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가 사는 곳은—끝

편지를 다 읽은 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밤길을 따라 가은 쪽으로 걸었다. 무작정 걸었다. 나의 머리 속에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때론 새제의 길을 야밤 중에 넘는 트럭과 승용차들이 하얗게 빛을 뿌리며 지났다. 다시 아침이 되고 제천이든가 어디인지 모르는 곳으로 떠다니고 있었던 것 같다. 낯선 대합실에 내가 버려져 있거나, 때론 길 위로 은행나무 잎이 노랗다 못해 하얗게 내려앉기도 했다. 어둠과 밝음이 교차되는 곳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고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는 가운데, 집에 도착했다.

14층을 눌렀고, 엘리베이터가 어둠 속으로 떠올랐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나는 초인종을 눌렀고, 어머니가 문을 열었다. 어머니에게 아무 소리도 않고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누웠다. 무척 졸렸다, 마치 천년동안 머나먼 곳으로 떠나 마침내 돌아온 것처럼.

이불이 편안했다. 그리고 내 몸 위로 빛이 조용히 내리면서 몸 위에 소복히 쌓였다. 빛의 무게에 못이겨 마침내 잠이 들고 말았다.

내가 깨어났을 때, 병원 침대였다.

식구들이 내 곁에 와서 살아돌아왔구나 하며 안도를 표시하며,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이곳 저곳 정처없이 떠돌았노라고 했다. 아무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병원에 와 있느냐고 물었다. 식구들은 폐렴에 걸렸다고 했고, 만신창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퇴원을 하고, 나는 짐을 찾으러 봉암사에 가봐야 한다 하면서, 그 해 겨울을 넘겼다.

지영이 노르웨이로 가기 전, 한번만이라도 만나기 위하여 그녀가 산다고 했던 동네 부근을 배회하거나, 고등학교 동창 녀석들에게 연락을 넣어 병진의 연락처를 얻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아는 동창 놈들은 공부는 내팽개치고 놀기만 하다, 재수 삼수 끝에 간신히 삼류라도 간 처지였기에 공부 좀 한다는 병진의 연락처를 아는 놈이 없었다. 게다가 병진은 멀리 미국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해 이월이 되었다. 이월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가슴이 많이 다쳤는지 늘 추웠다.

때로 김포공항으로 나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오슬로로 가는 직항편이 없었기에 유럽발 체크 인 카운터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다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곤 했다.

1986년 2월이 지나가면서 삶에 대한 의욕도 없었고, 더 이상 앞 날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가끔 가슴이 아팠고, 차디찬 냉기가 온 몸을 떠돌아 다녔지만, 잠바깃을 올리고 합정동으로 갔다.

병진의 집 자리는 한강을 건너온 2호선이 지하로 들어가는 터널 입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순교자의 무덤 위에 의연했던 미루나무 가지 끝은 2호선 방음막 위로 보였다. 우리 집은 이미 헐리고 건물을 올리는 지 기둥들이 올라섰고, 집 앞의 공터에는 석재와 자갈들이 부려져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자, 허한 가슴에서 괜스레 눈물이 나려고 했다. 나는 간신히 절두산 성당 쪽으로 난 굴레방다리를 통해 절두산으로 올라갔다.

어린 시절 내가 앉아 노을을 바라보던 방죽의 자리를 찾을 수 없게 변해 있었고, 노을이 내리는 공엄진과 부근은 지하철 2호선 당산철교가 눈을 가로막았다. 조금 있으면 개나리가 피는 삼월이었지만, 해빙이 안된 겨울강에 비친 오후의 햇빛처럼 명멸하지 않고 번들거리기만 했다.

성모 마리아 상이 있는 옆의 언덕을 지나고 높은 계단을 타고 올라, 성당 위로 올라갔다. 난간에서 잠시 봄이 오는 강을 내려다 본 후, 조용히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성당의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마침내 지영을 보내기로 하고, 먼 곳이나마 그녀가 보냈던 아픔을 치유하고 행복하기를 빌었다.

그러자 지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태허에서 태을로 있다가 문득 공공가에서 놀다, 그만 육합을 만나 천년을 살아볼까 부생을 타고 나왔데요. 그러다 자미로 돌아가면 아예 사라지는 것도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래요.”

송광사의 삼청교 위에서 나를 보며 지영이 그렇게 말하곤, 웃으면서

“이 다리의 다른 이름이 능허교래요. 텅빈 것을 밟고 지나는 다리. 우리란 결국 텅비어 있는 것이 천지사방을 만나 꿈꾸는 것에 불과하죠. 우리의 사랑마저 텅비어 끝이 없다는 것도 너무 아름답지 않나요?”

하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성당을 벗어나, 어지러워 아래가 아득한 계단을 내려가 합정동을 지나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멀리에 있는 집으로 갔고, 다시 시간이 지나고 어느 회사에 경력사원으로 들어갔다. 세상의 허무는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허무야 말로, 아름답고 멈추고 싶은 시간들을 퇴색시키는 반면, 인간이 지닌 무수한 아픔과 슬픔마저 바래게 했다. 그래서 세상의 허무는, 그만 재미없는 세상에 나를 그냥 살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미로 돌아가면, 텅빔 만이 서로 사무치는 것이라서 여기서 사나, 죽어서 저기로  가나, 그것이 그것인 바에야 풍진세상 한바탕 꿈이라도 꾸는 것이 나았다.

지영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 속 밑으로 가라앉았고, 추억이 되고, 마침내 살과 피가 될 즈음에, 나는 결혼했다.

지영이 나를 사랑했던 것처럼, 아내를 사랑했다. 우리는 이듬해 아들을 낳았고, 아들이 세살되던 해에 중고차를 장만했다. 짙은 가을이 오자 불현듯 오래된 짐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아들을 실은 차는 문경새제를 넘었고, 예전의 자갈길의 자갈들을 뽀드득 밟으며 봉암사로 가고 있었다.

봉암사에 다다르자 계곡 속에는 단풍이 잔뜩 들었고, 오후 두시의 가을빛 아래 예전처럼 개울이 자갈들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예전의 묵었던 방이 비어 있었다. 아내는 지영처럼 창문을 열고 턱을 창 턱 위에 올린 채, 계곡을 바라보며,

“여기 참 좋다. 계곡도 아름답구, 낡았지만, 아까 주인 아줌마가 말하던데… 오래 전 몹시 사랑했던 연인이 지나갔던 방처럼 느껴져.”

라고 말했다.

나도 나란히 창 턱에 턱을 올리고 아내의 얼굴을 보았다. 아내의 얼굴 위로 “아니 왜?”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아내에게 웃음지었다.

아내의 모습을 보며, 더 이상 짐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래 전 이 방을 스쳐간 옛날 사람일 뿐이지, 더 이상 과거에 매달릴 필요는 없었다.

아내는 째죽거리며 걷는 아들을 데리고, 닫혀 있다고 해도, 가을 빛이 너무 좋다며 산문 쪽으로 걸어갔다.

가을 오후의 햇살이 너무 좋아 어지러웠다.

창턱에 턱을 걸치고 가은으로 이어지는 길을 보았다. 길 끝에서 버스가 오는지 먼지가 피어올랐다.

This Post Has 3 Comments

  1. 위소보루

    이 글을 주욱 읽으니 합정동과 봉암사가 여인님의 삶에서 무척이나 의미있는 장소인 것 같습니다. 소설인듯 과거의 기억인듯한 글 속에서 저에게는 무척이나 가슴깊게 다가오는 그런 메세지가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하늘 높고 파란 가을에 이 글을 읽어서 그런지 왠지 모르게 싱숭생숭해져버렸습니다 하하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1. 여인

      합정동은 고1때부터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 초년까지 계속 살았던 곳입니다. 그곳에 살 때부터 그 곳을 좋아했습니다. 서울에서 가장 낮아서 빛이 가라앉아 떠돌고, 석양이 가장 붉게 물들던 곳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오후가 되면 늘 산보를 하곤 했습니다.

      가은의 봉암사는 두번인가 가보았는데, 사람에 따라 취향은 다를지 모르지만 이 글에서 묘사한 것과 똑같이 한적하고 떠나지 않고 머물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이 글은 사실 동화라고 해야할 지 시라고 해야할지 모르는 제 글을 소설화한 것이지만, 어느 부분은 사실이고 어느 부분은 허구여서 저도 쓰면서 어디까지가 허구와 사실의 경계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2. 旅인

    旅인 08.12.15. 16:08
    마음 속에 다급한 느낌(빨리 이 글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초조함)이 들어 후닥닥 다 올리고 말았습니다.
    ┗ 다리우스 08.12.15. 19:33
    다 올려주셨군요, 천천히 잘 읽어 보겠습니다.^^

    더불어숲 08.12.15. 17:11
    어서 읽어야 하는데…송년모임이 왜 일케 많은지 요즘은 허겁지겁 술에 찌들려 비몽중이라~~좀 두고 읽어보겠습니다.
    ┗ 旅인 08.12.15. 17:35
    천천히 읽으셔도 됩니다.^^

    꺽수 08.12.15. 21:07
    천년을 같이한 그녀가 가을처럼 떠나갔군요. 그녀가 벌써 그립습니다…여인님을 많이 닮았을 정우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좋은글 감사해요…
    ┗ 旅인 08.12.15. 21:35
    벌써 다 읽으셨나요? <나>로 쓴 일인칭이다 보니 좀 닮기는 닮았을 것 같습니다. 감사하기는요. 오히려 글이 엉성하여 송구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지건 08.12.16. 09:29
    오늘 오전은 ‘그 여자가 사는 곳은’ 덕택에 좋은 시간으로 채웠습니다…여인 님이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 旅인 08.12.17. 14:15
    아 고맙습니다. 너무 이곳 저곳 많이 왔다갔다 하셨죠? 실증을 느끼시지들 않으실까 적정했었습니다.

    자유인 08.12.16. 22:11
    그녀는 노르웨이 피요르드 해안 어디에서..여름이면 염소를 방목하고 젖도 짜고 치즈도 만들면서,지난 사랑을 기억하며 잘살고 있지 않을까 하면서 흐믓하게 읽었습니다.^^
    ┗ 旅인 08.12.17. 14:16
    예 저도 지영이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때때로 정우를 생각하기를…

    유리알 유희 08.12.17. 13:43
    즐감입니다. 올해도 이렇게 아름다운 소설 한편을 남기셨군요. 올 여름을 반추하면 늘 아름다운 상념에 젖을 수 있는 작품하나 만들엇으니 추억이 더욱더 윤택해질 듯요. 그림에 비유한다면 사실화, 라고 할까요. 그래서 더욱더 흡인력이 있는 소설이 되었군요. 다만 너무 뻔한 결말이 식상함을 줄까 아주 쪼매 걱정이 됩니다만. 여인님! 화이팅입니다. 저도 억지스럽지 아니한 이런 소설을 쓰고 싶군요.
    ┗ 旅인 08.12.17. 14:20
    정곡을 찌르셔서 악 소리도 못합니다. 진부함 때문에 걱정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저는 유희님의 글을 보면서 늘 스피드와 긴장감 그런 것을 느끼며 읽거든요. 아마도 유희님의 소설은 사전에 잘 기획되어 플롯이 탄탄해서 독자들이 말려들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던데… 저는 플롯같은 것도 없고 그냥 그냥 쓰는 것 때문일 것 같습니다. 어제 회의를 하면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무협단편소설을 한번 써볼까? 하는…
    ┗ 유리알 유희 08.12.18. 17:01
    저도 그런거 없어요. 그런데 소설에 미쳐 있을 때는 저절로 머릿속에서 구성이 되고 단락이 나누어지고. 자다가도 일어나 수정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오리무중이랍니다. 그래서 이렇게 유연한 문장으로 지인에게 고백하듯 들려주는 님의 소설이 더욱 귀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어요. 뭐든 떠오를 때 얼른 쓰시길요. 무협단편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저 착한 독자죠? ㅋㅋ.
    ┗ 旅인 08.12.19. 09:51
    예~! 유희님께서 등을 떠미시니 갈 수 밖에요. 에휴~

    러시아황녀 08.12.18. 21:12
    누구나 한번 쯤 은 써 보고 싶은 소설이네요..과장 없이 담담한 내용들이 정감이 흐릅니다..유치하다는 생각은 전혀 아니네요..맑고 깨끗한 소설 형식이 마치 앙드레 지드의(맞나?) 전원교향악 같은 느낌입니다..잘 읽었습니다..
    ┗ 旅인 08.12.17. 21:10
    우매 이런 지독한 칭찬은 처음 들어보네요. 아무튼 유치하지 않다 이 말씀만 건지겠습니다.^.~

    샤 론 09.05.08. 20:12
    오늘 아침부터 짬짬이 이 소설을 모두 다 읽었습니다…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냇물같은 글이었습니다..제가 느끼기에는…전의 여인님 소설 ‘할머니 이름으로 ‘하고 ‘사랑에 대한 사설’ 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는데 오늘 소설이 없을까 뒤지다가 이 글을 발견하고 읽게 되었네요..여인님의 소설은 한번에 다 읽게 하는 흡입력이 상당합니다…재미있습니다…ㅅ소설을 쓰는 분은 참 오래걸리지만 단번에 읽어버리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지만 단번에 읽히지 않는 소설은 결국 끝까지 다 못 읽기에 어쩔수 없는 모순이 아닐까 생각합니다..ㅎㅎ..애 많이 쓰셨습니다…
    ┗ 旅인 09.05.10. 18:19
    사실 이 소설은 제 마음에 별로 들지 않는 이야기였는데 시작한 김에 계속 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행으로 재미있게 읽으셨으니 다행입니다. 오래전 글에 댓글이 달려있어서 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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