 않고, 왕가의 가례인 만큼 남인이 주장한 ‘왕의 예는 선비나 서민들과 다르다’는 것과는 맞으나, 단지 1년상이라는 점에서 남인들은 판정패한 셈이다.

그런데 세월은 흘러 15년 후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 마저 죽자, 또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불거진다. 첫째 며느리의 경우 기년복(1년) 그 이하는 대공복(9개월)이 종법이나, 예조에서 처음에는 기년복을 정했다가, 아차 실수하면서 종법에 따라 부랴부랴 대공복으로 복제를 바꾸어 올린다.

현종은 이를 보고 효종을 둘째로 본 예조가 그르다고 했고 서인 세력이 추출되고 남인 정권이 들어서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를 갑인예송이라고 한다.(2차 예송)

이런 예송의 문제를 놓고 정권이 서인과 남인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지금의 눈으로 보면 터무니없겠으나, “아이쿠, 주자할배요!”하던 당시에는 주자가 한 말은 하늘의 이치라고 생각할 만큼 불가침이었고 그만큼 형식적이었다. 그러니 예송논쟁의 단초가 되었던 송시열을 후일 노론들이 ‘宋子’니 뭐니 하고 지랄들을 떠는 것이다.

서인/노론의 사상적 백 그라운드

예송논쟁의 배경에는 서인의 대부 율곡의 이기일원론을 바탕으로 한다. 율곡의 이기일원론은 理(왕)와 氣(신하)가 같은 사람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을 들고 나오며, 오히려 선비인 공자와 주자는 성인이며 왕을 능가한다는 이론적 백그라운드를 가진다. 그래서 그들은 주자학을 절대화한다.

이런 이론적 백그라운드를 갖고, 그들은 왕권에 도전하기 시작한다.

그 예가 광해군 때 북인이 무리한 정책을 추진하면서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자, 1623년에 쿠테타로 인조를 옹립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한다. 그리고 그 후 줄기차게 사림의 여론을 등에 업고(崇奬山林: 지방의 유생들을 신경쓰다), 왕의 외척으로 왕을 포위(勿失國婚: 왕가의 혼인을 놓치지 않는다)한다는 방책을 씀으로써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며 끊임없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왕을 들었다 놨다 함으로써 조선의 멸망을 촉진했다.

동인/남인의 사상적 백 그라운드

반면, 남인은 동인으로 부터 시작한다. 동인은 유성룡, 이산해 등에서 시작하는데, 이들은 대개 퇴계와 남명의 제자들로 이기이원론을 바탕으로 한다. 즉 理(왕)가 氣(신하)를 움직이는 것이며, 왕은 선비나 서민과 다르다는 왕권중심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왕권중심적인 사유는 지금과 같은 민주화된 사회에서는 배척되어야 사고이지만, 조선은 왕조체제였기에 왕권이 강해야 왕국은 튼튼하며, 백성은 탐관오리로 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하여 남인들은 성왕의 치세에 주목하여 원시유학인 육경(六經: 詩∙書∙禮∙樂∙易∙春秋)을 중시하면서 주자학에 반한 고학(古學)으로 회구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경학으로, 다시 고증학으로 이어지며 실학적인 배경을 마련한다.

다산은 실학이라는 말을 몰랐다. 그것은 후대의 학자가 다산을 실학자라고 했지 다산은 경학자였을 뿐이다. 그가 신봉한 것은 성왕의 정치요. ‘배움을 닦고 옛 것을 좋아하는 것은 실질적인 일에서 그 옳음을 구한다.'(修學好古 實事求是)에 자신의 학문적 정열를 경주한 사람일 뿐이며, 그는 왕도정치가 구현되어 백성들의 살림이 편해지기를 바랬을 뿐이다.

하지만 정조의 붕어로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향당편을 요약한다면 이렇다.

1001 : 공자가 집이 있는 동네에서의 태도와 종묘와 조정에 있어서의 태도에 대해 기술
1002 : 임금이 불렀을 때의 태도
1003 : 대궐에 가서의 행동거지
1004 : 규(圭)을 잡았을 때 행동거지
1005 : 복식에 대한 이야기
1006 : 음식에 대한 이야기
1007 : 좌석에 대한 이야기
1008 : 고향에서 축제가 벌어졌을 때의 행동
1009 : 다른 나라 사람들을 배웅할 때의 행동
1010 : 약에 대한 생각
1011 : 마굿간이 불탔는데 사람이 상한 것에 대해서만 묻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음
1012 : 임금이 선물을 내렸을 때의 취한 행동
1013 : 임금이 문병왔을 때 취한 행동
1014 : 임금이 부르면 가마를 기다리지 않는다
1015 : 태묘에 가면 모든 일에 대해서 물었다는 것
1016 : 사고무친한 친구가 죽었을 때 장례를 처리했다는 것
1017 : 친구로부터 선물을 받았을 때의 처리 방안
1018 : 잘 때나 집에 있을 때의 태도
1019 : 제복이나 관복, 상복 등을 이은 사람을 만났을 때의 태도
1020 : 승차 시의 태도
1021 : 야생조류가 날자 얼굴 색이 변했다는 이야기
1022 : 모인 새들을 보고 좋은 시절이라고 말함.

20091127

▶ 원문보기 : 논어10 鄕黨篇

This Post Has 6 Comments

  1. 플로라

    간만에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나와서 읽었습니다. 예송논쟁을 이해하는 것은 조선을 이해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저는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고 겨우겨우줄거리를 이해했습니다. 이덕일씨는 역사가치곤 소설가와 같은 글쓰기를 하시는 분이라 당황스러우면서도 매력적으로 읽히던 책이였죠. 정조의 죽음에 대한 의학적 소견도 요새 나오던데, 저는 그보다 먼저 그의 심리학적 소견이 먼저 알고 싶네요.
    갑자기 논어에 대한 글이 친숙해지는군요. 몰라도 찬찬히 읽어봐야겠어요^^

    1. 旅인

      저도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송시열이란 사람과 정철이란 사람들에 대한 근거없이 만들어진 편견(좋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을 고칠 계기를 만들기는 했지만 지금 제가 갖고 있는 생각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는 알 수 없습니다.

      최근에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어찰’이 발견되면서, 정조와 노론의 영수인 심환지의 사이가 그토록 친했던 만큼 노론에 의한 정조의 독살설은 사실무근이다라는 이야기로 떠들썩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덕일씨는 박정희를 죽인 것은 결국 친하다고 믿은 김재규였다고 하면서, 정조가 죽은 후 심환지가 표변하여 남인들에게 자행한 일들과 정조독살설 때문에 심환지의 친척으로 결국 사형된 어의 심인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독살설은 아직도 유효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정조의 심리학적인 면에 대해서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최근 한홍구씨나 이덕일씨의 글을 보면서 제가 느낀 점은 너무 쉽게 읽힌다는 점에서, 혹시 이들의 로직에 그저 빨려드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2. 클리티에

      와~ 제가 좋아하는 작가!! ^^*

      정치에 대해 잘 모르는 친구들한테 주는 책 선물 중 하나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였어요. 제도나 시대 차이는 있지만 역사는 반복되는거니까…

      시대상황과 비슷한 게 많아서 도움이 많이 됐어요.

      인조 반정 당시의 우리 민중들의 반응과 예송 논쟁의 과정, 북벌론의 진실 등 교과서나 우리가 그냥 막연히 알고 있던 내용들을 필자의 관점에서 재밌게 풀어줘서 역사에 더욱 빠지게 되었던;;; ^^*

    3. 플로라

      저도 독살설에 대해선 친근한(?)어찰만으로 결론지을 만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아버지를 죽인 할아버지, 죽음으로 몬 어머니, 그리고 정적들에 둘러싸인 정조가 앓은 병이 그저 병일까 싶지요. 한의학은 사람의 몸도 작은 우주로 생각핟고 하니, 그 병증은 마음에서 시작되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하는데, 이번 의학적 소견은 그런 정신과적 소견은 빠지고 병증만으로 판단을 했으니,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계의 연구가 더하여 종합적으로 이루어진 다음에나 판단해보려 해요.
      그나저나 정조의 이야기는 역사적으fh나 문학적으로나 상당히 흥미로운 소재인데, 그걸 그럴듯하게 아주 매력적으로 펼친 이야기를, 이덕일의 책을 능가하는 것은 아직 만나지 못했네요. 아? kbs미니시리즈로 했던 거 하나 괜찮았는데, 제목이 생각 안나네요^^
      빨려들어가는 거라면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 단연 으뜸이었습니다, 저에겐. 전 그 문서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한 일년간은 굳게 믿었던 것 같아요. 그게 픽션이라는 걸 다시 읽다가 느낀 순간 눈에서 불이 나오고 손이 버들버들 떨렸지요 ㅡㅡ;;;

    4. 旅인

      클리티에님께
      이덕일씨의 책을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그리고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클리티에님의 책장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권이나 보았으면서도 그 책을 쓴 작가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서라기 보다는 쉬워서 야사를 읽는듯한 느낌으로 읽었습니다. 그만큼 이덕일씨는 아무런 권위도 없이 제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한겨레신문의 연재기획을 통해서 간신히 이덕일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주류사학에 반대하는 참신한 시선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아마 그의 작업들은 결론이기 보다, 우리 역사해석을 위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5. 旅인

      플로라님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는 정말 소설을 읽는 것 같았습니다.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은 이인화가 말한대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식의 추리소설이라고 하지만 완성도 면에서 장미의 이름을 능가하는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그의 작품처럼 작품의 무대에 대하여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그 시대의 사람들의 사고방식 속에 깃들어 간 소설을 일찌기 본 적이 없습니다.
      하루에 벌어진 일을 소설로 썼음에도 성리학과 정치와의 연관관계, 주역과 궁성 건립의 문제, 정조의 세계관, 다산의 지식, 시경의 한 구절이 그 시대에는 어느 정도 기폭력이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KBS란 ‘이산’ 말입니까?

      정조의 심리에 대한 문제라면, 이번 정조어찰을 보면 정조는 몹시 오만하고, 괴팍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새롭게 정조를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보입니다만, 약물중독 증세 중 과대망상증도 있고, 심신이 허약해지면서 감정조절이 안되는 부분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쪽에서 어찰을 분석해보는 방법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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