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방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외로움일지도 모른다. 타인들과 친화하기 위하여 자신과 친화해야 할 시간들을 늘 놓치고 만다. 침묵과 평화 속에서 마음을 열고 대지와 친교할 수 있는 장대한 시간들을, 사소한 대화와 군중들이 만들어내는 소란 속에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호텔 방으로 돌아와 책을 읽으려고 했다. 하지만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독서를 방해했다.

글을 써야 할 절박감이나, 써야 할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니다. 늘 쓸 것은 없다. 무엇을 쓰기 이전에 이 항구의 해변이나 낯선 골목길을 배회하거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른다. 나에겐 누구에겐가 말해주어야 할 사유나 경험이 다른 사람에 비하여 턱없이 빈곤하다. 또 나의 생각이란 흐리멍텅하고 알고 있는 것은 늘 피상적일 뿐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나 듣는 것이 났다.

또 남들은 다 겪은 사춘기에 대한 기억은 없다. 아직 사춘기 이전의 미성숙에 머물고 있거나, 남들은 혹독하게 치루었을 열병이 몸살처럼 스쳐지났거나, 아니면 너무 어린 시절에 헛되이 조숙의 열병을 앓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시절의 아픔에 대한 경험도 적절한 이해도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니 세상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의 결핍은 물론 사춘기에 겪었어야 감정적 충동들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이유로 글쓰기를 포기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럼에도 글을 쓴다.

아마도 내가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그래서 누군가 나의 초라한 이야기를 엿보고 있고, 누군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자신의 미미한 존재감을 찾겠다는 것이라면, 외로운 것이거나 더 이상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한다는 반증이다.

동료를 먼저 서울가는 비행장으로 보내고, 몇번인가 망설인 끝에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했다. 만나보고는 싶은데, 출장 중이라는 비서의 말에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만난다면 반갑긴 해도 서로 뚜렷하게 할 말이 없다는 것이 서먹했다.

전에 노신(周樹人)의 형이라는 周作人의 글을 읽었을 때,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던 기억이 나서 서점으로 가서 김용의 무협소설을 샀다. 소설 속의 한자들이 눈 앞에 가물거려 계속 졸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추기급인(推己及人)이라고 했던가?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 타인을 이해하라는 공자의 말처럼, 범상한 생활 을 이야기한 주작인은 나의 생활에 비추어볼 때,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고, 과장된 사건과 터무니없는 광경을 그리는 무협소설은 어려웠으리라.

홍콩사람들은 김용의 무협소설은 싸구려가 아니라고 한다. 그의 문장은 탁월하다고 한다. 그러나 나의 실력으로는 그의 문장의 탁월성을 감지할 수 없다. 홍콩 明報의 주필이자 주인인 그에게 무협소설은 늘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김용의 무협소설은 결국 책꽂이로 들어가고 만다.

20080910 香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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