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어제는 지나갔다.

아침에…

년차로 쉰다는 것은 아내와 식구들의 적이 되는 일이다. 낮동안 누려야 할 자유를 놓고 늦잠을 자는 아내의 침대머리에 앉아, 꼭두새벽부터 밥 줘!라는 아내가 가장 혐오하는 이야기를 속삭여대는 일로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나도 안다 알아, 밥 줘라는 이야기를 당신이 얼마나 싫어하는지. 하지만 배가 고픈 것을 어떡하란 말인가?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라면을 찾았지만, 어제 아들놈이 홀랑 먹어치운 모양이다.

아내는 아침을 하면서부터 점심을 해줄 것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우리 11시쯤 자전거 타러 갔다가 냉면 사먹고 들어오면 어떨까? 저 하늘 좀 봐라! 낮에 볕이 얼마나 뜨겁겠냐? 난 해질 무렵에 자전거타러 갈꺼다. 으이구 세끼 진지를 다 받아드시겠다는 삼식(三食)이 저 웬수!

쉬는 날이면 아침에 일어나 남종으로 가서 안개 낀 팔당호를 볼 까 하지만, 늘 안되는 일이고, 멀건히 TV를 보다가 아빠 오늘 회사 안가? 응! 그럼 나 학교까지 데려다 주면 안돼? 언제부터 알콩달콩 친했다고 딸내미가 넌즈시 묻는다. 아들 놈은 아직 자신이 방구들인 줄 안다. 넌 오줌도 마렵지 않냐? 놈이 방구들에서 사람이 되는데까지는 한 삼십분 정도 걸린다. 됐다 됐어 더 자!

딸내미가 자신이 세워달라는 곳에서 한 오미터 쯤 더 가서 차를 세웠다고 여기다 세우면 어떡해!라고 소리친다. 섭한 마음에 집에 돌아와 딸내미의 방을 열어보니 늘 그렇듯 박격포탄이 라도 터진 모습. 한 삼일동안 벗어놓은 허물들이 이곳저곳 널려있고, 옷장의 서랍들이 아가리를 턱 벌리고 그 위로 옷들이 혀를 빼물고 있다. 흐이구! 저걸 누가 데려갈까? 여보! 이 방 치우지 말아. 딸내미 오거든 현장검증하는거야. 야! 넌 아직도 자냐? 여보 쟤 수업이 한시에 있데.

이러니 누가 아빠가 집에서 하루를 쉬는 것을 좋아하랴? 그리고 누가 이 놈의 집 구석을 홈 스위트 홈이라고 감히 일러 말하랴?

그리고 낮에…

맥에 다시 VM ware를 깔고 Xp를 설치한 것을 점검키 위하여 몇가지 테스트. 은행 싸이트는 Key가 충돌하여 역시 다운. Jounler를 써 본지 오래되어 다시 써 보고 스프링노트에 있는 자료들을 Jounler로 끌고 올 것인지에 대하여 고민. 거실에 있는 PC와 접속을 시도하니 접속이 안된다. 네트워크를 재설정해야 하는데, 기억이 가물거린다. 또 텅빈 호스트와 도메인은 뭐로 채워야 하지?

책을 읽어볼 생각을 하면 답답하다. 다시 상무인서국의 주역을 손대야 할지, 천개의 고원을 읽어야 할 지, 나쓰메 소세키의 몽십야는 어느 서점에서 본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제는 퇴근시간에 다행히 을유문고판 기탄잘리는 구할 수 있었지만(싸다 3000원), 그 놈의 몽십야는 찾을 수가 없었다. 논어를 완성하기 위하여 사놓은 책들은 다 어떡하지?

또 소설을 하나 쓰고 싶었다. 짧은 것으로…

켜 논 TV에서는 계속 본 영화를 하고 또 하고 있다.

찌이익~

회사 전환가 했더니, 문자다.

토요일 7시에 시간 비워놔라. 장소는 미정.

아쭈구리! 금요일에 미국에서 온 예전 직원과 술자리인데… 토요일날 니들이랑 또 술? 그럼 언제 <부암동, 물빛 그리움>이라는 전시회는 가지? 내일 아님 모레?

아내가 나간다.

어디가?

내가 가는 곳을 알려고 하지마! 다쳐!

그리고 오후 다섯시

아내는 이웃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러 간 모양이다. 집으로 돌아온다는 전갈.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와 뒹구는 나를 보고 그 배를 어떻게 할래? 라고 힐난을 퍼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전거를 타고 올림픽 공원으로 간다.

예전에는 한번도 생각 못했는데, 서울의 공원이나 고수부지와 같은 곳이 잘 꾸며져 있어 이런 가을날에는 집에서 하루를 보내기 보다, 돗자리 하나, 김밥 몇줄, 책 한권을 들쳐엎고 나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아내와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평일이라 그런지 오후의 공원에는 나이든 사람들이 천천히 산보를 하거나 연인들이 다정한 모습으로 거닐고 있다. 해가 지는 호수에 불현듯 분수가 쏫았고, 풍납토성 위의 나무 그림자가 길게 늘어선 모습을 보자, 오늘 하루가 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밤

선덕여왕을 봄. 고현정의 연기가 압권이다. 무표정 속에 감정을 퍼올리는 연기, 고현정의 눈동자에 미혹되다 불현듯 매혹되어 정신을 차리면 고현정이 고혹적일 만큼 미인이 아니라는 것. 가슴 설레기야 효원이 아줌마지!

This Post Has 10 Comments

  1. 서정적자아

    효원이가 아니라 요원이 아줌마입니다. 하하하.
    그래도 나는 고현정이 더 좋던데.
    이요원은 왜인지 나무막대기 같은 느낌, 색이 없는 그런 느낌이라서요.

    재밌네요.하루가…
    다정합니다. 가족이..

    1. 여인

      제가 여자이름 외우는데 잼병이라… 연정인가 현정인가 아리송하여 인너넷으로 검색하고 쓴 것인데, 이효원은 딱 맞는 줄 알았는데 그만 틀려버렸네요. 에휴! 그런데 왜 서정적…님의 복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까 몰라?

      우리 집 식구들이요? 별로 사이 좋지 않습니다. 서로 조금씩 미워합니다. 이제는 딸내미 안아줄 수도 없습니다. 아들놈 너 어디가니? 저기요! (내가 저기가 어딘줄 안다고?) 이런 식입니다.

    2. 서정적자아

      그 아들 참 마음에 듭니다.
      가출하면 우리집으로 가라고 하세요. ㅋㅋ

    3. 여인

      가출한다면 한 김에 멀리 가야지 서울에 머문다면 손해 아닙니까? 목포도 가고 부산도 가고…

    1. 여인

      아무래도 간디기념관 때문에…

  2. 위소보루

    아들이 그런 거 같습니다. 저도 매번 후회하면서 그다지 집에서 다정하게 대하지 못하거든요 ^^; 아버지랑은 하루에 몇마디 안하는데 그나마 같이 대작을 한 날이면 술김이랄까 스스로의 벽이 무너진달까 얘기가 주르륵 흘러나오곤 합니다 ^^;; 그래서 은근히 아버지가 저랑 술을 마시고 싶어하시는 듯 합니다. ㅋ 여인님께서도 그런 방법을 쓰신다면 적어도 저기요 라는 말은 안 들으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여인님의 하루가 무척이나 행복해보입니다. 그냥 평범하게 행복한 하루를 보내신 것 같아서 읽는 내내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ㅎ 이런 일상적인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여인님께 들으면 왠지 아버지의 속마음을 읽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왠지 좋습니다 ^^;

    1. 여인

      아마 아들놈이 조금 더 크면 술을 하고 싶을 때가 올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워낙 집에선 술을 하지 않다보니…

      저는 아버지한테 그냥 요로 때웠으니 자식놈한테 뭐라할 것도 없습니다.

  3. luna

    딸내미를 안아줄 수 없는 그런 날이 제게도 오겠죠? 급우울..

    그나저나 요원 아지매는 미실 연기 쫓아가려면 아직 멀었지만,
    둘 다 기품이 넘치는 얼굴인 것 같아요.

    1. 여인

      딸내미가 중학교 들어가고 나서는 안아주는 것을 싫어하기 시작하더니 올 6월 미국에서 귀국하더니 저와 오랫만에 포옹 하넌 해 주더니 그것으로 끝. 섭하네요.

      고현정은 처음 데뷰했을 때 그렇게 연기를 못하더니, 모래시계를 거쳐 선덕여왕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눈 속에 모든 것을 담아넣을 줄 아는 연기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요원씨는 총기가 어려보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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