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 철학적 여행

<사는 것이 무엇인가?> 혹은 <왜 사느냐?> 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로 질문이 바뀐다는 것은 근원적인 문제의 답을 얻으려는 노력을 포기하기로 한 타락이다. 하지만 뿌리를 찾을 수 없는 문제의 답을 찾기 보다, 주어진 것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가꿔 나가겠다는 것은 타락이기는 하여도 나쁠 것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라는 주제로 열심히 살아가면 그나마 용서해줄 수 있는데, <어떻게 하면 천년만년 질기게 살아 갈 수 있을까?> 하는 쪽으로 돌아서면 <왜 사느냐?>라는 질문은 그저 배부른 소리 밖에 안되는 것이다.

이번 여름, 휴가로 일본에 갔을 때, 관광버스의 나의 뒷자리에는 한 가족이 타고 있었다. 그 중 막내는 나이가 한 세살 쯤 되었을까? 아이의 부모는 참하고 언니들도 착해보였는데, 아이의 인상은 어딘지 모르게 짜증스럽고 또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엔 긴 여행 때문인지 계속 칭얼댔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나의 귓 전에 아이는 지치지도 않고 칭얼댔다.

헌데 자세히 들어보니, 칭얼대는 것이 아니라 아이는 오묘한 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왜 태어난니? 왜 태어난니? 왜 태어난니?……”

그 소리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태어나 이 땅에 살고 있는 산 것들에 대한 힐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아이의 소리에 따라 “나도 모른다. 나도 모른다…”하고 되뇌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그 후 동경에 도착하여 디즈니랜드에 가서 딸내미와 오랫만에 서로의 눈을 맞춰가며 “우리 저거 한번 타 볼까?”, “우와 이것 신난다.”하고 놀 수 있었고, 하코네에서 산과 호수가 안개 속에 흐려지는 것과 도로변의 집들을 보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모든 풍경들이 희미해지며, 흐릿해진 풍경에 겹쳐 아이의 소리가 들려오곤 한다.

왜 태어난니? 왜 태어난니?……

그러니까 좀 피곤하기는 했어도 휴가동안 나는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놓고 여행을 한 셈이다.

그 아이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될까?

20090925

This Post Has 7 Comments

  1. 위소보루

    사람은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던데 아마 그 때 우연히도 그렇게 들렸던 까닭은 그런 이유가 아닐까 조심스레 상상해봅니다만 ㅋ 어린 아이가 말하기엔 너무 어려운 주제라서요 하하하

  2. 여인

    아마 그 아이에게 누군가 그 말을 했고, 재미삼아 할머니나 할아버지에게 했는데 잘 한다고 추겨준 모양으로 첫날 시즈오카에서 도쿄까지 가는 길에 내내 그러더니, 다시 서울로 가기 위해서 공항으로 가는 길에 다시 왜 태어났니를 읊어대더군요.

    그런 정황은 이해가 되는데, 웃긴 것은 제가 거기에 맞춰 나도 모른다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는 것이 우습습니다.

  3. 善水

    하하하 애기가 진짜로 그랬나봐요~ 그럼 그 소리를 매일매일 듣는 부모님들은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궁금합니다.

    제게 일침을 땡겨주는 말씀이십니다.
    그러고보니 어떻게 살겠는가’틀을 지워놓고 끌려다닌 나머지 왜 사는가’가 보일틈이 없었던것 같아요

    1. 여인

      늘 자신들의 인생에 대해서 되돌아 보겠지요? 뭣 때문에 난 태어났지? 하면서…^^

      그저 하루 하루 사는 것보다 어떻게 살겠는가 하는 자문과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왜 사는가의 질문은 답을 잘못 찾으면, 옥상에 올라가거나 약국에 갈 수도 있기 때문에 그다지 좋은 질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4. 컴포지션

    그 꼬마 정말 재밌네요. 저도 여인님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속으로 나도 모른다라고 계속 되네일 것 같습니다.
    **
    “왜 태어났을까”라는 생각보단 역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중요하죠. 그중요한것 배우고 갑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

    1. 여인

      좋게 살아야겠죠? 많이 미소짓고, 사랑하며, 행복하게, 이쁘게, 가슴이 풍요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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