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에도 머물지 않고…

요즘 블로그를 방문하다보면, 부럽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어머니께서는 성경책을 너무 읽다보니 내가 믿음을 잃었다고 한다. 믿음은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라며 안타까워 하신다. 내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늘 그렇다.

도올은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의 서문에서 성불(成佛)은 철저히 개인적이고 초윤리적인 반면, 위성(爲聖)은 철저히 사회적이고 윤리적이라고 한다.

지식을 대별한다면, 이론지와 실천지와 경험지가 있다.

도올의 말에 입각한다면, 사회와 교호하는 가운데 이타적이고 윤리적인 실천을 통해 성인이 되어가는 Process(점수)적인 방식이 위성이다. 성불은 철저하게 이기적이며, 확철대오하는 경험(돈오)에 바탕을 둔다. 위성은 잘나가다 그릇된 행동을 하면 나쁜 놈이 될 수 있고 다시 발심하여 다시 위성의 길을 갈 수 있지만, 성불의 경우는 한번 건넌 강을 다시 되돌아 올 수 없다. 아뇩다라샴먁샴보리(무상정편지)를 증득(체험)한 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에 다다르기 위한 수행의 과정은 이기적이며 자신 만의 길을 가야하는 것으로, 수행 중에 조사가 보이면 조사를 때려죽이고, 부처가 보이면 부처 또한 작신나게 쳐부시며 무소의 뿔처럼 고독하게 가야 하는 길이다. 그래서 그 길에는 아무런 방향이 없어 크게 열려있다(대도무문).

하지만 나는?

위성도 아니고 성불도 아닌 이론지에 나는 머물고 있다.

팔만대장경을 다 읽었다고 할 수 있는 구라마즙이나 당 현장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소식을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반면 육조인 혜능은 글 한자 읽지 못하는 쌩짜 무식이었지만, 자신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법문의 누가 읽어주기만 하면, 그 뜻을 제자와 대중들에게 풀어줄 수 있었다.

어느 무식한 짚신장사가 불현듯 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어느 도인에게 도를 물었더니 즉심시불(卽心是佛 : 바로 마음이 부처니라)이라고 하여, 멋대로 잘못듣고 여러 해동안 “짚신 세 벌”을 외운 끝에, 자신이 곧 부처임을 깨달았다고 하는 우화가 있다.(원불교 대종경 중)

경험지의 세계는 이론지나 실천지로 다가갈 수 없는 거대한 단층이 있다. 소금이 NaCl인데, 이 분자가 혀의 미뢰를 자극하여 짠 맛을 낸다고 하는 것으로는 짠 맛을 느낄 수 없다. 결국은 소금을 입 안에 한움큼 퍼 부어야(수행실천) 마침내 그 짠 맛을 느낄 수(경험) 있다.

결국 소금의 짠 맛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 짠맛을 느낄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부러움과 기대를 가지고 이웃 블로그를 바라본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나도 산사로 들어가 입을 꽉 다물고 그들처럼 자신의 길을 무소의 뿔처럼 가고 싶다.

그들의 정진에 하나님과 부처님의 가피가 있기를…

합장

이 글에 금강경 사구게의 광역을 부친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있지도 않은 망상에 불과하다. 모든 존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네가 알게 되면, (마음 속의) 여래가 드러나게 된다. 1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형태에 머물거나, 소리 그리고 향기와 같은 것 그리고 천차만별 삼라만상을 있게 하는 것에 집착하여 마음을 내지 않고, 아무 것에도 머물지 않고, 그 마음을 내는 것이 마땅하다. 2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형상을 통해서 자신을 바라보거나 소리와 향기로 자신을 구한다는 것은 그릇된 길로 접어드는 것이니, (네 마음 속의) 여래를 드러나게 할 수 없다. 3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모든 삼라만상을 뒤덮는 현상계의 진리라고 하는 것이란, 꿈 속에 포말처럼 일어나는 그림자와 같고, 햇빛에 사라지는 이슬이나 순식간에 사라지는 번개와 같다는 것을, 마땅히 너는 이렇게 바라보아야 한다. 4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금강경 사구계에 대한 여인 광역>

▷ 첫 문장의 즉견여래를 나는 즉현여래로 보고 해석했다. 마음 속에 있는 여래(부처)가 드러나는 현(見)이, 여래를 본다는 견(見)보다 맞는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능견여래 또한 불능현여래로 의미를 새겼다.

▷ 금강경은 2세기경의 초기 반야부 경전으로 알려져 있고, 구체적인 수행방법에 대한 언급은 없는 경전이다. 하지만 이 사구계 부분은 엄밀하게 4세기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유식계열과 맥락을 함께 한다. 그래서 이 사구계 부분은 반야부의 후기 경전인 반야심경보다 새롭다.

This Post Has 2 Comments

  1. 서정적자아

    저는 이론지에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금강경과 싸우다가… 문득,
    성경을 대할 때.. ‘그냥 믿어라’ 하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금강경이야말로 논리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금강경은.. 그래. 그렇구나, 하고 믿는 것.
    저는 아무리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려 해도 이해가 되지 않던 것이.. “그래. 그렇구나”하고 믿는 것으로 해결보았습니다. ㅜ.ㅜ

    1. 여인

      금강경 그 난공불락을 어찌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심심함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머리를 써서 다가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또 믿을만한 것이란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단지 부처란 깨달은 자가 있고 아침에 탁발을 다녔고 돌아와 선정에 들었다가 제자들을 불러모아 설법을 했다는 사실 밖에…

      그래서 김훈은 <뼈>라는 단편에서 화자의 입을 빌어, “밥 때가 되자 밥을 먹고, 밥을 다 먹고 나서 설거지를 하고, 더러워진 발을 씻는 일은 현묘하지도 장엄하지도 않다. 그것은 일상의 반복일 뿐이다. 도올 김용옥은 <금강경강해>에서 이 대목을 해설하면서 금강경이 부처와 그 무리들의 평법하고도 일상적인 하루의 일과 속에서 말하여지고 알아들어졌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있었다. 나는 도올의 글을 읽으면서 그처럼 상례적인 일상의 구체성에 감격하는 그의 놀라운 놀라움이 놀라웠다”라고 그는 쓰고 있습니다. 저도 김훈 씨의 의견에 처절하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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