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의 꿈

김경주의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의 詩 드라이아이스의 부제에는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라고 쓰여있다.

시의 각주에 이 글이 고대시인 침연의 시 중 한 구절이라고 쓰여 있으나, 침연이라는 고대 시인의 실존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그러니 저 글은 산(生) 사람이 쓴 글은 차마 아닐 것이다.” 라고 메모를 단다.

하지만 산 사람이 쓰지 않은 글이 산 자들이 사는 이 곳에서 읽혀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니 메모는  헛 것, 바로 꿈, 백일몽에 취한 것이다.

하지만 헛 것을 메모한 나는, 현실이야말로 꿈보다 비현실적이라는 아득한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광장이나 사람들로 붐비는 골목에 서면 왜… 내가… 이 곳에… 무슨 이유로… 와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 떠오르고, 결국 아무런 존재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그때 바람이 불고 벚꽃잎이 하르르 떨어진다면 분분히 떨어지는 꽃잎 하나로도 여기, 지상에 있을 이유는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고 전율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봄빛에 바래고 봄바람에 벚꽃과 목련이 분분히 지는 주말 내내, 컴퓨터를 뒤집었다. 때로 창 밖의 아스팔트 바닥에 소복처럼 내려앉은 꽃잎들이 반사하는 오후의 햇살을 보면, 빈혈같이 어지러웠다. 그리고 일요일 저녁에는 <이웃집 토토로>를 본다.

그리고 어제는 집으로 일찍 돌아가 잊었던 영화를 하나 보았다.

<꿈>

1998년 일본의 영화감독인 구로사와 아키라(黑澤 明)가 죽는다. 그래서 특집으로  그의 영화 두편을 접할 수 있었다. 하나는 불세출의 명작인 라쇼몽(羅生門), 또 하나는 옴니버스였는데 제목을 알 수 없었다.

그 후 란(亂), 가케무샤(影武者) 등의 영화를 한국으로 돌아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늘 보고 싶은 영화는 제목을 알 수 없던 그 옴니버스 영화였다. 아마 제목이 너무도 단순한 <Dreams>이라 기억하지 못한 것 같다. 1990년작이다.

이런 꿈을 꾸었다()로 시작하는 8편은 단편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여우가 시집가는 것을 보거나, 핵발전소가 폭발을 하는 것 모두가 꿈의 형식이라기 보다, 현실의 형식에 가깝다.

구로사와는 각 단편마다 현실의 형식 속에 약간의 꿈과 같은 내용을 가미하면서 “이런 꿈을 꾸었다”라고 한다. 여우비가 내리는 날 여우가 시집가는 것을 본다거나(1편), 잘려진 복숭아나무의 정령들을 만나거나(2편), 눈보라 속에서 눈의 정령을 마주하거나(3편), 터널을 지나 대동아 전쟁 중 전멸한 자기 중대의 부하들을 만나거나(4편),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속을 산책하거나(5편), 핵발전소가 폭발하여 후지산이 붉게 변하고 방사선에 노출되고(6편), 또 오염된 세계 속에서 기형식물을 보고 도깨비로 변한 인간을 만나는 것(7편)보다…

가장 꿈같은 단편은 마지막 물레방아가 있는 마을(8편)이다.

이 물레방아가 있는 마을에는 아무런 몽상적 형식도 없다. 그저 자연과 인간의 삶이 그저 합쳐서 개울물처럼 흐른다.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시간들은 느릿하고 바쁠 것이 없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도 아이들은 자라고 노인들은 자신의 수를 다한 후 죽는다. 수를 다한 노인이 죽는 것을 축제로 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꿈은 이 세상에 펼쳐지는 것이다.

반면, 우리가 만들어가는 현실의 이 세상은 악몽에 가깝다. 그리고 아름다운 봄날을 놓친 나는… 악몽을 맞이할 지도 모른다.

저녁의 벚꽃, 오늘도 또 옛날이 되어버렸네

小林一茶

참고>

This Post Has 5 Comments

  1. 다시 보고 싶은 영화예요…
    오려주신 동영상 보고 있자니..
    처음 이 영화를 대했을 때의 그 설레임.. 놀라움…
    그런 것들이 기억나네요.

    아직 보지 않은 분들이 부러워요.
    그 감정을 느낄 수 있을테니까.

    1. 여인

      제가 일본문화에 대하여 어느 정도 관심을 갖게 만든 영화일지도 모릅니다. 홍콩에 있을 때였는데 98년인가 구로자와감독이 타계를 했다고 특집으로 방송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후 가케무사 등을 보았는데 이 영화 만 못했던 것 같습니다.

  2. 만나서 반갑습니다. 쏘울님의 블로그에서 넘어왔습니다. 🙂

    1. 여인

      저도 반갑습니다. 사진이 참으로 수줍고 조용하여 오랫동안 바라봐도 정겹기만 했습니다.

  3. 旅인

    그라시아 09.04.15. 18:56
    저녁의 벚꽃 오늘도 옛날이 되어버렸네… ㅜㅜ
    ┗ 旅인 09.04.17. 13:12
    늘 그렇지요…뭘 TT

    러시아황녀 09.04.16. 16:29
    아 보고 싶어요 그런데 내일 손님들이 온다기에 아껴 둡니다..
    ┗ 旅인 09.04.17. 13:13
    여우와 도깨비같은 유사점이 있으면서도 화면의 여우와 도깨비는 우리의 정서와 왜 그리 다른지?

    다리우스 09.04.16. 19:26
    산사람이 쓴 글은 차마 아닐,,, 잘 읽습니다.~
    ┗ 旅인 09.04.17. 13:11
    김경주는 참으로 희안하게 시를 쓰던데… 심정적으로 저의 가슴과 울림이 같습니다.

    러시아황녀 09.04.19. 18:41
    많은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이군요. 중국의 비파와 일본의 사미생 소리가 다른 것 처럼 확실히 일본의 정서는 다른 느낌이지요. 일본 소설 나생문 읽다가 접었는데 구로사와씨는 영화를 만들었군요..술자리에서 어느분이 일본에는 고전이 없다고 단언을 하기에 나생문을 두고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 旅인 09.04.18. 09:29
    야쿠다가와의 나생문과 구로사와의 나생문은 제목 만 같지 내용은 다른 것이라고 합니다. 羅生이라는 단어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물과 같이 얽힌 생이라니…

    라비에벨 09.04.22. 18:44
    꿈이 칼라면 악몽이라던데…그렇다면 우리는 악몽을 꾸고 있는게 맞군요…꿈을 꾸며 감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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