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에서 쓰는 이야기

동생을 만날 겸 상해와 소주 구경을 할 겸, 식구들과 상해로 갔다.

상해임시정부(1919~1932)

上海의 불란서 조계지에 있던 馬當路 306弄 4號, 상해임정의 좁다란 2층 주석실 한 쪽에 놓여있는 누추한 침상을 보았을 때, 과연 정부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지켜야 할 인민도, 국경도, 주권도 없는 임시정부가 가진 것은 기약없는 미래에 대한 희망 뿐이었지만…

햇볕도 잘 들지 않는 두세평 남짓의 주석실로 날아드는 소식이란, 욱일승천하는 일장기의 붉은 히노마루(日の丸)와 기미가요의 노래가락 뿐이었다.

기약할 것 없는 미래에 대한 절망과 같은 희망을 밟고, 상해에서 杭州, 嘉興, 南京, 長沙, 廣州, 치江, 鎭江, 柳州, 桂林, 重慶을 지나 주석은 마침내 조국으로 돌아온다.

서너평 짜리의 주석실에서, 북악의 기슭에 있는 청와대를 생각한다.

1925년 임시정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했다. 그로 인하여 임정요원들로 부터 탄핵당하여 대통령직에서 쫓겨난다. 그는 해방의 해에 급거 귀국, 미국을 등에 업고 대통령으로 복직한다.

그 후 세월이 지나 지금에 이르른다. 영토와 국민과 주권이 다 갖추어진 지금 우리의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自主國家인가?

홍구공원의 梅亭에서

1932년은 어떤 해였을까? 어떤 해였길래 24살의 젊은이가 죽기를 각오하고 폭탄테러를 자행했을까?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테러라고 우리가 말할 때, 지금도 중동 및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테러란 단지 애국과 애족의 발로이며, 윤의사가 우리에게 그러하듯 저들에게는 늘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역사임을 알 수 있다.

사나이 뜻을 세워 집을 나가면 공을 이루지 않고서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리(丈夫出家生不還)라며 떠난 그는 결국 유골로 돌아왔다.

노신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홍구공원에서 노신의 무덤은 보지 못했다.

豫園

상해의 역사는 땅의 역사만큼 길겠지만, 호(滬: 대나무로 만든 낚시도구)라고 불리우는 만큼 장강 델타의 끄트머리에서 고기잡이나 하던 빈한한 어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록 상에도 별다른 이야기가 없다. 아편전쟁 이후 호먼조약(1843.10월)에 의거, 1843.11.17일 정식 개항을 선포하고 이후 100년 동안 조계지와 항구로 성장해 왔다는 정도이다.

예원은 얼마 안된 상해의 역사를 돌아볼 때, 이례적으로 오래 된 정원이다.

이 정원은 사천성의 포정사를 지내던 潘允端이 1559년에 짖기 시작하여 1577년에 완성했다. 豫悅老親(늙으신 부모님께 화목한 즐거움을 드린다)의 의미로 <豫園>이라고 했다.

완성되기 전에 부친이 돌아가셔서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다고 하는 이 정원은, 일개 지방의 관리가 지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화려하고 넓다. 많은 사람들의 고혈로 지어진 효도라는 것이 마땅할 것인지?

중국의 정원은 높은 담으로 정원이 구획 구획 잘려져 있어 방대한 정원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골목 골목 좁다.

정원을 보며, 탐관오리들이 창궐했던 명나라의 말기를 생각한다.

이 예원의 담벽을 타고 용이 꿈틀거리고 있었으며, 송 휘종의 花石綱 유물인 玉玲瓏이 정원 중에 있다. 이 옥령롱을 정원에 세워놓고 그는 이렇게 쓴다.

       가슴에 품고 있으니 크게 기쁘도다! (懷中大快)

왕이 완상하던 석물을 얻어 기쁘다 한, 그의 가슴 속에는 역심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상해구경

그동안 몇번 상해를 스쳐지나긴 했지만, 상해를 둘러볼 기회는 없었다. 상해의 다운 타운의 일부분만 발전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푸동(浦東)과 푸시(浦西) 모두 발전해 있었고, 평원에 위치한 시는 동과 서로 점점 건물, 공장, 상가를 지어가며 확장되고 있다.

동생이 사는 아파트는 포동에서 인기가 있는 아파트인데, 63평에 우리 돈으로 13억(850만 RMB)을 호가한다. 백화점의 품격은 우리나라보다 격조가 높고, 외국제 명품의 가격은 한국보다 비싸다.

그나마 나은 것은 손으로 만드는 수제품은 값이 싸고, 음식의 가격은 싸다.

황포강에서 배를 타니 푸시 쪽으로는 과거 조계지의 오래된 서양식 건물이 즐비하고, 푸동 쪽으로는 현대식 건물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고 있다.

travelfrom20080509to20080512

This Post Has 6 Comments

  1. 위소보루

    제가 상해를 여러번 다녀보았지만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정말 대단하시다는 말씀밖에 안 나오네요. 정말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이 이렇게 와닿기는 처음인데요

    여인님의 글을 보고 있으면 뭐랄까, 지식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것으로 체화가 되어 글이 된다는 그런 느낌을 받게 됩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제가 쓰고 싶어하는 글의 모습에 가까워서 항상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옵니다 ^^

    여행기가 사진 한장 없이 이렇게 좋은 글이 될 수 있구나 라는 것을 배우고 갑니다

  2. 여인

    중국에 대한 관심은 아주 어렸을 적 김훈씨의 아버지인 김광주씨가 번역한 무협소설 <사자후>에서 부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 후 중국 역사소설을 많이 읽다보니 이것 저것 알게 되었는데, 출장으로 중국을 가도 제가 보는 것이라곤 사무실과 호텔 주변 뿐이라서 늘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면 자료도 조사하고 하면서 중국에 대한 알음알이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3. 쏘울

    햇볕도 잘 들지 않는 두세평 남짓, 누추한 침상…….
    중경 임정 모습과 다를바 없군요.

    그리고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더군요.

    1. 여인

      주석께서 그 비좁은 주석실의 창가에서 기와지붕으로 잘린 하늘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시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조국에서 온 젊은이들을 먹여살리는 걱정만으로도 주석의 근심은 깊었다고 합니다.

      그런 와중에 안휘성 출신의 삼합회 두목이 상해에서 자리잡기 위한 일환으로 모종의 이벤트를 기획하였고, 임정으로 와서 자금을 대줄테니 거사를 치르자고 해서 윤봉길의사가 홍구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투척했다고 하더군요.

      이 일이 있은 후 중국 전역으로 민족의식이 고취되긴 했지만, 우리는 일경을 피해 임시정부를 계속해서 옮겨 결국 중경에서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군요.

  4. 쏘울

    안휘성 출신의 삼합회 두목의 역활이 작용했다는 비사는 처음듣는 얘기인듯 합니다.
    제가 관심이 없어 그랬는가는 몰라도요.

    1. 여인

      저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기 때문에 확실치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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