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허에서 꾼 꿈

안개와 같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때론 순간이었고, 천년이기도 하다. 지나온 풍경 속에 은밀하게 빛나면서도, 의미를 가늠할 수 없이 가슴 속에 차오르고 나를 정점으로 끌어올리기도 했다.

갖은 의미로 아로새겨진 그것을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대륙에서 가장 더럽고 추한 자이며, 졸렬하기가 그지 없어 떠도는 마음으로 떠도는 언어로 그 의미를 밝혀낼 수가 없었다. 의미라기보다 차라리 춤을 추어야 하는 음률인지도 모른다.

의미를 찾기보다 이름 만이라도 알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갖은 언어로 그것의 이름을 불렀다. 그 이름들은 그것을 포괄하지 못했다.

夢…

그녀는 늦은 여름, 흐르는 개울의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바람에 자작나무며, 사시나무 잎들이 소스라치는 소리를 들으며, 매미소리가 그칠 무렵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치마자락이 개울에 드리운 것조차 잊은 채 눈을 감고 얼굴을 여름 하오의 태양에 향하고 있었다. 치마자락은 이미 허벅지까지 젖었다. 나는 젖은 치마자락의 끝을 들어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렸다. 치마 밑의 하얀 다리가 흐르는 물 속에서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녀가 입술 사이로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저를 사랑하나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오로지 그 순결한 의미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지 모른다.

다시 그녀가 눈을 감았다. 나도 눈을 감고 내 거친 입을 그녀의 입술 위에 올려놓았다. 광활한 어둠 속에서 무수한 불꽃들이 호흡을 멈추고 강렬한 속도로 가슴에 쏟아져 내렸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수백개의 태양이 멈춘 가슴 속에 떠올랐다가 졌다고 말했다.

이것이 영원일까요?
순간. 영원으로 넘어가는 문이랍니다.

머리를 어깨에 기대며 그녀가 나의 가슴으로 들어왔다. 그때 개울물 위로 낙엽이 떨어졌고 그림자가 들 저편에서 달려오기 시작했다.

事如春風 了無痕

그냥 태허(太虛)에서 태을(太乙)로 있다가 문득 공공(空空) 가에 노닐다, 그만 육합(六合)을 만나 천년을 살아볼까 부생(浮生)을 타고 나왔지. 그러니까 자미(紫微)로 돌아가면 아예 사라짐조차 없는 것(不滅)이 이 삶이야.

댓잎의 초록 그림자를 헤치고 그 곳에 들어섰을 때, 자리의 맞은 편에 편액이 걸려 있었다.

저 글이 무슨 뜻인지 아나요?
아아, 모든 일이 봄날의 바람과 같아 흔적조차 없구나.

그럼 우리는 꿈일까요?
그럴지도… 하지만 당신이 꿈이라면 저도 꿈이기에… 서글프지 않아요.

꿈이라도 좋아요. 뚜렷한 현실인데… 당신이 없다면 현실이란 것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나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자 느껴봐요! 제 가슴이 뛰는 것을…

그녀의 가슴에서 차르르 차르르 댓가지와 잎새들이 바람에 서로 사무치는 소리가 들렸다.

आकाश

편지를 썼다. 그러나 부치고 나니, 무엇을 썼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너무도 몽롱하여 낮잠을 자며 편지를 썼던 것인지도 모른다.

비가 내렸고, 빗소리를 들으며 잠에 들었다.

이미 천년이 지났지요. 이제 태허로 돌아갈 때예요. 아니 본래 저나 이 세계 그리고 당신은 태허의 꿈이었는지도 몰라요. 꿈에서 깨어나 보니 아뭇 것도 없고, 깨어난 저 자신마저 없다는 것은 너무 허망해요. 그 허무함마저 태허에는 없겠죠. 당신의 따스했던 가슴과 입맞춤 그리고 당신의 떨리던 그 목소리가 산산히 흐트러지고 오로지 시간도 공간도 없는 텅빔만 남는다는 것을 슬퍼해야 할까요? 그런데 슬픔도 사랑과 함께 사라져버린다는 것이 더 슬퍼요. 아아, 사랑하는 저의 님이여! 언제까지나 당신을 쳐다보며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요.

그녀의 눈물이 쾅하고 소리내며 내 가슴에 떨어졌다. 소스라쳐 깨어났을 때, 그녀는 창 가에 앉아 편지를 읽고 있었다.

마침내 영원을 알 것 같아요. 모든 것은 사라져버리지요. 그래서 아무 것도 잡을 수 없어요. 순간에 깃들 수 만 있다면 영원에 가 닿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당신의 그 눈물은…?

무서웠어요. 당신이 떠난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녀의 모든 체온과 향기 그리고 영혼의 마지막 한가닥마저 가슴에 채우기 위하여,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때 아카샤가 조용히 흔들렸다.

千年 그리고

천년의 세월은 잠시 죽음이 눈을 떴다 감았을 때 스쳐지났습니다. 천년보다 더 긴 시간이었을지도 몰라요. 제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지만, 제가 서 있는 이 행성은 아주 다른 우주의 한모퉁이인지도 몰라요. 하나의 태양과 하나의 달을 가지고 있으며, 노을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어 노래를 부르며 미리내를 따라 춤추기도 하지요. 그리고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며,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대지를 다른 색으로 채색하곤 합니다.

당신이 보고 싶어요.

제 가슴의 이 사랑은 어디에서 오시는지 차마 알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이 오는 곳을 찾아 떠나려 합니다.

일곱개의 바다를 건너서 사막과 거친 고원을 지나 하늘이 시작하거나 대지의 중심에서 당신을 찾으려 합니다.

삼십육만오천개의 태양이 지나간 길을 따라 가야하는 지 모릅니다. 삼백육십오만개의 태양이 필요하다고 해도 저는 그러할 거예요.

저는 우주보다 더 긴 시간동안 당신을 사랑해왔으니까요.

20071207

This Post Has 4 Comments

  1. 세상사를 경험하는 사람은 바로 또 다른 보르헤스이다. 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를 겉다가 발길을 멈추고 기계적으로 현관 아치와 유리문을 바라본다. 나는 우편물을 통해 보르헤스의 소식을 듣고, 교수명단이나 인명사전에서 그의 이름을 본다. 또한 모래시계, 지도, 18세기의 활판 인쇄, 어원학, 커피 맛, 그리고 스티븐슨의 산문을 좋아한다. 다른 보르헤스도 역시 이런 것을 좋아하지만, 허풍을 떨면서 이런 것들을 배우의 특성으로 만들어버린다. 우리들의 관계가 적대적이라고 한다면 과장일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그냥 이렇게 살아가야 보르헤스가 문학을 만들 수 있고, 그 문학이 나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나는 보르헤스가 훌륭한 글을 몇 편 썼다는 사실은 별 어려움 없이 인정할 수 있지만, 그 글이 나를 구원할 수는 없다. 좋은 글은 다른 보르헤스의 것도 아니며, 어느 누구의 것이 아니고, 언어나 전통에 속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자신은 틀림없이 소멸될 운명이며, 단지 내 삶의 어떤 특정한 순간만이 다른 보르헤스에게서 살아남을 것이다. 나는 과장하고 거짓을 꾸미는 보르헤스의 못된 습관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게 조금씩 모든 것을 양보하고 있다. 만물은 제 모습으로 존속하기를 바란다고 스피노자는 말했다. 돌은 영원히 돌이고자 하며, 호랑이는 영원히 호랑이이고자 한다. 나는 내가 아니라(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면) 보르헤스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보르헤스의 책에서보다는 다른 일에서, 예컨대 힘들게 연주하는 기타소리에서 내 자신을 더 잘 알아본다. 몇 년 전,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래서 도시 변두리에서 떠도는 전설적인 얘기에서 시간과 무한의 놀이로 나아갔지만, 이제 그러한 놀이는 보르헤스의 것이 되어버려 나는 다른 것을 만들어야만 한다. 이처럼 나의 인생은 덧없고, 나는 모든 것을 잃고 있다. 그 모든 것은 망각의 것이거나 혹은 다른 나의 것이다. 나는 둘 중 누가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보르헤스와 나, 보르헤스

    1. 여인

      이 글은 어디선가 본 것으로 기억납니다. 자신의 작품을 쓴 과거이자 미래의 보르헤스를 타자화하고, 생활인이자 지금의 보르헤스가 바라보는 모습은 어떤 면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방식이기도 하기 때문에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2. 여인님의 ‘이 여자가..’을 읽으면서 보르헤스의 이 글이 떠올랐어요.

    저는 보르헤스의 저 글이
    나이기도 하고 내가 아니기도 한, 내가 녹아있으면서도
    또 그렇지 않은.. 실재와 허구가 뒤섞여 무엇이 허구이고
    무엇이 실재인지 변별해내지 못하는 것들의 범람속의
    자신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여인님의 주석으로 명쾌해졌어요~^^

  3. 旅인

    旅인 08.11.06. 16:52
    죄송합니다. 개명을 했습니다. 본래 쓰던 닉이 旅인이다 보니 이류라는 닉이 생경스러워서…
    ┗ 다리우스 08.11.06. 22:25
    네 잘 하셨습니다, 여인님, 헉 상형적인 글 고고학적으로 잘 읽겠습니다.^^,
    ┗ 旅인 08.11.06. 22:22
    맞습니다. 고고학적이죠. 아카샤라는 것이 고고학적이기 때문에…

    러시아황녀 08.11.06. 18:44
    말로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 旅인 08.11.06. 22:23
    고맙습니다.

    지건 08.11.06. 19:26
    티벳의 마법의 서를 읽는다면….이런 기분이 들까요…이류 님 글 대할 때마다…간혹…신비의 무엇을 추구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신비인지 진리인지 전 잘 모르지만…^^
    ┗ 旅인 08.11.06. 22:24
    이 글은 도가적인 느낌으로 썼습니다. 호접몽이지요.

    유리알 유희 08.11.07. 00:00
    도가적이든, 고고학적이든 유희 눈에는 사랑, 사랑, 사랑만 눈에 들어옵니다. 후후
    ┗ 旅인 08.11.07. 06:28
    ^^ 아무렴요.

    무인선 08.11.07. 14:20
    아주 달마(dharma)적입니다. ^^
    ┗ 旅인 08.11.07. 16:22
    여동빈적이지요.

    아이스크림 08.11.07. 17:47
    당신이 보고 싶어요……………………………. 저는 우주보다 더 긴 시간동안 당신을 사랑해왔으니까요. 마지막 문장에 모든게 다 들어있네요 필사를 하면 더 좋아질려나….^^;; 문득 님의 글을…………..ㅡ_ㅡ;;
    ┗ 旅인 08.11.07. 23:41
    에구구 무신 말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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