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로 가다

5월 10일 날이 맑았다. 상해의 서쪽 칭푸(靑浦)구 쪽에서 남경 쪽으로 난 호녕고속도로에 오르니 장강 델타는 끝없이 펼쳐지고, 곳곳에 수로와 공장들이 보인다.

소주로 들어가는 입구가 이유없이 막혀, 가이드는 한 시간이나 이곳 저곳을 드나든 끝에 간신히 소주시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산사로 갔다.

寒山寺

당나라의 시인 張繼가 살았던 시절은 어떤 때였을까? 그의 ‘단풍나무 다리에서 보낸 어느 밤'(楓橋夜泊)이라는 시의 내용은 이러하다.

달마저 진 밤, 까마귀는 울고 서리는 온 세상에 가득한 데, 강변 단풍나무와 고기잡이 불빛을 마주하고 시름에 젖어 잠을 잊었다. 고소성 밖의 한산사의 깊은 밤 종소리는 뱃전에 와 닿는구나.

月落烏啼霜滿天
江楓漁火對愁眠
姑蘇城外寒山寺
夜半鐘聲到客船

이 시에는 희망이 없다. 어느 낯선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 데, 어둡고 춥고 불길하며 붉게 물든 단풍나무가 늘어선 운하에는 먹고 살자고 한 밤 중에도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들을 보자 더 이상 잠들기도 어렵다. 그때 멀리서 울린 범종소리는 그의 시름에 무슨 답을 했을까?

한산사는 소주(고소성)에서 멀리 떨어진 산에 있는 절이 아니다. 소주 시내에 흐르는 운하와 수로 옆의 평지에 지어진 절이다. 그리하여 장계의 시름을 느낄 만큼 조용하거나 한산하지 못하다. 한산사가 유명해진 것은 한산사 그 자체 때문이라기 보다, 장계의 이 시 한 구절 때문이리라. 평지에 지어진 절은 전각이 많아 좁고, 관강객은 많다.

단지 볼 것이라곤 한산사와 관련된 碑銘의 탁본들 정도다. 관광객을 위하여 울리는 한산사의 종소리는 우리의 종처럼 울림이 깊고 웅장하지 않다.

아버지는 절 가운데 높은 전각은 남경대학살에 대한 사죄로 일인들이 지은 것이라고 하신다.

출구를 나올 때, 아내의 썬글라스를 누군가 훔쳐갔다.

拙政園

중국 4대 원림 중의 하나인 졸정원 또한 명나라 때 건축되었다. 전문은 알 수 없으나 晉나라 때 潘岳의 <閒居賦> 중 灌園鬻蔬 以供朝夕之膳 是亦拙者之爲政也(들에 물을 대고 채소를 길러 아침 저녁으로 찬을 삼으니 이 또한 어리석은 사람의 다스림이 아니겠는가?)에서 졸정원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졸정원의 자리는 본래 삼국시대의 陸績, 당나라의 시인 陸龜蒙의 집이었고 원나라 때 大弘寺 터였는데, 명나라의 어사였던 王獻臣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지었다고 한다.

상해의 예원은 전각과 기물들의 품격이 높고 정원 조성이 몹시 인공적이며 조밀한 데 반하여, 졸정원은 그 터의 자연경관에 전각들을 배치한 듯하다. 그래서 전각과 기물들은 예원에 비하여 다소 처지는 듯하여도 정원의 배치가 좀더 자연스럽고 시원하여 여유가 있다.

潘允端이 졸정원을 보고, 더 멋있는 원림을 꾸미겠다고 한 것이 예원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정교하지만, 자연미와 여유를 상실한 것이 아닌가 싶다.

왕헌신이 이 정원을 지은 후, 그 아들이 하룻밤의 도박으로 날려버렸다고 한다.

사기열전 태사공 자서에 ‘뛰어난 장수의 집안에 3대째가 되면 반드시 용렬한 장수가 나온다. 뛰어난 장수는 당대에 무수한 사람을 죽였으니 그 화가 어찌 후손에 미치지 않겠는가?’ 라고 쓰여있다.

왕헌신이 벼슬을 할 때, 가렴주구 축재를 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정원을 지었을까? 과연 그가 채소나 길러 반찬이나 삼겠다고 이 정원을 지었을까?

백성의 고혈을 빨아 정원을 지었다면, 그 화가 큰 바, 그 재산은 산산히 흐트러짐이 마땅한 것이다.

이 졸정원이 홍루몽의 무대라는 말도 있으나, 그 출처나 기록을 아직 찾지는 못했다.

虎丘山

오나라는 본시 荊蠻(양자강 중하류에 사는 오랑캐)이며, 勾吳國에 속했다.

사기의 태백세가를 보면, 太伯은 주나라 太王(고공단보)의 큰 아들이라고 한다. 태왕이 막내 季歷이 현명하고, 계력의 아들 昌(文王)에게 성스러움이 있어, 막내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창에 이르기를 바란다는 것을 안다. 태백은 바로 밑의 동생 仲雍을 데리고 형만으로 도망을 가서 문신을 하고 머리를 자름으로써 왕이 될 수 없음을 계력에게 보인다. 이래서 계력이 할 수 없이 왕위에 올라 王季라 하고, 결국 창은 문왕이 된다. 태백은 형만으로 가서 구오라고 하고 다스리니 그를 따르는 백성의 수가 천여집이었다고 한다.

주나라 초기에 武王이 상나라를 멸한 후, 태백의 5세손인 周章을 吳子라 하여 오나라를 열국에 봉한다.

그 후 태백 19세손인 수몽이 왕이라 칭했고, 수몽 25년(BC561) 수도를 지금의 소주에 정한다. 그 후 합려 원년(BC514)에 지금의 소주성인 합려대성을 오자서가 축성한다. 합려의 아들 부차 23년(BC473, 월왕 구천 24년)에 월나라가 쳐들어와 오나라는 망하고 만다.

합려에게 오나라가 멸망을 하고 부차가 자결하는 이 무렵은 춘추에서 전국시대로 접어드는 시기다.

이 시기는 청동기 체제에서 본격적으로 철기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춘추오패는 환공/齊, 문공/晉, 장왕/楚, 합려/吳, 구천/越 (때로 양공/宋, 목공/秦, 부차/吳 등이 포함되기도 함)으로 합려와 구천이 들어가 있다.

당시의 무기경쟁을 보면 오왕 합려는 간장과 막야로 하여금 검을 만들게 했고, 구천은 구야자로 하여금 검을 만들게 하는 등 군비경쟁이 치열했다.

중국의 전설적인 명검은 간장, 막야 및 구야자의 담로, 거궐, 승사, 어장, 순구 등인 바, 다 오월이 싸우던 춘추시대의 말기에 생산된 검들이다.

오랑캐의 땅인 오나라와 월나라에서 춘추오패 중 두사람이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이곳에서 철기생산이 빨랐거나 질좋은 철제무기를 대량으로 생산했고 여타 제후국보다 군비경쟁에서 앞서갔다는 반증이다.

호구산은 합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호구산의 정상에 바로 아래 검지(劍池)가 있는 데, 이 곳에서 300여개의 검을 발굴했다고 한다.

호구산에는 시검석이 있는데 바위가 마치 칼에 베어진 듯 두쪽이 나있다.

그 위에 시검석(試劍石)이라고 쓰여 있고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據志書記載 春秋時期吳王闔閭令 干將 莫邪 鑄劍 成而試之. 又傳秦始皇掘得吳王殉劍而試之. 石刻隸書 “試劍石” 三字, 爲宋代紹聖年間 呂昇卿所題 久已毁後來由僧人逸溪重書

역사서와 책에 기재된 바에 근거하면, 춘추시기의 오왕 합려가 간장 막야에게 검을 주조하라고 명령한다. 검이 완성되자 이를 시험해보았다고 한다. 또 전하기를 진시황이 오왕과 함께 묻었던 검을 발굴하여 이를 시험해보고 시검석 삼자를 예서로 바위에 새겼는데, 송대의 소성년간이 되어 여승경이 題(이름을 붙이다)한 지 오래되어 이미 훼손된 바, 후인 중 일계로 하여금 다시 쓰게 하다.

이 글에서 번역 상 문제점이 있는 글은 간장 막야에게…이다. 원문을 보면 간장에게 명하여 막야를 주검토록 했다고도 번역할 수 있다. 간장과 막야는 부부다. 전설에 의하면 둘이 합려의 명을 받아 검을 만들 때, 좋은 철이 나오자 않아 검이 잘만들어지지 않자 순철을 뽑기 위하여 부인 막야가 쇳물 속으로 뛰어들었고, 마침내 간장은 순철을 뽑아 명검 두자루를 만든다. 하나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간장이라 했고, 또 한자루는 부인의 이름을 따서 막야라고 했다. 간장은 자신의 이름을 딴 간장은 숨겨두고 막야만 합려에게 진상했다고 한다.

철기시대가 도래했다고는 하나, 아직 철이 질기거나 강도면에서 모자라는 지 劍에 대한 이야기만 있을 뿐, 면이 넓고 휘어져 사용하기가 편한 刀에 대한 언급은 이 시기까지 보이지 않는다.

소동파가 소주에 와서 호구를 둘러보지 않는다는 것도 한탄스런 일이다(到蘇州而不遊虎邱, 乃是憾事)라고 한 호구산은 불과 해발 34.3M에 불과한 야트막한 산이다. 그러나 장강 델타의 평원에서 바라본 호구산은 웅장해 보인다. 장강의 델타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바다 속의 조그만 섬이었다고 한다. 장강의 토사가 쌓여 바다를 들로 변한 이후 海湧山(바다에서 용출한 산)이라고 했으나, 합려가 묻힌 삼일 후 하얀 호랑이가 묘 위에 머물러 호구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산정의 전탑인 운암사탑을 둘러 본 후, 들을 내려다 보니 일망무제, 오나라의 땅은 점점 저물어가기 시작했다.

합려를 도와 오나라를 강국으로 만든 오자서의 말,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日暮路遠)를 떠올리며 호구에서 주장으로 간다.

周庄의 水路

소주에서 다시 차를 돌려 昆山을 지나 서쪽 주장으로 갔다. 가는 길에 호수들이 보인다. 호수가에 공원처럼 꾸며놓은 곳이 있는데, 그곳이 주장이다.

약 천년전의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만삼수(萬三水)라는 호수에 흙을 부리고 토대를 쌓더니 집을 짖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수 안으로 한채씩 집들이 늘어났다. 그 후 골목이 생기고 호수 다른 쪽에 동네가 생기고 그 사이로 수로가 만들어지고 수로 사이로 쪽배가 드나들었고, 이쪽 동네와 저쪽 동네 사이에 다리가 생겼다.

왜 이들은 이 곳에 그렇게 어려운 과정을 겪어가며 서식했을까?

나는 알 수 없다.

늘 타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이해하기란 어렵다.

천년 아니 수백년이 지나자 주장은 수로 사이로 길이 생기고 나무가 자라고 물에 촉촉히 젖어드는 아름답고 흔쾌한 마을이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이 만든 수공예품을 사가거나, 돼지족발을 사먹고, 수로 사이를 지국총 저어가는 배를 타고 배삯을 냈다.

8인이 타는 뱃삯은 80원, 사공에게 20원을 주면 민요를 세곡 부른다. 80원의 배삯의 절반만 수입으로 치고, 노래를 부르면 60원이다. 하루 열번의 관광객을 실어나고 한달 20일 노를 젖는다면 12,000원 수입이다. 상해의 공장노동자가 한달 1,600원의 벌이를 한다고 볼 때, 상상을 초월한 벌이다.

주장의 수로에서 바라보는 작은 마을의 풍경은 관광객들로 붐벼도 아늑하고, 집과 다리 그리고 물가에 자란 나무들로 아름답다.

해가 졌고, 우리는 짧은 관광을 마치고 상해로 돌아간다.

2008.05.10일의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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