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가 사는 곳은—5

우리는 다음 날 아침, 추암을 떠났다. 정선으로 간 우리는 다음에는 전남 담양으로 갔고, 다시 영주 부석사로 돌아오고 하며, 아무런 여정없이 누군가 어디로 가고 싶다하면 거기로 가고 다시 지나친 길을 거쳐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기도 했다.

삼척에서 돌아온 우리는 나의 방으로 가서 커피를 타 마시고, 먼 길을 가기 위하여 챙겨야 할 것이 무엇이며, 어디를 갈 것인가 하고 아웅다옹 했다.

지영이 웃으며 내 어깨를 때리려는데 내가 몸을 뒤로 젖혔고, 그 바람에 그녀의 몸이 내 품에 무너졌다. 그녀의 가슴과 체취를 안게 된 나는,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해 왔던 것이 무엇인가 분명하게 알았다.

내 품에 무너진 그녀를 꼭 안았고, 그날 밤, 우리는 함께 잘 수 밖에 없었다.

밤이 지나 새벽이 올 때까지, 방문을 열고 불도 켜지 않은 채 바다와 하늘을 보았다. 그 밤은 엄숙했다. 우리는 어깨를 마주하고 조용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일출을 보고 난 후, 이른 아침에 추암을 떠났다.

그리고 가을이 깊어가는 우리 산하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녔다. 가을 날들의 풍경은 한가했고, 우리에겐 시간이 넘쳤다. 우리는 가기도 했고, 어디에선가 멈추어서서 몇일을 보내기도 했다.

함께 날들을 보내면서, 그 전에 내가 알았던 사랑은 그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영을 만났다는 것이 미미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나의 삶이야 말로 어느 한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우주 공간에 태양이 만들어지고 땅이 만들어지던 그때부터 예비되어 왔다는 것을 간신히 알게 되었다.

지영의 사랑은 너무 커서 늘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었다. 지영의 속으로 들어가면, 사랑이란 잡을 수 없어서 슬프고, 영원과 이어져 있는 것 같아서 희열에 치를 떨면서도 늘 고요하고 평화로왔다.

그래서 끝나지 않는 갈증 속에서 나는 깊은 샘물을 퍼올리고 또 퍼올렸다.

우리는 서로의 무릎을 베고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머리를 걷어올리며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여행은 풍경도, 가을비도, 먼 길도, 때로 찾아오는 허기도 문제가 아니었다. 서로의 가슴을 향해서 우리는 아주 먼 길을 가고 있었을 뿐이다.

시월이 끝나려는 즈음에, 영암의 월출산을 오르다가 가을비를 만났다. 해남에서 영암으로 가는 길에 만난 월출산의 모습은 수석의 모양이었고, 우리는 무위사인가 하는 절 옆으로 난 길을 타고 올랐다. 어느 정도 올라갔을 때, 비가 내렸다. 바위 덩어리로 된 산 사면은 미끄러웠고, 산 위로 오르기에는 너무 멀었다. 우리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산에서 내려와 뼈 속을 저며드는 가을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를 타고 영암에 들어가 숙소를 정했다.

몸 속에 스민 한기를 빼내기 위하여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저녁이 되자, 지영의 몸에 열이 있어, 약국으로 가 감기약을 사 먹였다. 다음 날 괜찮다며, 다른 곳으로 떠나자고 지영이 보챘지만, 숙소에서 하루를 더 보냈다. 오후가 되자 열도 내렸고, 시내에서 저녁도 맛있게 먹었다.

그 다음날 우리는 영암에서 문경까지 갔고, 다시 가은의 봉암사로 갔다. 버스 타이어 밑에 바지직 자갈이 깨지는 외길 끝에 봉암사가 있었다. 하루에 오기에는 너무 먼 길이었다. 봉암사 앞에는 두 집만 딸랑 있었다.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하는데, 방이 없다면 막차인 그 버스를 타야 했기에, 버스가 떠나기 전에 방을 구해야 했다. 다행히 방이 있었다.

우리 정한 방은 아주 낡았지만, 창틀이 낮아 창문을 열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였다. 바로 그 창 앞에 아주 커서 숙소의 3~4배 쯤 되는 떡갈나무가 있었다. 나무가 커서 가지나 잎이 시야를 가리지 않았다. 떡갈나무 아래로 개울물이 흘렀다.

저녁 안개가 개울물이 흐르는 곳을 따라 서서히 번져가고, 얼마전에 큰 비가 내렸는지 어디가 계곡인지 알 수 없는데, 나무뿌리 사이로 이곳 저곳에서 개울이 흘렀고, 그 물들이 모여 우리 숙소 앞으로 밀려와, 다시 옆으로 비켜갔다.

조금씩 어두워지면서 나무들 사이로 골안개가 피어올랐고, 그 안개 밑으로 개울물에 부딪혀 반짝대는 자갈소리가 깔렸다. 음머~하는 소울음 소리가 우리의 가슴을 적셨다. 우리는 창에 턱을 대고 마지막 빛이 꺼질 때까지 산과 계곡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고즈넉하고 아름답네요.”하고 지영이 내게 말한 후, 한숨을 쉬더니 스르르 쓰러졌다.

놀라서 지영을 품에 안자, 목과 얼굴에 열이 꽉 들어차 있었다.

지영을 자리에 눕히고 전날 영암에서 사두었던 감기약을 먹였다. 방에 불을 따뜻하게 지펴달라고 하고, 지영의 식은 땀을 닦아내며 밤을 새웠다. 지영은 간혹 눈을 뜨고 나에게 미소를 보낸 후, 다시 잠에 들곤 했다.

새벽이 되어 깜빡 졸았다.

깨어났을 때, 지영은 창틀에 턱을 괴고 계곡을 보고 있었다.

“이제 좀 나아졌어?”

“아~ 산골의 아침이 이렇네요. 어느 나라의 산천이 이런 아침을 그려낼 수 있을까요?”

창 밖 계곡 사이로 골 안개가 꽉 차 있었고, 안개의 밑으로 개울물이 돌돌거리며 흘렀다. 그 안개 속을 뚫고 날아온 아침 햇살이 개울에 부딪혀 반짝반짝 빛났다. 이미 지기 시작한 낙엽이 빗물에 젖어 삭아가는 냄새가 골을 꽉채웠다. 시월이 가는 산촌의 아침은 추웠다. 멀리서 닭이 우는 소리가 안개 속에서 들려왔다.

지영은 피곤한 듯 자리에 누웠다. 창문을 닫으려 하자 그대로 놔두라고 했다. 자리에 누운 지영은 기운이 없는 듯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창 밖을 내다보거나, 슬픈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 내가 보면 애써 미소를 떠올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민박집 주인아주머니에게 죽을 좀 쑤어달라고 하여, 지영에게 먹였다.

오후가 되자 기운을 차린 지영이 봉암사로 가자고 했다. 햇살이 좋았다. 숙소에서 조금 올라가자 봉암사였다. 산문은 닫혀 있었다. 아쉬움에 다시 민박으로 돌아왔더니 정진도량이라 정월 초하루, 사월초파일, 백중이니 하는 날만 문을 연다고 했다.

지영의 몸 상태가 안좋아 민박집 앞 떡갈나무 아래에서 해바라기나 하라고 하고, 나는 그 앞 개울에서 지영에게 줄 조약돌같은 것을 찾았다. 가을 햇빛이 좋아서 들과 물 밖으로 들어난 자갈들이 조용히 익어가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저녁이 왔다.

저녁 밥을 먹고 나자, 지영이 피곤하다며 먼저 누웠다. 약간 미열이 있었지만, 그런대로 괜찮아 보여 약을 먹이고, <지상의 양식>을 펼쳤다.

지영의 자는 모습이 편했고, 숨소리가 편했다. 조금 열어논 창으로 스며드는 밤공기 속에 개울물 소리가 가득했다.

늦잠을 잤다.

아침에 깨어보니 지영이 없었다. 몸이 나아져 아침 산보라도 간 것이 아닐까 밖으로 나가 이곳 저곳을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새댁 아침 버스로 읍네 간다데. 장 좀 봐와야 겠다며, 깨우지 말라카데?”

지영이 옷을 갈아입고 방 안을 치운 듯, 긴 치마는 벽에 걸려있었고, 화장품과 짐들이 가지런했다.

지영과 함께 여행을 한 후, 처음으로 홀로 있게 되었기에 금새 지영이 보고 싶었다. 버스가 오는 소리가 나면 창문을 열고 지영이 내리는가 바라보았다. 하지만 인가가 별로 없는 종점에서 내리는 사람은 한명 또는 두명이었고, 그들은 계곡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사라졌다.

오후 네시가 되어 가은으로 갔다. 좁은 가은 읍네 곳곳을 둘러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막차를 타고 다시 돌아왔다.

지영은 없었다.

걱정을 하는 주인 아주머니에게 너무 걱정말라며 방으로 들어가 창문을 열었다. 나는 땅거미가 내리는 길 위로 눈을 주었다. 산새가 깍꿍하고 울었다. 외로웠다. 그리고 지영이 안올까 나를 떠나버린 것이 아닐까 무서웠다.

밤이 깊었지만, 길 위로 헤드라이트 불빛이 떠오르지 않을까 혹시 지영이 터덜터덜 밤 길을 걸어오지 않을까 창문을 열고 기다렸다.

밤이 깊어갈수록 방 안의 육십촉 전등은 노랗게 빛나며, 어둠을 사위고 있었다.

지영의 짐을 풀고 무슨 단서가 없을까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영이 입었던 옷가지며, 속옷까지 고스란히 있었고 별다른 점이 없었다. 가은에서 누구에겐가 납치된 것이 아닐까? 혹시 예전의 남자친구를 만나 둘이서 어디로 떠난 것이 아닐까?하는 벼라별 생각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방바닥에 놓여 있던 <지상의 양식>이 발끝에 걸렸고, 책 사이에서 접혀진 종이가 삐죽나왔다.

지영의 편지였다.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유리알 유희 08.12.17. 01:39
    헉! 드디어 반전이… 다 읽고 싶은데 아들넘이 자꾸 나가 달라네요. 제 방에는 컴이 없거든요. 쩝!
    ┗ 旅인 08.12.17. 11:33
    저희 집에는 3대나…
    ┗ 다리우스 08.12.17. 12:42
    헉 반전,,,!
    ┗ 유리알 유희 08.12.17. 13:30
    여긴 두 대요. 딸, 아들, 유리알은 늘 동냥이지요.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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