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사의 고향 장사

長沙는 중국 호남성의 省都다. 오래 전에는 춘추전국 시대에 楚나라의 땅이었고, 중국 현대사에서는 모택동의 고향이다.

중국 문학에서는 북방에 詩(시경)가 있다면 남방에는 楚辭가 있다. 詩는 집단저작물로 작자가 없다. 그래서 공자는 ‘시경의 삼백편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삿된 것이 없다'(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고 한다. 초사는 다르다. 초사는 한나라 유향이 굴원, 송옥 등의 작품을 모아 펴낸 책이다. 그래서 서민의 땀과 애닲은 삶으로 버무려진 시의 세계와 다르다. 신영복 교수는 ‘시경이 사실적이고 노동과 삶과 보행의 정서로 이루어진 시의 세계임에 비하여 초사의 세계는 자유분방, 정열, 상상력, 신비, 환상 등 낭만적이고 서정적이다’ 고 말한다. 여기에서 중국 남북의 문화적 기질 차이가 명료하게 보이며, 굴원이 기록 상 중국 최초의 시인임을 알 수 있다. 이 초사는 후에 漢賦의 전범이 됨은 물론 중국 문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초사의 주인공인 굴원은 초의 회왕에게 진나라와의 연횡은 불가하다고 주장을 하며, 장의를 죽일 것을 간하다가 결국 좌상(좌의정)에서 떨려나와 양자강과 상강 사이를 배회하다 장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멱라수에 투신한다. 그 날이 5월5일 단오(BC278)이다. 그래서 단오절에 사람들이 뱃머리에 용의 머리를 장식한 용선 경주를 벌이고 갈대잎으로 싼 만두를 물고기에게 던져주어 물고기가 죽은 굴원을 뜯어먹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지금 홍콩 중국 등지에서 단오에 龍船祭(Dragon Boat Festival)를 벌이는 것도 굴원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굴원이 죽고 50여년이 지난 후 초는 진나라에 병탄되고 만다.

굴원의 장편서사시 이소(離騷)는 이별을 근심하다와 다가올 재앙 등을 근심한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소에서 보여준 호남의 모습은 온갖 방초가 우거지고, 초세속적인 노래로 가득했으나, 내가 본 장사는 겨울이라 그런 지, 먼지와 안개에 휩싸여 누렇게 내려앉은 대지 위에 낡은 건물들이 무너질 듯 서 있을 뿐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어부가(漁父辭)는 굴원의 <자살이유서>이다. 초사장구에는 “어부가는 굴원이 지은 것이다. 굴원이 쫓겨나 강(양자강)과 상(상수) 사이에서 우수에 젖어 탄식하며 노래함에 모습이 초췌하게 변했는 데, 세상을 피하여 숨어살며 강변에서 고기나 잡고 기분좋게 스스로 즐기고 있는 어부가 개울과 못 등이 있는 곳에서 만나 그 모습을 보고 이상하여 물었고 굴원이 그에 응답한다. 이를 초나라 사람들이 굴원을 추모하여 그 辭(말)을 기록하여 서로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어부와 굴원이 대화를 나누었다고 볼 수는 없다. 굴원은 가상의 인물 어부를 통하여 자신에게 묻는다. “왜 너는 더러운 세상과 함께 하지 못하고 홀로 깨끗하여 결국 쫓겨났느냐?” 그는 이렇게 자답한다.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모자를 손으로 털고, 새로 몸을 씻은 사람은 반드시 옷을 먼지를 터는 법이다. 몸을 이리 살피거능 어찌 외물의 더러움을 감당하겠는가? 상수에 몸을 던져 물고기의 뱃 속에 장사를 지낼 지언정, 하얗고 하얀 것으로 세속의 먼지를 받아들이리오.” 이에 어부는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빨 만하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하며 사라진다.

여기에서 창랑의 물이 맑으면(滄浪之水清兮)…은 맹자의 <이루 상>에도 보인다. 맹자는 어질지 않은 자와 더불어 말할 것인가? 위태로워질 일을 편히 어기고, 재앙이 될 것을 이롭게 여기고 망하게 될 일을 즐거워한다. 어질지 않은데도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나라가 망하고 집이 무너질 것인가? 어린아이가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을 만 하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을 만 하구나 노래했고, 공자께서 아이야 들어라! 맑으면 갓끈을 빨고 탁하면 발을 씻는 것인데, 스스로 그를 취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1孟子曰: 不仁者可與言哉? 安其危而利其災, 樂其所以亡者. 不仁而可與言, 則何亡國敗家之有? 有孺子歌曰: 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我足. 孔子曰: 小子聽之! 淸斯濯纓, 濁斯濯足矣, 自取之也.(맹자 이루 상)

맹자의 이루 상에 나오는 구절로 滄浪自取라는 말이 나왔다. 국어사전에는 물이 맑고 흐린 데 맞추어 처신한다는 뜻으로, 칭찬이나 비난·상이나 벌을 받는 것이 모두 자기가 할 탓임을 이르는 말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맹자의 이루 상의 뒷 구절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은 오히려 피할 수 있어도, 스스로가 무너지는 것은 피할 수 없다고 하니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고 태갑에 나와 있다 2太甲曰 天作孼 猶可違 自作孼 不可活 此之謂也.(맹자 이루 상) 고 한다. 그러니 창랑자취는 근신하여 스스로를 맑게 하라는 뜻이 된다.

이 어부가와 맹자의 일절은 그 문향이 깊어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절편하여 쓴다. 창랑은 사천성에서 발원한 漢水가 양자강에 섞이는 지점이다. 호북성 무한의 부근이다. 강소성 소주의 4대 정원 중 하나가 창랑정이며, 중국의 지명을 차용하기 좋아하는 우리의 선조 중 일부가 마포부근의 한강을 창랑이라 불렀다. 이는 마포가 한강의 하류에 위치하며 한강은 祖江(한강과 임진강이 섞여 조강이 됨)에 섞이기 때문이다. 제천의 탁사정(濯斯亭) 또한 이 구절에서 나왔다. 탁사정의 경우 주변경관이 수려하며 밑에 흐르는 개울이 맑아 선비들이 피서법인 탁족(濯足 : 이 또한 이 구절에서 나오는 바 시원한 개울에 발을 담고 더위를 피하는 방법)을 즐기기에 적당하다.

굴원이 배회하던 장사 일대는 강들과 연못이 많다. 장사시를 흐르는 상강은 북으로 동정호로 흘러들고 동정호는 악양에서 양자강에 합류한다. 거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삼국지의 적벽이 나온다. 장사에서 몇십분 달리면 굴원이 자살한 멱라수가 동정호로 흘러든다.

이 곳 장사는 위와 오의 적벽대전에서 형주(지금의 호북성)를 취한 후, 유비가 노장 황충을 얻은 곳이다. 그러나 조선 선비에게 장사를 매력적이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악록서원(岳麓書院)이다.

악록서원은 중국 4대서원 중 하나다. 북송 개보(開寶) 9년(976년)에 세워져, 지금의 호남대학으로 이어졌으니, 가히 천년학부다. 그 후 남송대에 들어 관료로 이학사상에 영향을 받은 유기(劉琪)가 호남성 안무사로 오면서 서원을 적극 지원하였고, 당시 가장 덕망있던 장식(張栻: 1133~1180)을 산장(원장)으로 초청하여 중흥을 꾀하였다. 그는 서원제도를 혁신하여 우선 과거위주의 교육과 경서에 주석을 다는 교육을 배척하고 백성을 구제하고 인도할 수 있는 인재를 가르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둘째는 주입식에서 하나의 주제에 대하여 토론(담록)하는 형식으로 바꾸었다. 셋째는 단순 교육에서 학술연구를 주요과목으로 추가하여 다른 학파와의 교류를 촉진하였다. 특히 1167년 9월 주자(朱熹: 1130~1200)를 초청하여 주장강화(朱張講話)를 했다.

그 후 주희는 1194년에 호남의 안무사로 부임하여 서원을 대대적으로 진흥시켰다. 주희는 정무를 수행하면서 밤을 세워 학자들과 토론하였으며 1000명에 달하는 제자들을 거느렸다고 한다. 아마 이 시기의 주희는 이미 주자학의 기본 틀을 완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격물(格物: Science)에 치중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이미 그는 천체물리학, 기상학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러나 과학자로서의 주희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바는 거의 없다.

이와 같은 악록서원의 전통 속에 근대의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하고 양무운동을 추진한 증국번(曾國蕃), 변법자강운동의 양계초(梁啓超), 모택동 등이 이 서원을 다녔다. 고염무(顧炎武), 황종희(黃宗羲)와 함께 청조의 3대 학자이자 사회주의적 학자인 왕부지(王夫之)가 장사의 바로 아래 형양(衡陽) 사람으로 악록서원에 그를 기리기 위한 선산사(船山祠 : 형양 船山은 왕부지가 은거했던 지역이자 그의 號임)가 있다.

신영복 교수는 1972년 닉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모택동이 닉슨에게 건넨 선물이 초사였다며, 모가 대장정 장정 때에도 손에서 초사를 놓지 않았다고 한다. ‘조직의 유소기(劉少奇), 이론의 모택동’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러한 모의 사상이 남방적 낭만주의(초사)가 갖는 자유로움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현실에 매달리지 않고 현실의 건너편을 보는 거시적 시각과 대담함이 곧 낭만주의의 일면이 아닐까 한다며, 그것을 우리가 처하고 있는 공고한 체제적 억압과 이데올로기적 포섭 기제를 드러내야 하는 당면의 과제와 한번쯤 연결시켜보는 것도 매우 의미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며 그의 <초사>에 대한 심회를 토로한다.

2008년 1월 11일 내가 간 장사는 황량했고 붉은 대지 위에 먼지와 안개가 뒤덮혀 있었다. 나는 고객을 방문한 뒤, 맵다고 하는 湖南菜(호남음식)를 맛있게 먹고 난 후 공항으로 돌아와 다시 상해를 향했다. 도시를 종단하는 상강도, 멱라수도, 동정호도, 악록서원도 보지 못한 채 어둠에 가라앉기 시작하는 대륙의 서쪽으로 서쪽으로 날았다.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다리우스 09.03.16. 19:33
    모택동의 고향이기도 한, 초사의 고향 잠사, 흥미로운 글 잘 읽습니다. 여인님~^^ 여인님 안에는 아무래도 인류학적 구조주의의 붐을 일으킨 레비스트로스적인 기질이 언뜻 언뜻 엿보이곤 합니다.^^; 이런 글 참 좋아합니다. 역사적 고고학적인, 문화사적, 문헌학적, 풍취마저 아우른듯한,,,
    ┗ 旅인 09.03.16. 19:54
    일언이폐지하면 잡탕 한 그릇입죠? ^^ 만약 정퇴 이후 세계여행이라도 할 수 있다면 이런 잡탕을 계속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 다리우스 09.03.16. 20:00
    빨리 정퇴하시길 바랄수도 없고 이거~ 아 예, 붓과 벼루 냄새가 늘 좋습니다.
    ┗ 旅인 09.03.17. 17:36
    그러게 말입니다. 연금이 발달된 유럽에서는 정년퇴직이 늘어나면 오히려 짜증들을 낸다고 하던데… 우리는 정년퇴직 나이가 너무 짧아서…

    난 향 09.03.23. 08:42
    잘 읽었습니다..읽긴 읽었는데…..읽긴 읽었는데 ..글쎄.. 에휴 !!..읽고나서 기억이 안되니…제 기억력이 나쁜거 맞지요?…
    ┗ 旅인 09.03.24. 09:46
    너무나 많은 것을 짧은 글에다 섞어놔서 그런가 봅니다. 잡탕이 맞긴 맞네요.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