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들-마지막

사당역에서 정모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랑에 관한 사설>을 그만 접어야 겠다는 강박감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일기나 쓰거나 간혹 기행을 노트에 끄적거리다가, 어느 날 부터 인터넷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익명으로 모니터에 이슬처럼 맺히는 제 글을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것에 몹시 흥분했습니다. 그리고 익명의 다른 분들의 글을 보고, 캄캄함 익명의 바다를 건너 댓글도 달고 대화를 해나갈 수 있다는 것에 매료되었습니다. 아마 그분들이 없었다면, 인터넷에 글을 올리거나 하는 귀찮은 일은 그만 두었을 겁니다.

그분들의 관심과 서로의 우의에 용기를 얻으며, 글을 계속 써나갔습니다. 그것은 제 가슴 속이나, 노트 속에 갇혀 있던 것들의 해방이자, 저에게 즐거움이었습니다.

정모가 있다고 하자,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익명의 나의 존재 일부분이 실존의 세계 위로 떠오르고, 저 또한 익명의 이름과 글 만으로 어두운 심해에서 더듬어 왔던 타인들을 실체로 마주한다는 것은, 익명으로 존재하자고 줄곧 생각해왔던 저에게는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일 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온 라인 상에서 익명으로 감추어져 있던 저를 드러내고, 또 익명의 아득한 대양을 건너 온 의미와 단어 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형체와 목소리와 다정한 웃음으로 가득한 사람으로 만나보는 것이 견딜 수 없는 갈증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마음 속의 설레임을 애써 억누르며 정모에 나갔고, 만나보고 싶었던 분들을 (정말 기적적으로)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보여주신 레테 식구들의 후의에 저는 오랫동안 만나보지 못한 지기를 만난 듯한 따스함을 누리며, 다소 늦기는 했지만 무사히 귀가를 했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잠을 자거나 술에서 깨어나기 위하여 하루를 보냈습니다.

밤이 되자 <사랑에 관한 사설>을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남녀 둘 만의 개별적인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계속하다 보면 性이라는 생물학적 보편적인 개념에 이르게 되고 사랑은 단지 성적 쾌감의 문화화라는 性性說의 함정에 빠져들게 되리라는 느낌 때문에 저만의 개별적인 사건을 하나 둘씩 올리면서, 어쩐지 희화화된 사랑의 이야기가 우울해지면서 자신의 어리석은 사랑에 대한 듣기 싫은 변명이거나, “나도 과거에는 한 가닥했었지” 하는 신세 한탄에 불과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지만, 더 이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끝내기로 했습니다.

바로 앞의 글, <구원>은 오래 전부터 ‘그 계절의 노을’이라는 제목으로 쓰다가 방치해 둔 글을 요약하여 ‘치유의 호수’라는 글에 섞어 만들 글입니다. 이 글을 쓰다가 남긴 메모에는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지나간 사랑을 쓰자고 쓴 것은 아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주제였다. 그러나 글을 쓰다가 지난 세월 속에서 불쑥 나타난 한가지의 기억에 그만 좌초되었고 구원에 이르기까지 나갈 수 없었다. 기억에 좌초된 순간 내가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전면 부정해야 했고, 그 기억들을 새롭게 조립해야 했다. 옛 추억 속에서 베아트리체가 되어 나를 천계로 이끌 그녀는 아쉬웁게도 나락으로 떨어져버렸고,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순례자였던 나는, 그만 머저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 글은 구원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단순한 신파조의 멜로물이 되어버렸다. 소득이 있다면, 머저리가 됨으로써 나는 마침내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대중에 공개하기에는 저의 치부의 한 자락이었기에, 정모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멈춰서 버린 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건너뛰어 이 시대의 성 모럴을 대변하는 불륜의 이야기로 넘어갈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심법에서 순수한 제 친구들을 희롱한 만큼, 저의 우울한 치부를 드러내지 않고, 이 글의 막을 내린다는 것은 뺑소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추억이란, 허구일 뿐 입니다. 아무리 솔직하려고 하여도, 개인의 이기심은 늘 기억 속에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을 가려내어 추억이란 것을 만들어냅니다. 추억에 대한 해석 또한 자신의 존재 의미를 가지런하게 하기 위한 의도적인 욕구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같아 보여도 결국은 픽션과 하등 대차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모 이후, 레테의 가족들이 이 이야기를 허구로 이해하고, 현실로 오해하지 않으리라는 심정으로 글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사랑에 대한… 라는 나의 글은 불온하다. 불온한 이유는 이해하지도 못하는 자크 라캉(J.Lacan)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엄밀하게 언어적이라고 하지만, 무의식의 바다는 공허하다. 상상의 바다에는 id와 타자와 남근, 그리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결코 기의에 다가갈 수 없는 기표의 뼈가 에쓰이엑쓰로 발광하며 떠다닐 뿐이다.

그러니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상상은, 상상의 바다에서 건져올려 상징의 뭍의 날카로운 언어로 다시 해부되어 피부와 창자와 뼈와 피와 고름으로 낱낱이 갈라지고, 드디어 사랑이란 요따위 것일 수 밖에 없노라고 선언되는 것이다.

나는 살아있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있는 사랑을 이야기할 뿐이다. 사랑이란… 하고 쭉쭉 이야기를 한 후에 한모금의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그러니까 사랑이란 단지 아랫도리의 문제일 뿐이죠.”라고 씨부리는 것이다.

그러나 라캉과 프로이드의 id와 타자와 남근이라는 단어에 다른 아름다운 단어로 대치한다면 어떠할까? 라캉에 의하면 기표는 기의와 결합하지 못한 채 끝없이 다른 기표로 표류하는 만큼, id와 타자, 남근이 확고한 의미를 갖고 제 자리에 깃들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래서 나의 글은 불온하며, 무의식처럼 무의미할 뿐이다.

1 thought on “사랑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들-마지막

  1. 旅인 09.01.18. 16:20
    다리우스님, 유리알 유희님, 자유인님, 솔바람님, 샤론님, 라비에벨님, 그라시아님, 스테판님, 라마님, 트루쓰님… 빠지신 분 없나??? 그리고 뵙지 못했지만 늘 레테에 함께 해 주셨지만 뵙지 못한 님들 모두 그제 저녁에 감사했습니다. 더욱 레테가 따스해지고 푸근한 곳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준 고마운 날이었습니다. 남은 휴일 잘 보내시기를…
    ┗ 다리우스 09.01.18. 16:42
    네 빠진 분 없습니다. 여인님, 님의 독자적 정신 세계의 항해에 먼발치의 박수를 보냅니다. 드뎌 사랑론의 끝을 보셨군요, 그 완결정신에 깊이 감동받습니다. 여인님이 중심에 오셔서 벙개는 더욱 풍성한 만남 이었습니다. 건강 유의하시고 깊이 있는 사색의 글 늘 기다려집니다.
    ┗ 라비에벨 09.01.19. 23:06
    긴 사랑에 대한 사설 감동으로 읽기를 마칩니다. 여전히 사랑에 대한 정의는 내리기 어렵군요…만나뵈어서 좋았구요…끝까지 자리 하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레테에서 계속 좋은글 기대합니다.
    ┗ 旅인 09.01.19. 23:41
    알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했던 잘못 덕에 고생 좀 했습니다. 일이 계셨는데 너무 늦게까지 붙들고 있어서 죄송합니다.

    유리알 유희 09.01.19. 02:04
    아, 그렇다면 구세주는 존재하는군요. 단순히 A라고 해도 무방할… 그래요. 저도 익명성을 깨는 순간, 관계가 오히려 허술해 질까봐 무지 두려워했답니다. 그런데 우리 더욱더 돈독해진거 맞죠? 이제 성장기의 사랑론은 끝냈으니 본격적인 성의 모랄로 전진하는가요? 넘 서두르지 마시고 편하게 조금씩 올려 주시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일단 좀 쉬세요. 이러다가 병납니다.요.
    ┗ 旅인 09.01.19. 23:40
    성의 모럴 문제는 단편으로 가끔씩 올리겠습니다. 엮다가는 몸살이 날지도 몰라서… 정말 만나뵈어서 기뻤습니다.

    스테판 09.01.19. 18:35
    뵙게되어 진심으로 행운이라고 생각됩니다. 처음뵌 날도 넘 좋았는데 차분히 글들을 읽다보니 고구마 줄기에 딸려나오는 엄청많은 고구마들이 제 마음의 바구니에 쌓이는 기분입니다.
    ┗ 旅인 09.01.19. 23:43
    앞으로 스테판님 덕분에 그림에 대하여 조금씩 개안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그림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런데 모나리자의 설명을 듣다 보니 그런 기분이 들더군요.
    ┗ 스테판 09.01.20. 21:06
    그날 술기운에 제가한말입니다 미술에 관해선 맞는 말이고요. 알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 旅인 09.01.20. 21:26
    저도 술기운에 그만 깜빡!^^ 그냥 감각적으로 보고 팜플렛에 적혀 있는 것 조금 보고 그림을 감상하는 것보다 스테판님처럼 그림 가이드가 있다면 훨씬 깊이있게 그림을 보고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그 날 했습니다.
    ┗ 스테판 09.01.21. 11:50
    기회만 된다면 전시장에 자동안내 히어링 장치가되어있는 이어폰이 되어드리지요. 다만 아는한도에서만요. 여인님보다 제가 모르는 부분도 많을듯 합니다.

    난향 09.01.21. 14:11
    마지막까지 완결하심에 박수와 축하를 보냅니다..소설을 읽는 동안 미소가 떠나지 않는 즐거운 여정이었음을 말씀드립니다…마지막은 의외로 싱거운데요…기운이 빠지셨나봅니다…그런데 천천히 쓰시지 왜 자꾸 끝내야 한다는데 마음을 두셨는지?….좀 더 읽고 싶었는데…지금 쓰신것만으로도 책 한권 분량은 넘을 듯 싶은데요…또 다른 멋진 작품을 기대합니다…
    ┗ 旅인 09.01.22. 08:19
    서두른 이유와 이 글을 올리기 이전에 과거에 써놓았던 이야기를 올린 것은, 글이 진행되어가면서 이 시대의 사랑에 대한 불온한 사유(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차는 것 같아서 터무니없는 것에 구원이라는 명칭을 달고 끝내버렸습니다. 아마 사랑이라는 것은 진정한 사랑을 한 사람이 써야할 이야기이지, 저와 같은 사람이 쓸 경우 그냥 극화된 하나의 장난으로 끝나버리지 않을까 해서요. 예 열시미 쓰겠습니다.

    truth 09.01.22. 12:46
    감사합니다. 여인님..^^
    ┗ 旅인 09.01.22. 14:50
    무에가요? 감사하다고 그러시니 오히려 제가 송구스럽습니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