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토토로

1998년 <이웃집 토토로>를 처음 보았다. 그 해는 을씬년스러웠다. IMF가 왔고, 나는 이국 땅에서 자금을 맡고 있었다. 1997년말부터 시작된 은행의 여신회수는 가혹해졌고, 금융권의 그 사교적이고 품위있는 언어는 사라졌고, 고리대금 업자들이나 내뱉을 수 있는 야비한 언어들이 지배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자금이 바닥났다.

돈이 바닥이 나자, 전전긍긍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될대로 되라지 하는 심정이 되었고, 감원을 하여 직원이 사라진 텅빈 사무실에서 맥놓고 앉아 있거나, 회의실 창 가에 앉아 창 밖의 풍경을 그리곤 했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할 일이 없고, 무력한 시기는 없었다.

그래도 나는 남은 직원들이 다 퇴근한 사무실을 지키다 불을 끄고, 어둠이 내려앉은 사무실을 바라본 후, 안녕~! 하고 문을 닫고 집으로 갔다.

사무실 안 보다 집으로 가는 길에 더 많은 생각들이 스쳐가곤 했다.

감원한 직원이 사무실을 나서기 전에 케이크를 사가지고 와서 웃는 얼굴로 케이크 조각을 나누고 함께 사진을 찍고 돌아서는 뒷등의 모습, 그리고 빈 사무실의 구석에 먼지처럼 자리잡기 시작한 그늘, 텅빈 사무실 저쪽 빈 자리 위로 걸려오는 아득한 전화 벨소리, 봉급 날이 며칠 남지 않았음에도 급여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생각들로 착찹했고, 나 스스로 나를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다.

일년 가까이 살아 무의식적으로 집으로 가는 길에, 아득히 먼 곳, 외국에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때 고국에 대한 향수조차 없는 서글픔이 밀려와 나는 휴지조각처럼 초라해지곤 했다.

그런 지루한 날들은 예상보다 길고도 멀어서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가 구겨진 몸을 소파 위에 밀어넣고 TV를 켰다.

만화의 한 장면이 나왔다. 거기에는 우리나라의 논과 들이 7월의 햇빛과 매미소리로 파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그 풍경은 너무 편안하고 아름다웠다. 꽝뚱어로 더빙된 그 만화를 보며, 누가 저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을까 했다.

하지만 조금 있으니 우리의 풍경과 약간은 어긋난 장면이 나오며, 일본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풍경 위로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과 입이 크고 눈이 동그래서 마음씨 좋아보이는 괴물 토토로, 전선 줄을 타고 질주하는 고양이 버스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비오는 날, 정류장에서 토토로와의 만남은 우산 위에 떨어지던 우두둑 빗방울 소리가 얼마나 신기한 소리였던가를 다시금 환기시켰고, 화분에 수박씨를 심어놓고 이제나 저제나 하며 싹이 트기를 기다리던 어린 날들이 기억났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조그만 것으로 오래된 기억 속의 오르골 소리처럼 아름다운 것을 환기시키는 천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만화를 다 보고 난 후, 오랫 만에 가슴이 가볍고 입 가에 미소가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한편의 애니메이션으로 그만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반해버렸지만, 무엇이 그토록 매료시켰는가를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의 현실이 때론 삭막하고, 때론 야멸차고, 때론 슬플지라도 5%의 꿈만 있어도 세상은 살기에 충분한 것 이상으로 아름답고 사랑스럽다는 것이며,

가슴 속에 단 1%의 동화조차 우리가 간직하지 못했기에 세상은 아프고, 우리가 비극을 살고 있다는 가르침이었다.

이러한 복음은 아직도 그의 만화 속에 계속되고 있으며, 그의 애니메이션을 보면, 때로 슬프기도 하지만 이차원의 평면 위에 경이적으로 아름답고 즐겁게 펼쳐진다.

TV로 이웃집 토토로를 보고 난 후, 딸아이를 데리고 음반점에 가서 꽝뚱어로 더빙된 VCD를 샀다.

유치원을 다니던 딸아이는 일요일 아침이면 잠자고 있는 내 배 위로 뛰어올라와 그렇게 말했다.

“아빠! 조금 있다 우리 토토로 보자.”
“저번 주 봤는데 또 봐?”
“음~ 또 보자.”

Totoro-2

20091001

참고> 이웃집 토토로(となりのトトロ)
개봉 : 1987. 4월 기획, 1988. 4월 개봉, 한국에서는 2001. 7.28일에 개봉
각본, 감독 : 미야자키 하야오(宮崎 駿)
제작 : 스튜디오 지브리
배경 : 1955년 일본의 아름다운 시골 마을
인물 : 사츠키(11살), 메이(4살), 쿠사카베 타츠오(아빠), 토토로와 일당 들

참고> となりのトトロ

This Post Has 16 Comments

  1. Levanter

    아.. 토토로 포스터는 정말 원츄죠.
    저도 또 보고싶네요. ㅎㅎ

    1. 여인

      그렇지요?
      저는 간혹 봅니다.

  2. 컴포지션

    이웃집 토토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제가 좋아하는 몇 안되는 만화작가입니다.
    따뜻한 그림체도, 뭔가 신비로운 내용도.. 결국 미야자키 하야오가 맡은 애니메이션은 전부 다 보게된 팬이 되버렸습니다 🙂 이 분의 작품들은 뭔가 따뜻하면서 깊게 생각하게 한달까요? 오늘 저녁에는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들이나 주욱 훑어봐야겠습니다.
    아- 행복한 한가위 보내시길..:)

    1. 여인

      미야자키 하야오와 신카이 마코토만 좋아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대충 라이브러리를 만들어 놓았고, 신카이는 신예라 아직 몇 작품 되지 않습니다.

      정말 하야오씨는 마음이 따스한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거기에는 추석 휴일이 아니네요. 먼 곳에서 나마 추석 잘보내시기 바랍니다.

    2. 여인

      사진과 같은 만화에, 어린아이에서 젊은이가 되기까지 사랑하는 사람의 독백 속에서 제가 젊은 시절에 가슴 속으로 느꼈지만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말들을 길러낼 수가 있었습니다.

      참고로 http://yeeryu.com/746

    3. 컴포지션

      덕분에 잘 보냈습니다 🙂
      신카이 신예라는 어떠한 작가인가요? 그의 작품은 한번도 보지 못 한것같네요. 시간이 나면 한번 찾아 봐야겠습니다.
      여인님은 한가위 잘 보내셨는지요?

  3. 플로라

    저희 부모님이 충격적으로 보시던 만화였답니다. 재미있는 거라고 같이 보다가 저는 완전 소외되고 두분이 옛날집이야기를 얼마나하시던지… 아이들도 좋아해서 스무번도 더 넘게 본 것 같아요. 우산으로 떨어지는 빗방을 소리에 물뒤집어 쓴 것처럼 등짝이 써늘했던 기억이 나네요^

    1. 여인

      요즘처럼 아파트나 성냥곽같은 집에서 살다가 토토로에서 나오는 집을 보면, 어르신들은 예전에 살던 땅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진 집이 떠오르겠지요.

      저희 집 아이도 스무번 쯤 본 것 같네요.

      빗방울 소리가 가장 경쾌한 우산은 비닐우산이었지요. 저희 어머니께서 형 누나 동생은 천으로 만든 우산을 사주시면서도, 잘 부수고 잘 잃어버린다고 그 비닐우산은 늘 제 차지였습니다.

  4. 善水

    토토로 괴담? 그 숨겨진 이야기도 생각해보면 역시 저도 여인님 말씀처럼 그래도 살아가라, 그렇게 얘기해주는것 같아서 볼때마다 눈시울이 시큰해져요 오르골 소리… 과제는 끝날기미가 안보이고.. 으아~ 저도 오랫만에 초속오센치나 별의 목소리틍어놓고 스르륵 언능빨리 자고 싶슴다ㅜㅠㅠ

    1. 여인

      5%의 꿈이라는 것이 참 좋은 것이라는 것을 배운 것 같습니다. 그 시절에는 누구나 다 힘들었으니, 다시 그런 시절을 맍이하지 않도록 모두 애써야겠지요.

      초속 오센치에 나오는 말들은 너무 멋있지요?

  5. 다른 무엇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음악… 배경음악.. 정말 너무 좋습니다..

    1. 여인

      히사이시 조인가요? 그런 만남이 있더군요.

      테오 앙겔로풀루스 감독과 엘레니 카라인드로우의 만남과 같은 것…

      우리나라도 좋은 감독이 좋은 작곡가를 만나 영화와 함께 음악도 발전하기를 기대해봅니다.

  6. 善水

    그런 만남… 저는 우리나라에 이병우 감독님이 좋은감독을 만나서 훨 훨~ 날았으면 좋겠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아직 그만한 그릇을 만나지 못하신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마리이야기.. 오ㅠㅠ, 장화홍련, 내생애가장아름다운일주일, 한강, 호로비츠 왕남 영화들은 오히려 이병우감독님때문에 보게된 영화들이었던것같아요 또한 영화와 테마와 영상과 음악 그 아름다운 하모니에 거슬러 찾아가보면 거기에 또 이병우 감독님이 계시고.. 조금 쌩뚱맞은듯하지만 저는 그분이 ‘물개’ 라는 곡으로 활동?하실때 아무튼 그 곡을 연주하는 걸 보고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 맘속으로 완전히 팬이 되어버렸어요
    음 이 블로그에서도 가끔 그런 만남을 맞이하게 될때가 있는것 같아요

    백아와 종자기? 또 뭐가 있을까요? 늑대와 함께 춤을과 John Barry? 시네마천국의?원스어폰어타임인어메리카의 엔니오모리꼬네와의 만남? 앙겔로풀루스 감독님의 영화는 보지 못했는데 왠지 비할바가 아닐것 같기도 하고 하나 추천해주세요 헤

    음 영화음악들을 촬영하기 전에 미리 만들어 감독에게 준다는 엔니오 모리꼬네가 한 말이 생각나요 어디서나오는 자신감일까요?-.-; 그의 음악은 왠지 영화를 앞서나가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것 같아요 그런데 이병우 감독님은 뭔가 영화를 누르지 않으며 자신이 어우러지게 맞춰간다는 느낌이.. 들을때마다 깊은 반성과 감동을 함께 받는달까요..ㅜㅠ

    1. 여인

      이병우씨가 그런 영화들의 음악감독을 했군요? 앞으로 관심을 가져봐야겠네요.

      백아와 종자기의 서로 알고 난 후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저는 모리꼬네와 존 바리 두사람 중 누구를 더 좋아하는 지 잘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기브리엘의 오보에나 원스어폰어타임인아메리카 & 웨스트는 20세기가 남긴 명곡임은 틀림없지요.

      앙겔루풀루스 감독은 그리스 감독으로 <영원과 하루>, <율리시즈의 시선>, <안개 속의 풍경> 등의 영화가 있는데 그 영화 속에는 늘 엘레니 카라인드로우의 음악이 나옵니다. 카라인드로우의 아다지오의 음계는 하나인데 눈물입니다.

  7. 善水

    아 그렇군요 두분이 연인사인가요? 적어놓았어요 요번주말엔 영화감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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