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p;Chi Rho

In Hoc Signo Vinces

In this sign you will conquer

chi rho/photos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the Great)로도 불리우는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 신앙을 공인한 황제로 유명하며, 기독교의 승리의 문장인 Xp를 도안해 낸 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4인 체제에서 이루어진 기독교 박해(303년) 이후이다.

아버지(콘스탄티우스)가 죽은 뒤 로마에 돌아 온 그는 자신의 군대에 의해 황제로 선포된다.(306년) 다음 해 공동 황제이던 막시미아누스로 하여금 자신을 황제로 인정하게 하고 사위가 된다. 그는 본래 미트라교도 였다고 하고 혹은 태양신을 믿는 자라고 했다.

그는 311년 동방의 황제 갈레리우스가 죽자 처남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맺고, 또 다른 처남인 막센티우스와 전쟁을 벌인다. 313년 그는 로마의 북부 티베르 강을 가로지르는 물비안 다리를 사이에 두고 열세의 병력으로 막센티우스와 대치 중이었다. 그는 밤 중에 환상을 보게 되는데, ‘In Hoc Signo Vinces(이 징표를 사용하면 승리할 것이다)’라는 환청과 함께 Xp(Chi Rho: 그리스도의 이름)의 징표를 보고, 병사의 방패와 투구에 기호를 그려넣고 전쟁에 임하여 승리하게 되었고. 밀라노에 돌아와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믿는 신은 태양신인 솔 인빅투스(Sol Invictus:무적의 태양)였다. 전승과는 달리기독교로 개종을 하지 않았고, 337년 자신이 죽기 전까지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개종을 했다는 이야기는 로마의 주교였던 실베스터 1세에 의한다. 그는 임종을 앞둔 콘스탄틴의 침소 앞을 하루종일 서성이다가, 죽기 조금 전 간신히 황제를 만났다고 한다. 그는 침소를 벗어나며 드디어 황제께서 신을 받아들였다고 침전의 앞에 있던 시종과 가족들에게 말했고, 그 시각에 황제 콘스탄틴은 죽었다.

당시 로마의 군부는 페르시아의 고대 종교인 미트라교를 신봉하고 있었고, 태양신에 대한 숭배는 이미 오래 전부터 황제가 제사장으로 활동해 오고 있었다.

이 솔 인빅투스의 제의는 시리아에서 기원하고 있으며, 바알과 아스다롯 숭배를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태양 숭배를 하는 미트라교를 포섭할 수 있는 통일적 요소가 있어 정치, 종교, 영토의 통합적인 상징의 의미가 있다. 그는 제국 내 모든 종교를 인정하며 통괄하고자 했다. 그리고 기독교가 그 위치를 확고히 한 것은 솔 인빅투스의 제의식을 흡수하면서이다.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 정통주의는 솔 인빅투스와 많은 공통점을 지니며, 기독교는 유대적 전통에서 벗어나 로마적 전통 속으로 함몰되어 갔다.

321년 선포된 칙령에 의하여 태양의 날인 ‘신성한 일요일’에는 쉬도록 함에 따라 기독교는 유대적 안식일(토요일)을 떠나 ‘일요일’을 주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가 예수를 ‘솔 인빅투스’의 지상적 현현으로 이해했다면, 예수의 출생일을 1월 6일이라고 믿어왔던 기독교인들은 태양의 탄생을 기념하는 나탈리스 인빅투스(태양의 탄생) 축일인 12월 25일(율리우스력으로 동지)을 성탄절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또한 예수의 부활절을 이스터(Easter)데이로 삼은 바, 초기 기독교에서는 유월절에 맞추어 유대 태음력 니산월(3~4월) 14일 혹은 그 다음 일요일로 삼았다.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에서 춘분 후 만월 다음의 일요일로 정했다. 이는 미트라의 부활과 명백히 일치하고 있으며, 춘분은 초목이 다시 태어나는 봄의 시작이며, 만월은 부활, 일요일은 성스러운 태양의 날이라는 태양력에 기초한 농경적 신화와 일치하고 있다.  

기독교는 솔 인빅투스와 미트라교 등이 교리와 전승 속에 교차하면서 유대적 전통을 탈피하고 모든 종교를 정치적인 수단으로 생각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하여 변용되어 갔던 것이다.

※ 미트라교(Mithraism)

미트라는 자신과 동일자인 최고신에 의해서 창조된 것으로 인식된다. 미트라교도는 삼위일체를 믿고 있었으며, 일요일을 예배의 날로, 가장 중요한 축제일은 우리가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이라 부르는 제일(祭日)이었다.

예수가 세상에 오기 오래 전, 이미 미트라는 동지날(크리스마스), 어느 동굴에서 동정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고 한다. 십자표시로 새로운 신도들의 앞 이마에 세례를 주었고, 그는 예수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구원자요, 그를 믿는 자에게 천국에서의 영생을 부여했다고 한다. 또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었고 부활했다고 한다.

이러한 제례를 보면, 기독교와 절묘하게 일치하며, 예수의 머리 뒤의 후광(nimbus)은 미트라가 쓴 모자가 태양으로 빛을 발했기 때문이며, 종교적 리더를 Papa(Pope)라고 불렀고, 일요일에는 빵과 포도주(수소의 피)로 Myazda(Mass)라는 성찬식을 지냈다고 한다.

이런 점을 보면, 무엇이 기독교이고 무엇인 미트라교인지 분간을 할 수 없다.

BC70년 경 로마에 도입된 미트라교는 기원은 고대 인도 이란의 민족시대에 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미트라 숭배는 BC3세기 경 페르시아에서 성행했다. 그러나 로마의 미트라교는 이미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의 토착종교와 혼성되어 그 내용이 고대의 미트라교와 상당히 다르다. 이 미트라교는 폼페이우스 황제(BC106~BC48)의 동방원정 이후 로마제국의 수호신으로 격상되어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에 까지 이르고 기독교 공인 이후 소멸된다.

신자의 제례는 종종 맑은 샘물이 솟아나오는 바위굴 안에서 행해졌는데, 그 깊숙한 곳 암벽에는 ‘수소를 도살하는 신’의 부조를 볼 수 있다. 미트라 신전에 건조되었던 우상은 그리스도교도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당시의 건조물을 포함한 종교적 유적은 현재 유럽에 많이 남아 있다.

※ 초기 기독교에 대한 박해

초기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거의 없었다. 당시에 로마는 국교가 없었다. 세계 제국답게 다양한 이민족의 종교를 포용하였다. 또 로마의 만민법에 의하여 다스려지고 있어서 인간의 본성 상 평등한 권리를 존중하였고, 종교적 신념을 중시했다. 특히 ‘쿼바디스’의 네로의 경우도 로마 화재의 원인을 기독교인에게 덮어 씌우긴 했지만, 당시 기독교인의 교세는 미약했던 만큼 유태인에 대한 것이었을 공산이 크다.

박해는 기독교인 보다 유태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들은 늘 로마제국에 대항하며, 끊임없는 독립투쟁을 해왔고 제국 로마는 이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

기독교 공인 이전, 기독교가 박해를 받은 기간은 기록을 보면, 5년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 중 가장 가혹한 경우에도 기독교인이 순교를 한 것은 17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당시, 로마 전체의 인구 중 5%가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밀라노 칙령(AD313)으로 부터 불과 12년이 지난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에 물경 318명의 주교가 1,500여명의 장로와 수행자를 대동하고 나타난 것은, 분명 기독교가 박해 속에서 은인자중하며 교세를 키워나가는 수준은 아니라는 반증이다. 이미 로마제국 전역에 무수한 교회가 산재했고, 수많은 신도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사두정치를 그가 청산했지만, 일인 황제의 독재에 대하여 로마 시민들의 확고한 지지를 얻지 못했고 원로원을 장악해야만 했다. 사두정치의 청산과정이 몹시 가혹했고, 희생자들은 처남, 매제, 그리고 자신의 아내와 아들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강력한 지지세력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였던 것이다. 기독교는 1인 황제에 걸맞는 유일신 신앙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그 교회들은 단일한 메시지 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탄탄한 조직을 구축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가 1, 2차 공의회를 적극 지원하고, 기독교로 개종을 독려했다는 것만 보아도 자신이 절대권력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뒷배를 보아주는 세력으로 기독교인들을 적극 활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인들의 광적인 순교에 대한 열망을 보며, 현제(賢帝)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들이 불나비처럼 죽으려고 하는 것에 대하여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육신으로 부터 당장이라도 풀려나 소멸될 수 있는 해탈의 각오가 되어 있는 영혼은 얼마나 칭송할 만한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각오는 반드시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순간의 결단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어야지, 그리스도교처럼 법관의 명령도 무시하는 완강한 고집에서 나오는 것이면 안된다. 심사숙고해야 하며, 품위가 있어야 하며, 타인에게 신념을 전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교들처럼 영웅적, 극적 제스처를 써서는 아니된다.

(명상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