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10월과 눈먼 자들의 도시

붉은 10월이라는 영화는 톰 클랜시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숀 코네리가 함장으로 나오는 영화는 원작에 비하여 훨씬 재미없다. 클랜시의 소설은 무르만스크항에서 출항하는 핵잠수함이 심해로 잠항하는 순간부터, 소설은 심해의 어둠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한다. 달아나는 잠수함을 향해 발사되는 어뢰,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원형의 오실로스코프 위에 중앙의 좌표를 향하여 3시 방향으로 부터 꼬리를 남기며 점선으로 날아오는 녹색의 빛과 눈을 감고 심해에 귀를 내리고 있는 청음병의 이어폰 속으로 심해의 저편 어디에선가 날카롭게 조류를 갈라내는 어뢰의 프로펠러 소리. “3시 방향. 어뢰 일기 출현!”, 찌푸리고 있던 함장은 “우현 5도 상방 13도 방향각 유지, 항속 30노트 전진!” 불현듯 소리친다. 그리고잠수함이 몸체를 비틀어 부상할 즈음, 어뢰는 선미를 스쳐지나 대륙붕 위 해저에 솟은 언덕 위에 쾅하고 폭발음을 쏟아내며, 잠수함을 몇분간 흔들어댄다.

톰 클랜시는 어두운 대양에 잠수함을 잠항시키고, 잠수함의 이동경로와 소나가 해저에서 건져낸 반향음으로 냉전 말기의 핵잠수함 붉은 10월 속에서 침묵하고 있는 함장의 의도를 읽어낸다. 이 소설은 그래서 어둠과 소리, 해저의 쫓고 달아나는 행적들로 부터 일련의 움직임을 간파해내고, 그 움직임이 어떤 의도 속에 나란히 가라앉아 있는가를 찾아낸다.

하니 이 소설을 영화화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래서 영화화된 붉은 10월은 재미가 없다.

반면 사라마구는 인간의 더러운 욕망과 생존의 욕구를 파헤치기 위하여, 어느 날 도시의 사람들을 눈멀게 한다. 자신이 사물을 보고, 타인들에게 보여지게 되는 인간들은, 자신의 생존방식이 담보되는 만큼, 보이고 보여지는 세계의 도덕과 규율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눈먼 자들의 수용소에 들어가 먹을 것의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처음에는 생존과 배설을 위하여 더듬더듬 우유빛으로 가득한 실명의 공포 속을 걷기 시작했고, 다음부터는 더 이상 보이는 세상을 규율하던 율법은 소용없음을 깨닫게 되자 보급되는 음식물을 가로채고, 그 음식물로 금품을 갈취한다던지, 수용소 내의 여자의 몸을 요구한다.

사라마구는 인간의 더러운 속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톰 클랜시와는 달리 자신의 소설 속의 처참한 광경과 아비규환을 독자들에게 펼쳐 보인다. 그리고 너희들이 눈이 먼다면, 이와 같이 야비한 세상에 살 것이라는 예언을 하면서, 단 한사람의 눈뜬 여자를 구세주로 소설 속에 놓아둔다.

사라마구는 인간에 대해서 몹시 비관적인 관점을 갖고 있으면서도, 소수의 인간들이 보이지 않는 유대로 결합되고 더듬거리며 살아가는 위대한 인간상을 보여준다. 위대한 인간은 늘 위대한 인간이 아니라,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우유빛 실명 속에 있던 인간들을 다시금 보이는 세계로 되돌려 놓는다.

이 소설은 이미 영화화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화면 가득한 오물들과 더러움 속에서 먹을 것을 더듬거리며 찾는 몬도가네를 어떻게 관객들에게 선사할지 궁금하다.

참고> 눈먼 자들의 도시

This Post Has 5 Comments

  1. 책은 좋게 읽었는데, 영화는 보지 않았어요..
    제 기억에 남은 것은… 그 의사의 부인.
    눈이 멀지 않았는데도, 눈 먼 사람들 속에 살아갔던 그 여자..
    오랫동안 기억에 남더군요.

    그 책은 ‘여성성’이 많이 두드러졌던 것 같아요.
    창녀도 그랬고, 의사 부인도 그랬고…
    비오는 날, 베란다(?)에서 함께 목욕을 하던 여자들이 떠오르네요. 그 책에 그런 광경이 있었죠..

  2. 여인

    여성성에 대한 생각은 못해 보았네요. 붕괴되어가는 기존질서 자체가 남성에 의해 구축된 만큼, 새로운 질서는 여성들의 모성성에 의해 이끌어질 것이라는 예언일지도 모르겠네요.

    다시금 책을 재해석할수 있는 조언이 되겠습니다.

    영화를 볼 수 있음에도 볼 생각을 않고 있습니다. 사라마구의 책 속의 어둠과 냄새를 영화가 걷어갈까봐서요.

  3. 클리티에

    아.. 주제 사라마구..

    7여년전 방황하고, 인생 우울하고, 답답하고, 진짜 괴로울 때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었는데,
    한숨도 못자고 단번에 읽어내려 갔었어요..

    그 충격과 공포의 전율..
    그 이후부터 주제 사라마구가 제 인생의 작가 중 한명이 됐어요..

    그리고 영화는 그냥 그래요.. 책의 그 느낌을 반의 반도 느낄수가 없었어요.
    뭔가 김 빠진 콜라 같은 기분이랄까요. 후후..

    1. 旅인

      사라마구의 책을 읽을 때 몹시 기분이 좋았습니다. 책에 빈틈없이 빼곡한 글들, 길다란 구절들, 그러면서도 숨가쁘게 쫓아갈 수 밖에 없는 흡인력들, 이런 것들 때문에 말입니다.

      전에 케이블로 영화를 하던데, 좀 보다 말았습니다. 오히려 원작의 분위기를 깰까봐서요.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본 것 중에 좋았던 영화는 움베르토 에고의 <장미의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구상할 수 없었던 도서관과 수도원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4. 旅인

    다리우스 09.01.18. 23:43
    좋은 독서의 시간을 보내셨군요, 전 아직 붉은 10월을 영화만 보았지, 소설은 읽지 못했군요, 장면으로의 형상화,,, 문학세계만의 독자성을 발견하는 시간이랄수 있을 듯 합니다.^^
    ┗ 旅인 09.01.19. 23:44
    소설의 붉은 10월은 정말 긴박감이 돌았지만, 잠수함이 보이고 미사일이 보이는 영화는 그 맛이 안나더군요. 소설보다 좋은 영화는 한번도 본 적이 없던 것 같습니다.

    유리알 유희 09.01.19. 01:32
    저는 영화도 책도 접해 보지 못했네요. 눈먼자들의 도시, 님에게 충만한 읽기의 시간을 부여하셨다니 무척 보고 싶군요. 그러나 두렵기도 해요. 이제는 추한 것 보다 아름다운 것을 그리워하게 되거든요. 아무래도 제가 늙은 걸까요? 흐흐.
    ┗ 旅인 09.01.19. 23:45
    그래도 한번 읽기를 권하고 싶은 책이네요.

    샤론 09.01.19. 13:41
    잘 읽었습니다…행복한 시간 되시길….
    ┗ 旅인 09.01.19. 23:46
    저 때문에 목이 칼칼하시진 않았는지요? 만나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집시바이올린 09.01.19. 15:09
    댓글을 삭제하고 다시 올립니다. 모임후기 운운….다리웃님이 강력히 말리셔서 ㅡ,.ㅡ 붉은 시월 영화는 TV에서 봤던 기억이 나네요
    ┗ 旅인 09.01.19. 23:46
    집시님이 무서워서 올렸습니다.^^
    ┗ 집시바이올린 09.01.20. 01:45
    배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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