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암동, 물빛 그리움

BuAmDong/picture

포스트 모던과 구상

벌거숭이 임금님이 있었다. 그는 멋진 옷을 사랑했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옷을 선사하겠다는 꾀임에 넘어간 임금님은 결국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고 믿고 벌거숭이인 채, 자신의 옷을 자랑하기 위하여 저자거리로 나선다.

이 포스트 모던시대에 美란 벌거숭이 임금님의 이야기와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아름다움이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화되고 관념화되는 이 시대임에도, 예술이란 이성에 대하여 혁명한다고 한다. 그것이 이 시대에 있어서의 문예에 부과된 과제이며, 이성의 오염으로부터 해방한다는 복음이라고 한다.

이러한 복음이 오히려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를 더욱 어렵게 함은 틀림없다. 이러한 사조는 보다 자유로운 작업의 공간을 마련해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소음을 배출하기도 한다. 그 소음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 아름답지도 못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감수해야하는 것, 이성에서 벗어났다고 하면서도 더욱 관념화되어 어느 전시회의 카탈로그의 서문이나 설명을 보면, 이해를 돕기는 커녕 이성이 만든 관념과 개념들이 난무하여 의미도 없는 헛 것이 얼마나 아름답게 명멸하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이렇게 아름다움이 모호해지는 시기에 이르면, 작품보다 해설이 더욱 가치를 지니며, 그 해설 또한 탈구축(De-construction)화되어, 작가의 작업정신과 의도와는 아무런 연관관계도 없이 해설자의 내적 체험 만 올올히 남게 되어, 작가와 작품은 서로 소외된다. 이러한 탈구축은 아름다움에 대한 객관성도 보편성을 깨부신다. 아름다움은 관객의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그 무엇이 되며, 모든 텍스트에 있어서 작가의 의도와 작품에 대한 권위는 마땅히 해체되어야 하고 독자 스스로 작품을 창조해내가는 독법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구체의 풍경을 놓고, 보는 사람들의 눈을 이끄는 구상은 이미 철 지난 유행처럼 치부되기 마련이고, 구상작품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천만의 일이다.

하지만, 비구상이라고 하는 것, 이른바 추상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인식 상 불가피한 요소이다. 모든 구상작품 또한 일정 수준의 미시적인 단계에 이르면 추상으로 마무리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세계의 빛을 모조리 세세히 남김없이 표현할 수 없기에 천차만별 약동하는 세계를 선과 면, 색으로 얼버무릴 수 밖에 없다.

이런 구상과 추상의 경계면에서 이발소 그림과 만화와 작품의 차이가 존재하게 되며, 작가의 시선에 대한 차이를 바라볼 수 있는데, 그 차이로 부터 독특한 미적 체험이 쏟아져 나오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부터 김태균씨의 <부암동, 물빛 그리움>이라는 연작들은 시작된다.

김태균씨에 대한 나의 정보는 딱 카탈로그에 나온 약력에 불과하다. 그보다 조금 더 안다면, 네이버에서 블로그를 하면서 알았던 이웃의 남편이라는 정도일 것이다. 부암동이라는 장소 또한 어렸을 적 통의동에 살았으면서도, 창의문 너머 잠박(창의문의 별칭인 ‘자하문 밖’을 잠박이라고 줄여부름)의 어느 곳에 있는 서울에서 가장 자연이 풍성하고 물과 공기가 깨끗한 동네라는 정도 밖에 모른다.

토요일 오후, 회사에서 잔무를 대충 끝내고 인사동에 들어섰을때 문화축제인가 뭔가로 소란스러웠다. 지도를 잘못봐서 다른 골목으로 들어섰다가 갤러리 갈라를 찾으면서 약간의 두려움이 생겨났다.

그림을 본 적이 너무 오래되었다는 것, 그래서 미적 감흥에 매우 둔감해져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갤러리 갈라에 당도했을 때, 거기에는 가을 날의 물빛이 있었다.

물빛, 그 아름다움

물빛은 아름답다. 물은 세계를 들여마셨다가 다시 빛으로 토해내는데, 그것이 물빛이다. 바다에서는 물빛이 명멸하고, 강에서는 흐르며, 부암동의 웅덩이에선 비추인다. 한 여름동안 숲을 채웠던 매미소리처럼 소란했던 빛은, 가을이 끼치면 돌연 잔잔해져 수줍은 듯 하다.

부암동으로 간 작가는 낙옆 진 풍경을 헤치고 기어이 웅덩이를 찾아낸 후 물빛을 퍼올려 혹여 물에 파문이라도 일지 않을까? 바람에 흔들리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캔버스 앞에 앉아 얇게 얇게 색을 더해 나간다.

조금 떨어져 보면 수채화같고, 가까이 가서 보면 색들의 밑으로 캔버스의 올들이 치밀기도 한다. 물감이 나이프로 이개져 엉켜있거나 붓의 터치가 드러나 거칠지 않다. 차라리 실의 올들에 스며있던 색이 바깥으로 우러난다는 느낌마저 준다. 그래서 유화처럼 텁텁하지 않고 오히려 맑다.

그림을 보면서 가을빛에 대하여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을 얻은 셈이다. 가을이 맑은 것이 하늘이 높고 짙푸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빛이 여름처럼 발광하여 사물의 각이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그윽해져 가는 빛과 친교를 맺고 마침내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다는 데 있다. 그래서 뚜렷하고 맑다. 또 드러냄의 형식은 차라리 정적이다. 부암동에서 느낄 수 있는 소리는 고요이며, 들을 수 있다면, 낙옆이 바싹거리거나 가을빛이 바위에 와서 부딪는 낯빛의 소리다.

부암동, 물빛 그리움의 연작 시리즈의 시선은 낮고 오목하며 드높다. 물빛에 어린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기에 낮을 수 밖에 없는 시선은 대지에 온갖 가라앉은 것들을 본다. 그래서 드높아야 할 가을의 모습은 아래로 떨어진 것들을 통하여 바라보아진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하늘은 때로는 순일하여 파랗다. 하지만 물빛이 삼키고 토해내는 하늘은 단일하게 파란 하늘과는 사뭇 다르다. 작가는 물이 삼키고 토해내는 세계와 하늘을 연작을 통하여 다채롭게 보여준다. 그것들은 대체로 얕아서 하늘과 바닥이 엉켜 그 색조는 누렇고 하얗게 하늘을 조탁해내지만, 때론 깊어서 남색으로 감기기도 한다. 낙옆들은 젖어있거나 마른 대기로 인하여 바싹 말라있기도 하다.

그래서 가을이면 평야와 산맥으로 펼쳐져 갈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시선을 작가는 잡아들여, 가을의 내밀한 오의로 이끌고 침묵과 고요 속에 머물게 한다.

이렇게 짧은 부암동으로의 산책은 끝났다.

그리움이라는 것은

신영복 선생은 그림은 그리움이라고 한다. 이 말씀이 맞다면, 그리움은 막연한 추상이 아니라 뚜렷한 구상으로 자리매김해야 하는 지도 모른다. 추상처럼 대상없는 아름다움도 추구할 대상이기는 하다. 나는 받아든 화보집을 몇번이고 들여다 보았다. 인사동을 벗어나 안국동 로타리에 섰을 때, 오후의 빛을 등에 진 인왕산이 눈 앞에 달려왔다. 가을이다. 우리는 눈을 뜨고 조락해가는 풍경의 향연을 바라보아야 할 때다. 바라보면서도 가을은 그립다.

또 다시 부암동, 물빛 그리움이 그립다.

2009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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