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의타기성;依他起性;원성실성;圓成實性


由彼彼遍計 遍計種種物 此遍計所執 自性無所有
依他起自性 分別緣所生 圓成實於彼 常遠離前性
故此與依他 非異非不異 如無常等性 非不見此彼
卽依此三性 立彼三無性 故佛密意說 一切法無性
初卽相無性 次無自然性 後由遠離前 所執我法性

唯識三十論頌 중

20頌 : 由彼彼遍計 遍計種種物 此遍計所執 自性無所有

由彼彼遍計의 彼彼의 뜻은 변계하는 마음이 매우 많아서 일체만법에 대하여 두루 계산하여 헤아린다는 것을 형용하는 말이다. 그리고 변계는 주변계탁(周遍計度)한다는 것으로 마음으로 모든 우주만물에 대하여 갖가지로 두루 계산하여 헤아린다는 뜻이다. 즉 마음의 변계소집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遍計種種物이란 일체중생들은 갖가지 사물에 대하여 항상 변계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바닷물을 잔으로 계량하면 끝내 계산할 수 없듯이 사물을 계산만으로 바로 볼 수는 없다. 목전에 보이는 대상을 잘못 판단하여 因이 아닌 것을 인이라 하고 果가 아닌 것을 과라 하거나 옳고 그름(是非)과 禍福을 가리지 못하는 것과 같이 본래의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한다.

此遍計所執의 所執은 잘못 보이는 대상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할 때 그것을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판단하여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편견과 선입견 등의 감정을 가지고 처리하여 결과적으로 괴로움을 유발하는 착각이나 환상과 같은 존재로서 이를 ‘구상(構想)된 존재’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 어두운 밤거리에 떨어진 노끈을 보고 뱀이라고 착각하고 고집하는 것은 당연히 변계소집이다. 성유식론에서는 이런 경우 설령 노끈을 보고 노끈이라 하고 뱀을 보고 뱀이라 하더라도 노끈과 뱀이 모두 허환(虛幻)이라는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였다면 짐작한 바가 비록 사실이라 할지라도 변계소집에 속한다고 하고 있다.

自性無所有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所遍計로서 因緣所生法에 의해서 생긴 依他起이기 때문에 원래부터 空이요 自性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변계소집으로 인해서 생긴 種種相 역시 자성이 있을 수 없으므로 자성무소유라 한 것이다.

21頌 : 依他起自性 分別緣所生 圓成實於彼 常遠離前性

依他起自性에서 의타기의 依는 依支 또는 依托을 뜻하며, 他는 제법의 인연으로서 조건을 가리킨다. 제법은 스스로 生하는 것이 아니라 因과 緣이 구족되어야 假相이 生하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非有) 존재하는 듯한(假有) 까닭에 의타기라 한다. 世間, 出世間 법은 모두 허망무실한 의타기이다. 모든 중생은 3性으로 마음이 일어나지만 3性은 본래 無性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일어나려면 境界가 있어야 하고 六根과 부합되어야 한다. 육근과 경계가 부합되어 마음이 일어나므로 의타기성이라 하며, 경계(他)에 依해서 일어난 마음이 계산해서 집착하면 遍界所執性이 되고 계산해서 집착하지 않으면 圓成實性이 된다. 의타기하지 않으면 본래 마음이 없고 본래 마음이 없으면 변계소집의 마음도 원성실의 마음도 없는 것이다. 이를 3無性이라 한다. 중생은 3성으로 마음을 쓰기 때문에 계산해서 집착하고, 보살은 3성이 있으나 계산해서 집착하지 않으므로 원성실의 마음을 쓰고 불지(佛地)에 이르면 3무성이 되어 비로소 마음의 자재해탈을 얻게 된다. 또한 의타기에는 染分과 淨分의 2종이 있는데, 염분의 의타기(染分依他)는 허망분별의 연려(緣慮)에 의해서 일어나는 유루(有漏)의 오염된 제법을 말하고, 정분의 의타기(淨分依他)는 성지(聖智)의 연려에 의해서 일어나는 무루의 오염되지 않은 제법(純淨之法)을 말한다. 따라서 염분의타는 변계소집성이고 정분의타는 원성실성에 섭속(攝屬)된다.

分別緣所生의 분별은 구별 또는 선별의 뜻이다. 일체제법은 色法과 心法의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色法은 드러나 있는 일체만법으로서 이를 상분(相分)이라 하며, 소분별(所分別)인 모든 사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스스로 자생(自生)하지 못하고 因緣法에 의한 緣生이기 때문에 의타기라 한다. 그리고 心法은 견분(見分)으로서 분별의 주체인 能分別인 認識을 말하는데, 인식 역시 緣生法에 의해서 안으로 견분종자를 의탁하고 밖으로 5根과 5境 등의 연(緣)을 따라서 작용하기 때문에 견분인 심법 또한 分別之緣에 의한 緣生으로 의타기이며, 무자성이다. 세간법과 출세간법이 의타기이고 육체와 정신도 의타기이며, 모든 유루법과 무루법도 의타기이다. 다만 무루법에서 妙覺位에 올라 佛果에 이르러 眞如性을 증득하여 능동적인 智와 所證的인 性이 근본적으로 갖추어지면 이는 緣生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의타기성을 벗어나게 된다. 능가경에서도 ‘相等四法 皆名依他起’라고 하고 있는데, 상등사법이란 오법(五法) 중의 사법(四法)을 말하는 것으로 5법은 ① 相–만유의 형상 ② 名–만물의 명칭 ③ 分別–의식의 헤아려 분별함 ④ 正智–행자가 진리를 열어 가는 智 ⑤ 如如–正智에 의해서 증득되는 眞如의 경지 등이다. 이들 5법 중에서 여여(如如)만이 無爲法이고 나머지 상등사법(相等四法)은 모두 의타기이며,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은 물론 성문, 연각과 보살까지도 의타기로서 法界의 10계 중에서 오직 佛界만이 무위법이며, 나머지 9계(界)의 제법은 모두 의타기이다.

圓成實於彼의 圓은 원융, 원만의 뜻이며, 전도를 여의었다는 의미이다. 成은 성취 또는 究竟의 의미이며, 實은 진실이라는 뜻으로 ‘원만성취진실’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佛性과 法性, 眞如, 法身 등은 이름은 다르지만 같은 몸으로 모두 원성실성을 갖추고 있다. 상(法相)은 한량이 있고 虛相이며, 假相이지만, 제법의 法性은 원만하고 진실이며, 不動不變하고 不生不滅하며, 十方 구석구석에 없는 곳이 없이 두루 상주하고 있으니 이것이 圓成實自性이다. 圓成實於彼의 彼는 의타기성을 말하는 것이다.

常遠離前性의 前性은 변계소집성을 가리키는 말로서 의타기의 제법 중에서 변계소집성을 제거(遠離)하면 원성실성이 된다는 말이다. 즉 의타기법에 대하여 分別하고 執着을 하면 변계소집성이 되고 분별하고 집착하지 않으면 원성실성이 된다는 도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22頌 : 故此與依他 非異非不異 如無常等性 非不見此彼

故此與依他의 故는 21송을 이어 본송을 시작하기 때문에 소이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此與依他의 此는 원성실성을 지칭한 것으로 ‘원성실은 의타기의 제법 중에서 변계소집을 멀리(遠離)하면 원성실이라고 하여 3성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것을 전송에 이어서 설하고 있는 것이다.

非異非不異의 非異는 同이라는 뜻이고 非不異는 不同이라는 뜻으로 원성실과 의타기는 같기도 하고 같지 않기도 하다는 말이다. 즉 원성실은 性이 되고 의타기는 相이 되는데, 相은 性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만법은 원성실을 떠나서 따로 의타기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타기의 모든 법은 원성실을 바탕으로 하여 나오기 때문에 같다(非異)고 하고, 원성실성은 영원히 불변하고 불멸하고 恒常하지만 의타기성은 緣生이므로 무상하고 변멸하여 원성실성과 의타기성과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같지 않다(非不異)고 한 것이다. 또한 의타기법 중에는 원성의 진실성이 확실히 존재하며, 원성실의 眞空 중에도 역시 묘유를 함유하여 만법을 生할 수 있어 같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원성실은 연기법이 아니고 생멸무상이 아니지만 의타기는 연기법에 의해서 존재하고 연기법이기 때문에 생멸하여 무상하기 때문에 원성실과 의타기는 같지 않다는 것이다.

如無常等性의 무상등이란 소승의 사법인(四法印)인 ① 諸法無我 ② 諸行無常 ③ 有漏皆苦 ④ 緣起性空의 네 가지 성(性)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법인을 수행하여 의타기에 의해서 생긴 모든 법이 무아, 무상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非不見此彼에서 見은 증견(證見)으로 깨달음을 의미하며, 의타기를 멀리 여읜다는 뜻이다. 此는 원성실을 彼는 의타기를 지칭하는 말로 수행자가 사법인 등을 수행하여 원성실성을 성취하고 원성실의 청정무구한 자리에서 의타기성의 무상을 깨닫지 않은 자가 없으므로 비불견 즉 원성실에서 의타기를 보지 않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23頌 : 卽依此三性  立彼三無性  故佛密意說 一切法無性

卽依此三性과 立彼三無性은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 그리고 원성실성의 3性을 의지하여 3無性을 세운다는 말이다. 3性의 시작이 경계를 의지하여 생기는 의타기성이기 때문에 마음이란 경계가 없으면 일어나지 않으므로 3無性이라 하여 本無自性을 밝힌 것이다. 이는 마치 부싯돌이 부딪쳐야 불이 일어나듯이 마음도 경계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3性의 마음은 본래 없다는 것이다. 경계에 의해서 마음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아 경계에 不動하고 ‘헤아리고 분별(計度分別)’하지 않으면 원성실성이 되어 청정무구한 眞如法性을 이루게 되지만 경계에 의해서 일어난 마음을 내 마음이라 집착하여 사량하고 헤아리면 곧 변계소집성이 되는 것이다.

故佛密意說의 密意는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부처님의 설법은 그 의미가 깊어서 참된 뜻이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밀의라 한 것이고, 둘째는 부처님의 뜻은 심히 깊어서 보살의 階位에까지 入地하지 못한 수행자로서는 감히 헤아려서 알 수 없기 때문에 밀의라 한 것이다.

一切法無性이란 부처님께서는 경계에 의해서 생긴 3性의 마음을 實인 줄 착각하여 집착하는 범부중생들을 위하여 3性이 모두 자성이 없고 일체만법의 性相이 모두 空이라는 것을 드러내 주신 것이다. 無性의 자리는 집착을 하려고 해도 집착할 것이 없고 집착을 破하려고 해도 파할 것이 없는 영원불멸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24頌 : 初卽相無性 次無自然性 後由遠離前 所執我法性

初卽相無性의 初는 변계소집성을 말하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은 것을 존재한다고 믿는 변계소집성 자체가 相無性이라는 것이다. 가령 어두운 밤에 노끈을 보고 뱀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믿거나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相無自性 또는 相無性인 것이다.

次無自然性의 次는 의타기성을 말하는 것으로 ‘만법은 스스로 자생하지 못하고 다른 갖가지 반연을 의지해서 비로소 마음이 일어나는 의타기이며,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因緣生이기 때문에 生無自性 또는 生無性인 것이다. 無自然性이란 因緣生을 말하는 것으로 生無性과 같은 뜻이다.

後由遠離前의 後는 원성실을 말한다. 前은 所執我法性의 앞이라는 말이다. 즉 이전에 집착한바 있는 我와 法을 멀리 여윈 性이란 뜻으로 원성실의 무성을 밝힌 송이다. 원성실성은 의타기로 생긴 마음을 헤아리고 집착하지 않음으로서 찰나생멸의 이치에서 불변부동하고 ‘태어남도 없고 멸함도 없는(無生無滅)’ 성(性)으로 第一義諦, 또는 勝義諦에 속한다.

所執我法性에서 변계소집하여 我相과 法相에 집착하던 마음을 멀리 여읜 것이 원성실이며, 第一義諦이며 勝義諦이다. 수행자는 緣生無性을 깨달아 의타하여 생긴 제법이 實이 아님을 알아서 변계소집한 我相과 法相을 멀리 여의고 진공묘유인 승의무성의 實地를 인식하여 원성실의 眞性을 구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