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왜 좋았는지 모를 경우가 있다. 화면, 음악, 대사, 주인공의 연기 등을 낱낱이 분해해 보아도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신카이 마코토(新海 誠)는 빛의 작가라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나를 매혹시키는 요소는 애니메이션의 밑에 깔리는 자막이다. 물론 누군가 번역한 자막이지만 말이다.

<초속 5센티미터>를 보면서도 빛을 조율해내는 그의 화면보다, 토오노의 독백에 그만 매료되었고, 마침내 신카이 그가 중앙대학/日의 일본어문학과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서야 아하, 그렇구나 하고 한숨을 내쉰 적이 있다.

그는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독백을 위해서 – 화면에 주인공의 내면을 새겨넣는 방법은 그것 이외는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을 정적 속으로 이끌고 – 그 정적 위에 빛을 덧칠한다. 이것이 그의 애니메이션이 간직한 비밀이다. 때론 정적 때문에 맑은 여름 낮엔 끼끼끼끼하는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彼女と彼女の猫)는 1999년 작으로 거의 최초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으며, 5분짜리 흑백 애니메이션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자신이 제작하고 연출했을 뿐 아니라, 그림도, 그녀의 고양이인 쵸비의 독백조차 신카이 마코토가 담당한다. 음악은 덴몬(天門)의 것이다.

침묵과 고독으로 버무려진 빛의 화면 속에서 그녀를 짝사랑하는 쵸비의 독백을 보자.

彼女と彼女の猫

계절은 초봄으로, 그 날은 비가 왔다.

Sec.1 처음에

그래서 그녀의 머리카락도 내 몸도 무겁고 눅눅해졌고
주위는 너무 좋은 비 냄새가 가득했다.

지축은 소리도 없이 천천히 회전하고
그녀와 나의 체온은 세상 속에서
조용히 계속 열을 빼앗기고 있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용건을 남겨주세요.”

그 날, 그녀가 날 주웠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의 고양이다.

Sec. 2 그녀의 일상

그녀는 어머니처럼 상냥하고
연인처럼 아름다웠다.

그래서 나는
금새 그녀를 좋아하게 됐다.

그녀는 혼자서 살며
매일 아침 일하러 간다.

어떤 일을 하는 지는 모르며
관심도 없다.

하지만 나는, 아침에 집을 나서는
그녀의 모습을 무척 좋아한다.

깔끔하게 묶은 긴머리,
가벼운 화장과 향수냄새

그녀는 내 머리에 손을 얹고서

“갔다 올께.”

…라고 말하고서

등을 쭉 펴고
기분좋은 구두소리를 내며
무거운 철문을 연다.

비에 젖은 아침 풀밭같은 냄새가
잠시동안 남아있다.

Sec. 3 그의 일상

여름이 되고
내게도 여자친구가 생겼다.

새끼 고양이 미미다.

미미는 작고, 귀엽고
응석을 부리는 솜씨는 좋지만

역시 그래도 나는,
나의 그녀처럼
어른스러운 여자 쪽이 좋다.

“있자나 쵸비?”
“왜, 미미?”
“결혼하자.”
“미미, 전에도 얘기했지만
내게는 어른인 연인이 있어.”
“고진말!”
“거짓말이 아냐!”
“만나게 해줘.”
“안돼.”
“어째서?”
“있잖아 미미, 몇번이나 말했듯이
이런 얘기는 네가 좀 더 큰 다음에…”

이런 식의 대화가 계속된다.

“다음에 또 놀러와.
정말로 와야 해.
꼭 와야만 해.
꼭꼭 와야만 해.”

이렇게 첫 여름은 지나고
점점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게 됐다.

Sec. 4 그녀의 외로움

그러던 어느 날
길고 긴 전화 통화 후,
그녀가 울었다.

나로서는 이유를 알 수 없다.
하지만 내 곁에서 오랜시간 울었다.

나쁜 건 그녀 쪽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나 만이 언제나 보고 있는…

그녀는

언제나 누구보다 상냥하고
누구보다 예쁘고
누구보다도 현명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누군가…
누군가…

누군가 도와줘.”

Sec. 5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끝없는 어둠 속을
우리들을 태운 이 세상은
계속해서 돌고 있다.

계절이 바뀌어 지금은 겨울이다.

내게는 처음인 눈오는 풍경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한 느낌이 든다.

겨울에는 아침이 늦어지기 때문에
그녀가 집을 나가는 시간이 되어도
아직 바깥은 어둡다.

두꺼운 코트에 감싸진 그녀는
마치 커다란 고양이같다.

눈 냄새에 빠진듯한 몸의 그녀가
그녀의 가늘고 차가운 손가락과
먼 하늘에서 검은 구름이 흘러가는 소리와
그녀의 마음과
나의 기분과
우리들의 방.

눈은 모든 소리를 삼켜버린다.

하지만 그녀가 타고 있는 전차의 소리만은
쫑긋하게 서 있는 내 귀에 닿는다.

나도,
그리고 아마 그녀도,

이 세상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 終 –

20091008

참고> 彼女と彼女の猫

This Post Has 19 Comments

  1. killbill

    이거 동영상 본적있는데….
    은근히 매력적인데….
    다시 보니 신기하네요…

    1. 여인

      몹시 섬세하고 감성적으로 터치하는 작가의 역량에 감탄할 수 밖에 없습니다.

    1. 여인

      미미도 쵸비도 그리고 그녀도… 모두 다.

  2. 두꺼운 코트에 감싸진 그녀는
    마치 커다란 고양이같다.

    이 부분.. 참 좋아요..

    1. 여인

      자신과 닮은 모습을 볼 때 기분이 좋겠죠?

  3. 마가진

    그림이 정말 섬세하군요.
    고양이의 시점에서 사람을 바라보는.. 시점.

    그림 전반에 드리워진 햇살의 눈부심이 아름답습니다.

    1. 여인

      고양이 쵸비는 짝사랑하고 바라보기만 해야하는 애절함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초속 5센티미터 한편으로 한국의 애니매니아의 눈을 일거에 사로잡은 작가인데, 저는 그의 섬세하고 극사실주의적이며 아름다운 화면보다 그 밑에 깔리는 자막에 매료되었습니다.

      초속 5센티미터를 보실 수 있다면 좋으실텐데…

  4. 플로라

    저 글들이 자막이라는 건가요?

    1. 여인

      예 5분짜리라서 다 필사해서 여기에 올린 것입니다.

  5. 시마시마

    보고있노라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 같이 생각나던데요 ‘ㅅ’

    1. 여인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인가 보네요. 읽어보질 않아서… 재미가 있나요?

    2. 여인

      나쓰메 소세키의 글을 읽어본 기억으로는 재미는 없던데…

    3. 그 오만한 고양이는… 참 멋지고, 정말… 키우고싶은 매력이 있는 고양이예요. 읽어보시면 후회 안하실 겁니다.

  6. 위소보루

    신카이 마코토의 처녀작이 이것인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좋아하긴 했지만 별의 목소리나 다른 것보다 초속5센티미터가 너무나도 훨씬 좋았기에 초속5센티미터를 처음 본 저로서는 이전의 작품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이 글을 보고 오늘 아침에 다운받아서 봤는데,,,

    정말 좋더군요. 5분동안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의 색으로 보여준 것이 아닌가 싶더군요.

    그나저나 요새 리뷰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정리하시느라 많이 힘드실것 같은데 ^^;;

    1. 여인

      그 이전에도 제작한 것은 있는데 그것은 게임 등의 선전용 그런 것들이어서 하나의 작품으로 분리해낼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리뷰만들기가 그리 쉽지는 않네요.

  7. 善水

    저도 지난번에 여인님이 신카이마코토의 작품을 좋아하신다고 하셔서 그중에 못봤던 요걸 봤더랬습니다^^ 음..저는 왠지 억지스러운듯한 느낌이 별달리 느끼는바가 없었는데…떠헙.. 여인님 글을 보니 오히려 설득되는 느낌입니다 나도 그녀도 이세상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그렇곤요~하핫^^

    1. 여인

      저와의 차이라면 젊은 감수성 속에 살고 있어서 신카이의 작품에서 다가오는 느낌의 진폭이 선수님에게는 크게 오지 않는 반면, 저의 감수성은 낡아서 잊혀졌던 것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 같은 그런 점일지도 모릅니다.^^

      왠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여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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