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의 항주행

1월 10일 새벽, 깨어났을 때, 어느 호텔방 침대 위에 나는 휴지처럼 뒹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청도에서 두시간 가량 떨어져 있는 르자오(日照)의 어느 식당에서 백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니까 1월 9일 21:00분경 필름이 끊어졌다는 이야기다. 고객은 조그만 와인잔에 52도 짜리 백주를 들이붓고 나에게 세번 꺾어 마시는 법이라고 했다. 첫잔을 그렇게 마신 후, 그들은 간빼이(乾杯)를 외쳤다. 알콜도수로 칠 때, 맥주 글라스 분량의 소주가 목구멍을 몇번이나 통과한 셈이다. 필름이 끊겼다기 보다는 그만 실신을 했으리라.

몸이 말을 듣지 않았으나, 08:00분 항주(杭州)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비틀비틀 세수를 하고 호텔을 벗어나, 공항에 가서 발권을 하고 간신히 게이트에 당도했을 때, 중국의 모든 도시로 날아가는 비행기는 결항 또는 지연이었다. 안개때문이다. 어제 인천에서 청도로 들어올 때도 09:55분 비행기는 결항되고 13:10분 비행기를 타야만 했다.

항주로 가는 하늘이 언제 뚫릴 지 몰라 게이트 앞의 의자에 몸을 걸친 채 자고 또 잤다. 점심 때 즈음에 게이트가 열렸고, 항주에 내렸을 때 거의 오후 세시가 되었다.

공항 출구를 나섰을 때, 상해의 현채인은 상해-항주 간 고속도로가 안개 때문에 폐쇄되어 오질 못했다고 한다. 차를 타고 항주시를 지나 어디론가 갔다. 항주를 지나자 고속도로가 막혔다. 그 김에 차에서 내려 고속도로 위에서 담배를 피웠다.

항주가 보고 싶었다. 서호가 보고 싶었다. 위에는 천당이 있고, 아래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고 하는 데, 나는 소주와 항주에 한번도 가보질 못했다.

오월이 피튀기게 싸우던 곳이 강동의 이 절강성이 아니던가? 특히 항주는 吳의 수도인 소주(蘇州)와 越의 수도인 소흥(紹興) 사이에 위치한 바, 전장의 한가운데 놓여 있던 셈이다.

오나라와 월나라는 춘추시대 장강의 동쪽에 웅거하던 제후국도 아닌 초라한 약소국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문신이나 뜨고 하던 야만족이었다. 장강 이북에서 열강들이 각축을 벌이는 동안, 오나라는 뽀작뽀작 커서 제후국이 되었고, 합려 때가 되어서는 지금의 소주(蘇州)에 수도를 세우고 오자서와 손무를 기용하여 크게 번성하여 초나라의 수도 영을 공략하고 춘추오패의 반열에 올랐다. 월나라는 지금의 절강성 소흥(紹興) 일대에 살던 어월(於越), 문랑(文郞)이라는 두 야만족이 세운 나라로 겨우 윤상의 때에 이르러서야 초나라와 외교를 펼쳐가며 나라 꼬라지를 갖추었다.

이 두나라는 지금 항주의 절강(현 전당강) 유역을 놓고 늘 티격태격 했고, 대충 오나라가 이기곤 했다. 그러다 그만 오나라의 합려가 윤상의 아들 구천과 일전을 벌이다 다친 상처가 도져 그만 죽고 만다. 합려의 아들 부차가 절치부심 국력을 키워 회계산에서 구천에게 이겼다. 월왕 구천은 부차에게 항복하여 와신상담, 결국 오나라를 무너뜨리고 부차는 고소산(소주의 남양산)에서 자살을 함으로써 오나라는 망하고 만다.(BC473) 이로써 춘추시대가 막을 내린다.

오를 무너뜨린 월나라는 세력을 확장하여 북으로는 산동, 남으로는 복건성과 대만, 동쪽은 동해, 서쪽으로는 안휘성 남부, 강서성 동부에 이르러 영역이 동남에 이르렀다.(越國滅亡吳國後 越國的勢力範圍 在一段時間內 北端到達山東 南邊入閩台 東瀕東海 西達皖南 灨東 雄踞東南) 월나라는 이렇게 융성하던 중 초나라를 공격했고, 그 후 초나라는 월나라에 내란이 있는 틈을 노려 월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킨다.(BC306)

이후 월나라의 유민들이 남부 일대로 흩어지니 지금의 복건성, 광동성, 광서성에 이른다. 이들을 민월(閩越), 백월(白越: 粤)이라 하며, 지금의 복건성 사람, 광동성과 홍콩사람들이 그들의 후예다.

그러니 지금 절강성과 강소성에 사는 사람들이란 누구인가? 초나라 사람이 아닌가? 항우는 강소성 사람임에도 초나라 사람이라고 했다. 그 후 강소, 절강이 장강의 동쪽이라서 강동이라고 했고, 후한 삼국시대에는 吳라고 다시 불리워진다.

항주는 오 월 남송의 수도였고, 절강성 일대는 양잠이 성하여 비단의 산지일 뿐 아니라, 龍井茶의 산지이다. 한국의 차는 우전(雨前: 4/20일 곡우 이전 차잎을 땀)이 최상이나, 날씨가 우리보다 따스한 항주에서는 명전(明前: 4/5일 이전 청명 이전 잎을 땀)을 최상으로 친다. 이러한 관계 상 실크로드(絲綢之路)는 난주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여기로 부터 시작하는 셈이다. 게다가 이 항주일대의 절강성은 미인의 고향이다. 서시, 초선, 왕소군, 양귀비 등이 이 곳 출신이라고 한다.

주나라의 유왕(幽王)은 자신의 총희 포사(褒似)의 웃음을 보고 싶어했다. 포사는 태어난 후 한번도 웃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잘못하여 봉화가 피어올랐고, 오랑캐의 침입이라 염려한 제후들이 몰려들었다. 봉화가 잘못된 것을 안 제후들이 터덜터덜 돌아가는 것을 보자 포사는 웃었다. 포사의 웃음을 또 보고 싶은 유왕은 다시 거짓 봉화를 피웠고, 다시 몰려든 제후들은 투덜투덜 돌아갔다. 그 후 견융(犬戎)이 서쪽에서 들어와서 봉화를 피웠으나 제후들은 오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주나라는 서안을 중심으로 한 서주시대를 마감하고, 낙양으로 천도하여 동주시대를 열었다. 주나라의 국력이 피폐함에 따라 제후국들이 분기하여 쟁패하는 춘추시대가 열린다.

그래서 후세의 사가 공자는 말한다. 믿음이 없이는 설 수 없다(無信不立). 자공이 공자에게 정치가 뭡니까? 하니, 경제, 국방, 정치에 대한 믿음이라고 한다. 자공이 이 세가지 중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버릴 것이냐고 하니, 공자는 국방이라고 한다. 다시 또 하나를 버린다면? 경제라고 대답한 뒤, 예전부터 사람은 다 죽었다. 그러나 믿음이 없다면 설 수가 없다(주)고 말한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월나라의 범려는 서시(西施)를 오왕 부차에게 바친다. 서시는 가슴앓이가 있어 때때로 가슴을 부여잡고 눈을 찡그렸다고 한다. 가련해서 인지 몰라도 서시가 찡그리면 남자들의 다리가 흔들릴 정도로 매혹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못난 여자들도 서시처럼 눈을 찌푸렸는데 그 모습이 끔찍했다고 하여 서시빈목(西施嚬目)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서시에게 빠져 오나라가 멸망했고,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들어선다. 서북의 여인의 웃음과 동남의 여인의 찌푸림이 지닌 아름다움은 가히 나라를 들었다 놓았다 할 만한 것인가 보다. 그러나 서시, 초선, 왕소군, 양귀비의 일생은 또 어떠했던가?

여기에서 중국판 춘향 혹은 황진희, 소소소(蘇小小)의 이야기를 해 보자.

소소는 위진남북조의 南齊(AD 479∼502) 때의 항주에서 태어난 여인이다. 집이 가난하여 일찍 홍등가에 팔려갔다. 그러나 미모와 문장은 항주 일대에 떠들썩 했다. 그러던 중 당시 재상의 아들 완욱(阮郁)을 한번 보고 반하여 들으라고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고 한다.

저는 유벽거를 타고 있는데
그대는 청총마를 타고 있군요.
어디에서 마음을 맺을 수 있을지
서릉 솔잣나무 아래에서나…
妾乘油壁車
郞跨靑聰馬
何處結同心
西陵松栢下

이 정도면 서릉의 소나무 숲 아래 벤치에서 만나 포옹(結同心: 가슴을 하나로 묶자)을 하자는 노골적 프로포즈인 셈이다. 여하튼 완욱은 소소를 만났고 둘은 결혼하자고 하기까지 이르렀다. 완욱의 아버지 완도가 “시방 너 머라고 씨부렸냐? 룸싸롱에 나간다고? 너 마자 주글래?” 하고 완욱을 建康(남경)으로 보낸다. 그 후 소소는 문을 닫아걸고 칩거한다. 그 후 지나던 중국판 변학도(맹랑: 관찰사)가 술 시중을 들라 한다. 소소가 그를 거부하자 죽이겠다며 지랄을 하다가 “네가 시를 잘 짖는다 하니 시가 나한테 흡족하면 용서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소소는 시를 짖는다.

매화가 오만한 기운이 있다하나
어찌 감히 봄이 춥다고 덤비리오.
만약 홍백으로 나뉘었다면
어찌 푸른 눈으로 바라보리오?
梅花雖傲骨
怎敢敵春寒
若還分紅白
還須靑眼看

제가 술 시중에 들지 않은 것은 사또의 위세를 깔본 것이 아니고, 완적(阮籍: 죽림칠현 중 하나)처럼 사또를 백안시(눈동자를 딴 곳으로 돌려 흰창만 보임. 즉 싫어하는 사람과 상대하지 않겠다는 것)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가 있어서 사또를 똑바로 모실 수 없다(靑眼: 완적의 눈은 파랬던 모양임)고 말한 셈이다.

이에 풀려났지만, 병약했던 소소는 그만 열아홉의 꽃다운 나이로 서령교 부근에 묻어달라며 죽는다.

27세로 요절한 당나라의 귀재인 李賀는 蘇小小墓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그윽한 난초 이슬은
눈물을 머금은 눈동자 같은데
마음을 함께 맺을 것이 없구나
봄 경치는 차마 딸 수도 없고
잔디는 보료가 되고
소나무 그늘은 덮개와 같아
바람으로 치마를 삼고
물은 옥패가 되는데
유벽거를
저녁까지 기다려보지만
차가운 비취불만
헛되이 빛이 바래고
서쪽 언덕 아래로
바람이 비만 내리네.
幽蘭露
如啼眼
無物結同心
煙花不堪剪
草如茵
松如蓋
風爲裳
水爲珮
油壁車
夕相待
冷翠燭
勞光彩
西陵下
風吹雨

마음을 함께 할 완욱도 소소도 없고(無物結同心), 관찰사 맹랑(혹은 자신)이 봄 경치(煙花 : 기생의 의미도 있음)를 감히 딸 수가 없는 데, 서릉교 옆 西湖에서 잔디에 앉아 유벽거를 타고 오는 소소를 기다려보지만 밤이 되자 燐불(도깨비불)만 떠다니고 비바람이 분다고 이하는 노래한다.

서호의 서쪽에는 악비의 무덤(岳王墓)이 있다고 한다. 제갈공명과 관우의 명성 때문에, 악비는 가려져 있지만, 악비야 말로 우리의 이순신 장군에 비견될 중국 최고의 명장이다. 금나라에서 ‘태산은 움직여도 악가군은 움직일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 악비는 평민출신으로 열아홉에 하급무관으로 군문에 들어가 연전연승으로 계속 진급을 하여 장군이 되었고 진회 등의 참소로 독약을 먹고 죽은 후, 후인에 의하여 악왕으로 추존된다. 지금 성도의 제갈 무후사에 걸려 있는 출사표의 글씨도 악비의 글씨라고 한다.

도로가 뚫렸고 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차는 임안(臨安)에 들어섰다. 임안시로 들어서는 곳에 언뜻 오월교전지(吳越交戰地)라는 간판을 본 것 같다. 임안의 이름이 떠올라 찾아보니, 1126년 금나라 군대가 遼 일대를 장악한 후 남진, 북송의 수도인 개봉을 점령하고 휘종과 흠종을 잡아갔다.(靖康의 變) 이에 흠종의 동생인 강왕(康王) 趙構가 1127.5월 임안에 도읍을 정하고 남송(AD 1127~1279)을 세웠다고 한다.

임안 시내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식당에 들어가 자라탕과 그 지방의 토속음식을 먹었다. 나처럼 중국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약간은 역했다. 식사 후 밤 안개가 도로 위에서 춤추는 고속도로를 따라 상해로 상해로 달려갔다.

주석 보기…

子貢問政. 子曰 足食, 足兵, 民信之矣. 子貢曰, 必不得已去於斯三者, 何先? 曰 去兵. 子貢曰, 必不得已去於斯二者, 何先? 曰 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논어 안연편)

참고 열기…

吳, 周諸侯也, 始吳太伯. 太伯, 周太王長也, 弟季歷賢, 有聖子昌, 太王欲立之. 太伯, 弟仲雍乃餎荊蠻, 斷髮文身, 示不可用, 以辟季歷. 季歷及昌果立. 太伯之餎荊蠻, 自號句吳, 荊蠻義之, 從之千餘家. 傳至周章, 武王克殷, 求太伯遺裔, 周章已君吳, 封之. 別封其弟虞仲於周之北故夏墟, 列諸侯.

春秋末, 吳嘗霸, 南降越, 西入楚郢, 北上徐州會諸侯. 王夫差自大, 伍子以死諫南防, 弗聽. 卒爲越乘, 亡.

吴国是中国周朝时的一个诸侯国, 也叫做虞国, 其国境位于今天江苏省南部苏州一带. 吴国的开始不明, 传说周文王的伯父太伯和仲雍为了将他们的王位让给周文王的父亲季历出逃到江南建立吴国. 这个传说的准确性无可考证. 到春秋时期为止, 吴国是中原边上的一个不重要的小国, 有可能吴国到春秋时刚刚开始使用从中原引入的君主制度. 春秋时期, 吴国与中原的诸侯国的交往越来越密切, 也开始与其他诸侯国争雄. 吴王阖闾在今天的苏州建立都城, 任用伍子胥和孙武攻破楚国都城, 成为春秋五霸之一. 阖闾的儿子夫差不顾国家连年征战空虚, 与齐国和晋国争霸, 令伍子胥自杀, 忽视了边界上的越国, 被越王勾践趁虚而入. 前473年, 夫差兵败而逃, 被围困在秦馀杭山(今天苏州南阳山), 向勾践求和, 勾践不准, 並提出將吳王流放甬東(一說勾踐逼迫夫差自殺), 夫差自杀, 吴国灭亡.

越係古代越人所建之國, 越王允常時其國漸強, 故楚國乃聯越以制吳. 前四九六年, 當越王勾踐(前四九七年 — 前四六五年) 即位不久, 即打敗吳國. 兩年後, 吳王夫差攻破越都, 勾踐被迫屈膝投降, 並隨夫差至吳國, 臣事吳王, 後被赦歸返國. 勾踐自戰敗以後, 時刻不忘會稽之恥, 日日臥薪嘗膽, 反躬自問『汝忘會稽之恥邪?』. 他重用范蠡, 文種等賢人, 經過『十年生聚而十年教訓』, 使越之國力漸漸恢復起來. 可是吳對此卻毫不警惕. 前四八二年, 吳王夫差為參加黃池之會, 盡率精銳而出, 僅使太子和老弱守國. 越王勾踐遂乘虛而入, 大敗吳師殺吳太子. 夫差倉卒與晉定盟而返, 連戰不利, 不得已而與越議和. 前四七三年, 越軍再次大破吳國, 吳王夫差被圍困在吳都西面的姑蘇山上, 求降不得而自殺, 吳亡. 越王勾踐既平吳, 聲威大震, 乃步吳之後塵, 以兵渡淮, 會齊, 宋, 晉, 魯等 諸侯於徐州(今山東滕縣南), 周天子使人命勾踐為『伯』(霸). 時『越兵橫行於江, 淮東, 諸侯畢賀, 號稱霸王』但這時, 春秋時代行將結束, 霸政趨於尾聲, 勾踐實乃春秋末期最後的一個霸主. 當勾踐剛剛滅吳稱霸, 其手下最大之功臣范蠡被封上將軍, 然范蠡深知『大名之下難久居』, 『久受尊名不祥』, 故功成立即隱退, 『自與其私徒屬乘舟浮海以行, 終不反』. 傳其改名陶朱公, 後以經商而致富. 范蠡曾遣人致書文種, 謂『飛鳥盡,良弓藏 ; 狡兔死, 走狗烹. 越王為人長頸鳥啄, 可與共患難, 不可與共樂, 子何不去?』文種未能聽從, 不久果被勾踐賜劍自殺.

越国, 是中國歷史上春秋戰國時代的一個诸侯国. 历史上, 在越国的这个位置上, 曾经有「於越」和「文郎」这两个民族, 或者称之为原始部落. 首都在会稽, 轄地大致為現在中國浙江省的紹興. 公元前473年, 越国灭亡吴国后, 越国的势力范围, 在一段时间内, 北端到达山东, 南边入闽台, 东濒东海, 西达皖南, 赣东, 雄踞东南.

公元前312年, 在秦国, 韩国, 魏国 与 楚国, 齐国对峙的时候, 楚国派遣大批军队包围秦兵于曲沃和商於. 越王在这个时候派使者以 “乘舟”(君王乘坐用以指挥作战的大船), 战船三百艘, 箭五万支, 送给魏国以支持魏国. 这些水战所需的军用物资运输到魏都大梁, 一定要从长江经邗沟, 再经淮水和鸿沟, 可推断出当时邗沟和淮水仍然在越国的势力范围之内. 此时越王原要伐齐国, 经齐王使人游说越王, 越不攻齐而攻楚, 被楚打败. 因此楚国图灭亡越国, 消除后顾之忧. 这样做, 也能扩展领土到江东一带. 公元前307年, 秦武王举鼎绝膑而死, 秦国有争立君位的内乱, 在这时, 一时无暇对外兼并, 楚就趁这个时机攻灭越国. 楚国曾派大臣昭滑到越国去调查了5年, 到公元前306年(楚怀王二十三年), 楚国乘越内乱的时候, 把越国灭亡了, 设江东为郡. 之後, 越国王族後裔分散於現在中國南部一帶, 分而治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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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旅인

    유리알 유희 09.03.13. 13:53
    아, 서사가 있는 기행문. 즐독합니다. 역사서를 곁에 두고 쓰시는 걸까. 박식함에 고개를 절래절레 흔드는 유희랍니다. 믿음이 없는 정치, 관계, 그것은 망조의 근원임을 깊이 새깁니다. 그리고 제가 찡그리더라도 절대 서시 흉내를 내는 건 아니니 오해 마시길요. 저 마이너스 시력에다가 이제는 노안까지 흑흑! 안개를 타고 올만에 즐거운 글자여행 합니다. 감사해요. 여인님!

    旅인 09.03.13. 14:30
    요즘 쓸 것도 없고 해서 출장 중에 들렀던 곳(주로 중국)에 대하여 퍼올릴까 하고 있습니다. 사실 출장 중인지라 아무리 좋은 곳을 가도 관광과는 별개로 그 곳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쓰는 글이라 역사서나 전적을 들춰 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기행문이라기보다 제가 알고 있는 것에 새로운 지식을 보태는 정도 밖에 안됩니다.
    ┗ 유리알 유희 09.03.14. 11:58
    늘 뭔가를 쓰려고 하는 자세, 참으로 아름다워 보여서 본받고 싶습니다. 안구건강 챙기시면서 쉬엄쉬엄 쓰시길요.

    더불어숲 09.03.15. 00:12
    항주를 열 번도 더ㅕ 들락거리면서도 여인님 같은 자료나 기행문 한 줄 남기지 못한 1인입니다. 기억나는건 항주의 영은사와 육화탑 소주의 졸정원이 기억납니다. 그런데 왜 중국 하늘은 언제나 흐릿할까요?.매번 가보면 완전한 회색의 도시랄까요. 참 살맛 안 나는 동네. 그저 우리는 신토불이가 최고지요…..
    ┗ 旅인 09.03.15. 17:31
    습기가 많은 곳이라 늘 그런 모양인데, 남북 할 것 없이 모두 흐릿하면 정말 살 맛 안나지요. 그래도 사천성의 중경처럼 겨울이 끝날 때까지 몇개월 하늘을 보지 못하는 곳보다는 낫겠지요. 더불어숲님의 기행문을 기대하겠습니다.

    라비에벨 09.03.16. 20:32
    백안시 그렇게 되는 거군요…소소의 절개 죽림칠현중에도 으뜸이었던 완적과의 그런 스침이 있었군요…역사기행 잘 해봅니다.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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