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란자나 강변의 그 밤

해 질 무렵 나이란자나에서 물을 길어올 때, 그는 나에게 왔다. 그가 왔다기 보다 내가 그에게 다가간 것인지도 모른다. 석양을 지고 오는 그의 모습은 매우 느렸고,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미망의 시간이 스쳐지나는 것 같았다. 멀리서 보아도 그는 존귀한 사람, 사문(沙門)이었다. 그가 가까이 오면 길 한켠으로 비켜나 사문이 내 곁을 지나가기를 기다리려고 했으나, 걷는 듯, 서 있는 듯 그의 걸음이 느려서 더 이상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 없었다.

그에게 다가갔을 때, 놀라서 자빠질 뻔 하였다. 그의 모습은 메마른 여름의 열기에 지쳐 죽은 시체와 같았다. 머리카락은 오래된 벵갈용수의 축처진 가지에 뱀이 또아리를 튼 것 같았고, 머리카락 사이로는 해골과 같은 얼굴이 보였다. 그의 눈은 커다란 눈구멍 저 깊은 속에 가라앉아 있었고 피부 위로는 핏줄과 뼈들이 나무뿌리처럼 돋아 있었다.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의 발이 땅을 밟을 때, 죽음이 먼지처럼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발과 다리에는 살이라고 할 것은 없었다. 관절과 뼈가 피부 밖으로 뚜렷하게 드러났다.

사문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나이를 도처히 가늠할 수 없는 그의 눈에는 꺼지지 않을 열정과 뚜렷한 의지에 가득차 있었다. 금식과 고행으로 육신은 허물어져 내리고 있음에도 사문의 입 가에는 가느다란 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사문에게 손을 모으고 인사를 한 뒤 지나치려 했다.

“여인이여!” 사문이 나를 불렀다.

사문들은 비천한 천민들과 말하지 않았다. 천민이 사는 더러운 땅 근처 조차 그들은 배회하지 않았다. 수행자들은 길에서 우리를 보면 불쾌한 표정을 떠올렸고, 때론 침을 뱉기도 했다. 우리와 같이 영혼이 없는 더러운 것들은 그들로 부터 멀리 떨어져 살아야 했다. 그러나 내가 마주 친 수행자에게선 해 맑은 영혼을 찾아볼 수 없었다. 늘 광기에 깃든 믿음과 의미없는 고행의 흔적 만을 만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문은 달랐다. 그는 미소지으며, 나를 불렀다.

내가 그를 향하여 고개을 숙이자, 그는 숨이 찬듯 간신히 말했다.

“나에게 먹을 것을 다오.”
“사문이시여, 저는 사문과 같은 분과 함께 할 수 없는 천민이옵니다. 비천한 저희 음식으로 존귀한 분께 어찌 공양할 수 있겠나이까?”
“세상의 모든 음식은 존귀한 것이니라. 여인이여, 이 고행자를 염려하지 마라.”
“그러하오면 사문이시여, 금식에 지친 사문의 육신에 저희의 거친 음식은 독과 같사오니, 존귀한 분들께 어울리지 아니하나 우유로 죽을 만들어 바치겠나이다.”
“여인이여, 그대의 말이 옳도다. 사문은 규율보다 옳음 가운데 거처하노라. 지금 힘에 겨워 그대의 집까지 가지 못하니 죽을 가져다 다오. 나이란자나 강 가에서 기다리겠노라.”

집으로 돌아와 죽을 끓여 강 가로 갔다. 강 가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한 그루의 나무처럼 미동도 없었고, 그의 주변에는 야릇한 침묵과 같은 것, 아니면 성전의 찬가 사이에 깃든 정적과 같은 것에 휩쌓여 있었다.

한낮의 열기는 점차 가라앉고 식어가는 강 냄새가 바람에 섞여 왔다. 붉던 노을 속으로 대지에 숨어있던 어둠이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여기 죽이 있나이다. 아직 따스하니 천천히 드옵소서.”
“여인이여! 이 죽은 나의 생애에 마지막 음식일지도 모른다. 내일이면 더 이상의 윤회와 번뇌는 없으리라. 이 죽을 먹고 발원하여 정각을 이루리라.”

사문의 한 옆에 서서 그가 죽을 먹는 것을 보았다. 이 세상의 온갖 우주가 들어있는 것처럼, 그릇을 고이 들고서, 은하수를 지나는 시간을 퍼 올리듯 죽을 먹었다. 천천히 천천히.

들에 어둠이 가득하자, 나이란자나의 느릿한 물소리가 나의 귓 가에서 반짝거렸다. 그리고 들 가운데 우뚝 선 보리수 위로 별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여인이여! 그대가 끓여준 죽이 참으로 맛이 있다. 몸 속에 생기가 다시 깃들기 시작했노라. 나는 그대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기나긴 고행 속에서 나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기도와 축복 뿐이다.여인이여, 그대와 가족들에게 평화를…”

사문은 미천한 나에게 합장을 한 후, 강으로 천천히 걸어내려갔다.

달빛에 반짝이며 흐르는 강물 속에 사문의 희미한 그림자와 물결이 출렁이는 것이 보였다. 사문은 한동안 강물 속에 머리를 감고 몸을 씻은 후, 강 가로 나와 달빛을 밟으며 보리수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걸음은 무소의 그것처럼 신중했고 그 뿔처럼 당당하였다.

보리수의 뿌리 사이의 오목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는 가부좌를 틀었다. 그 모습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어서 어둠 속에서 사문과 보리수를 분간할 수 없었다. 그가 정좌하자, 보리수 가지 위에 앉아 울어대던 새들도, 들에 가득하던 풀벌레들도 소리를 죽였다. 단지 보리수 위의 하늘에 가득한 별들이 더욱 또렷이 명멸하기 시작했다.

들에 찬란한 고요. 우주에 가득한 화음, 온갖 존재들이 알 수 없는 침묵과 성스러움에 머리를 숙이는 거룩한 밤을 생애 처음으로 맞이하였다. 거룩함 속에서 알 수 없는 슬픔과 희열이 밀려왔다. 나는 땅 위에 쓰러졌고, 눈물이 흘렀다.

한동안 누워있다가 다시 조용히 일어나, 그의 수행에 방해가 될까 빈 그릇을 챙겨들고 강변을 돌아 집으로 돌아왔다.

“누나, 어디갔다 오는 거야?” 동생이 그렇게 물었다.

“사문에게 공양을 올리고 왔어.”
“에이~ 거짓말! 사문이 우리와 같은 불가촉천민의 공양을 받을 리가…?”
“아니야, 그는 내가 끓여준 우유죽을 맛있게 먹었어.”
“천민이나 먹는 우유죽을…?”
“그래, 그는 여느 수행자들과 달랐어. 그는 오늘밤 죽거나, 아니면 성도를 할 것 같아. 우리 그에게 예배를 드리러 가자! 예배를 올리면 다음 생에 브라만으로 태어나지는 못해도 수드라로 태어날 지도 몰라.”
“어디에 계신 데?”
“나이란자나 강 언덕의 그 커다란 보리수 아래에 계셔.”

우리가 강으로 가는 길에 올랐을 때, 길 옆 풀섶에는 희미한 황록색의 불빛들이 떠돌고 있었다.

“누나, 반딧불이야! 어디에서 날아들 왔을까? 엄청나게 많네.”
“그러게 말이야. 12월인데도 이렇게 반딧불이가 많다니?”

보리수가 있는 곳으로 갔을 때, 들은 낮은 안개빛에 감싸여 있었다. 반딧불이였다. 반딧불이가 안개처럼 들에 고이고, 보리수를 중심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빛의 중심에 결가부좌를 틀고 있는 사문이 희미하게 보였다. 메마른 그의 얼굴이 때론 밝게 떠오르기도 했고, 어둠 속에 가라앉기도 했다.

밤은 점점 깊어갔다. 그리고 공기에는 약간의 찬 기운이 어렸다. 빛을 발하던 반딧불이는 이미 사라졌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침묵과 어둠이 온 들을 감싸안았다.

동생과 나는 정적에 압도되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단지 보리수 아래의 사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밤바람이 풀숲을 조용히 흔들 뿐, 어떤 움직임도 소리도 없이 달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별들이 수 놓인 하늘은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새벽이 오려는 지 하늘 저편에 한줄기의 미명이 스쳐 지났다. 내일 낮은 더우리라. 새벽 바람 속에 뜨거운 흙냄새가 훅 하고 끼친다.

동생은 손을 들어 동쪽을 가르켰다. 샛별이 보였다.

그때 들이 잠시 흔들렸고, 보리수 사이로 잠시 희미한 광채가 섬광처럼 번쩍했던 것 같다.

그러자 정적에 감싸여 있던 수풀 저 멀리서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가 일어났고, 코끼리가 기인 숨소리를 뿜으며 잠에서 깨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동쪽 하늘가로 붉고 노란 빛이 일어서며 하늘이 푸른 빛으로 일어서기 시작했다.

새로운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동생과 나는 하늘이 붉은 열정으로 푸른 하늘을 그려내는 아침의 풍경들을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인도양을 건너온 바람이 고원의 건조한 열풍에 휩쌓였는지 훅하고 옷깃 사이를 스며들었다.

우리가 고개를 돌려 보리수를 바라보았을 때, 사문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보리수는 어제 보았던 그 보리수 같지 않았다. 그 둥지와 가지는 더욱 오래되고 커진 것 같았으며, 잎은 더욱 싱싱하였다. 언제 날아온 지 모를 새들이 보리수의 주변을 날갯짓하며 떠돌고 있었다.

어린 동생은 들의 이쪽과 저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문은 어디로 가셨을까?”

드디어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멀리 짙은 밀림이 보였고 그 사이로 드문 드문 사원과 집들이 보였다. 그리고 나이란자나 강 가로 새들이 날아올랐다.

그러나 사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부처님은 수자타의 공양을 받으신 다음 날인, 12월 8일 샛별을 보는 순간 아뇩다라샴먁삼보리를 증득하셨다고 한다.

2006/03/20 19:17

This Post Has 4 Comments

  1. 오호. 이제서야 이런 글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1. 여인

      잘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2. 흰돌고래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런 소설, 많이 읽고싶어요!!

  3. 旅인

    유리알 유희 08.11.21. 13:54
    여인님! 일단 일착으로 예약하고 이만 가요. 휘리릭~~

    다리우스 08.11.21. 17:49
    감동이 별빛처럼 흐르는 소설 잘 읽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음,,,그쿤요~

    유리알 유희 08.11.22. 02:17
    강변의 그 밤, 드디어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는 순간을 나와 동생은 보았군요, 거창한 진리를 가장 낮은 시선으로 포착하여 그려낸 소설, 즐감합니다. 헤세의 싯달타를 읽는 시간처럼 심오하고 즐겁습니다. 여인님!

    旅인 08.11.23. 09:48
    부처께선 오래 사셨고 너무 행복했던 사람이라 성경처럼 재미가 없어서 한번 제 나름대로 글을 써보았습니다. 재미있었다니 다행입니다.

    꺽수 08.11.26. 00:07
    발상이 대단하십니다. 신비스럽고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 너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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