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머리에서

가을! 햇살과 한결 가벼워진 공기를 마주하게 되면 겨울이 오기 전에 어디론가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날이 맑다면 쉰내 나는 生을 한번 쯤 세상에 널어 놓아도 좋다. 책도 없이 친구도 없이, 가족도 도시에 남겨놓은 채, 빈 몸으로 포구에 당도하여 낡은 선술집에 술도 없이 말짱한 정신으로 앉아, 마침내 교과서 크기의 창에 노을이 스미는 저녁을 맞이하고 싶다. 그러면 홀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나그네에게 술집 아주머니나 포구로 돌아온 어부들이 말을 걸 것이다. 너의 生은 몇푼 짜리냐고? 나는 그 값을 알지 못한다. 내 삶의 틈 속으로 비집고 들어온 사랑이나 우정이나 따스한 대화들을 달아보면, 저들의 슬픔의 무게만 못할 것이고, 애틋하기는 선창에 울리는 노래가락만 못할 것인데, 바람은 펄럭펄럭 울고 결국 나는 혼자일 것이다. 이 세계와 나의 사무친 혈연이나 우애는 그와 같다. 사랑이나 우정처럼 나의 하루에 붙들어 매어놓아야 할 것들은 모조리 빠져나갔고, 헐거워진 내 인생은 삶의 향기도, 애착도, 서글픔이나, 기쁨도 하얗게 바랜 탓에 가슴에서 명함을 한장 꺼내면, 거기에 쓰인 이름은 絶緣이다. 기억은 흐릿하고 추억은 없다. 얼마나 좋으랴? 홀로라는 것이. 밤이 되어도 좋고 낮이 되어도 좋은 것은, 길은 끝이 없고, 세상은 무변한 데, 나는 늘 여기에 있을 뿐이지 저기에 있을 수 없음이니. 너무 흔하여 흔적조차 없고, 너무 가벼워 바람 결에 휘날릴 뿐

20091019

This Post Has 13 Comments

  1. 마가진

    정말.. 훌쩍 떠나는 여행이 얼마나 멋진 지는 가 본 자만이 알 수가 있죠.^^

    제가 좋아하는 노래가사중에
    “나를 아는 이가 없고 나도 아는 이 없는 막연히 그리운 길 찾아 가네”라는 글이 있는데,
    정말 이 가을,, 이 하늘에 실례가 되지 않도록 떠나고 싶습니다.^^;;

    1. 여인

      장 그르니에의 섬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네요.

      “혼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공상을 나는 몇번씩이나 해 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아보았으면 싶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비밀을 고이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르니에의 저 글은 도시에 머물러 있는 자들이 쓸 수 있는 글이지, 떠난 자들이 쓸 수 있는 글은 아니겠지요?

      어디로 가야할 것인지…?

  2. 컴포지션

    훨훨 떠나보고 싶네요. 자취생인데도 불구하고, 학업과 여러가지 일들때문에 지겨운 일상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몇분간의 여유를 갖는 것 뿐만이아니라 정말로 떠나보고싶습니다. 과연, 제 삶은 몇푼짜리인지 조용히 생각해보다가 갑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

    1. 여인

      컴포지션님에게는 단 한권의 책을 들고 떠나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지이드의 지상의 양식!

      너무 커서 간혹 조금씩 읽어야만 하며, 아무 쪽이나 열어서 읽어도 무관한 책. 방구석에 앉아 읽을 수 없어서, 지상의 양식을 읽기 위하여 할 수 없이 완행열차에 올라야만 했던 지상의 양식과 함께 하신다면…

      제가 쓰지 못했던 독후감을 읽을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치사한 여인이…

    2. 컴포지션

      지이드의 지상의 양식이군요! 한번 구해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번주는 책이 딱히 없네요.. 친구에게 빌린 책들이 있긴한데 내용이 너무 적어서.. 지상의 양식 꼭 한번 찾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

    1. 여인

      여행을 떠나지 못하고 여기에 정박되어 있는 사람들의 우울한 소야곡이기 때문에…

  3. lamp; 은

    자꾸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어요.
    가자! 아자!

    가고말테야..

    1. 여인

      저도 언젠가는 가고 말 것입니다.
      내륙이 끝나는 지점까지…

  4. 위소보루

    정말 떠나고 싶네요. 떠나고 싶은 감정이 커지면 커질수록 떠날 수 없는 이유들도 커지는게 참 가지고 있는 것을 놓는다는게 참 쉬운 일이 아닌것 같습니다.

    이름모를 작은 포구의 비릿한 내음 속에 낡은 선술집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고 가고 싶네요

    1. 여인

      예전처럼 포구에 비린내가 밤바람에 섞여오는 선술집에서 김치 한종지, 밀막걸리를 찌그러진 양은 사발에 부어놓고 당분간 내가 해야할 일이 없다는 것을 불현듯 알게 되는 어느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사발의 막걸리를 단숨에 마셔버리고 포구의 제방 끝으로 나가 밤이 오는 것을, 파도소리가 대지를 씻어내리는 그 소리를 아주 고요한 가슴으로 맞이할 수 있을텐데요.

    2. 위소보루

      아 말만 들어도 멋집니다. 그런 날이 온다면, 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찰 것 같습니다.

      그런 느낌은 아니더라도, 올겨울 혼자 훌쩍 동해의 작은 포구로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네요

    3. 여인

      자아~ 떠나자! 동해바다로.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