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유대인)의 역사

경전의 역사를 보면, 신은 그냥 존재자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진화하는 존재인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포괄자이며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성스러운 존재를 경전으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며 한계가 있다. 신학적으로는 인간의 관념이나 사고로는 초월자의 부분에 부분조차 다다를 수 없다. 따라서 신이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지식이 확장되면 될수록 신에 대한 관념이 진화되어 가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측면이 아닌 이성의 측면에서 볼 때, 신은 인간의 관념 속에서 진화되어가는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이성과 신학적 주제의 충돌을 놓고 중세의 수도사 안젤름은 말한다,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Creds ut intelligam)라고.

경전이 있은 후 종교가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의 형태로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경전화되는 것이 일반적인 예이다. 특히 유대교의 경우 전형적인 절차를 밟고 있을 뿐 아니라 신의 관념에 대한 진화가 민족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여실히 볼 수 있기에, 성서의 역사를 여기에 기술한다.

셈족인 유대인들은 유목민이었기에 우물, 샘, 개울, 돌무더기 등을 성스럽게 생각했고 초자연적인 신격을 복수형태로 엘로힘(elohim 혹은 elim)으로 불렀다.. 단수는 엘(el 혹은 eloah)이다. 또는 주인을 의미하는 아도나이, 왕을 의미하는 멜렉, 토지를 소유하는 바알, 가장을 의미하는 압 등을 신을 부를 때 쓰기도 하였다. 유대인의 선조인 아브라함은 개인적으로 엘 샤다이(El-Shaddai: 산이나 바위의 신)라고 부르는 하나의 엘이 다른 신들보다 월등히 우월하다고 믿었다.

출애급을 통하여 야웨(YHWH)가 유대인에게 처음 소개된다. 야웨의 이름은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될 것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나는 만물을 있게 한 자이다’ 등의 의미이다. 유대인들은 지존자의 성스러움 때문에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아도나이’ 등으로 불렀다. 야웨는 종전의 자연신 개념에서 벗어나 유대민족의 운명을 쥐고 계약을 맺은 계약신이며, 첫째 계명(계약)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였다. 이를 통하여 모세는 다신교에서 유일신교로 통합하면서 열두지파 유대인의 결속을 다질 수 있었다.

여호수아에 의하여 여리고가 함락되고 가나안으로 진입한 유대인(이스라엘)들은 하비루(Habiru: 이집트로 이주하지 않고 가나안에 남아있던 히브리인들로 방랑생활을 함, 나중에 헤브류로 이름이 바뀜 )와 공동전선을 펴고 가나안의 주요 도시를 점령한다. 이 때부터 블레셋(팔레스타인: 지중해섬 또는 크레타섬에서 쫓겨나 이주해 온 종족)들과의 전쟁이 시작된 셈이다. 그리고 다윗의 시대에 와서야 여부스족의 도시(예루살렘)를 점령(BC 1020년 경)하고 수도를 정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목생활에서 농경생활, 도시생활을 영위하는 민족으로 변모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인은 농경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선주민과 하비루들로 부터 성숙한 자연신앙을 받아들이게 되는 데, 바로 바알(Baal)이다. 바알은 봉건영주처럼 더 높은 지배자에게 종속되었는 데, 높은 지배자는 엘(El)과 위대한 하늘의 바알(하급신 중 최상위)이다. 엘의 배우자는 아쉐라(Asherah=Ashirat)이며, 누이동생인 아나트(Anath), 아스타르테(Astarte)와 관련이 있다. 이 중 아스타르테는 풍요의 여신으로 바빌론에서는 아쉬타르라고 하며, 이집트의 이시스, 그리이스의 데미테르, 로마의 비너스와 같은 특성을 지니며, 성욕과 다산의 상징을 지닌다. 유대인들은 농경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초보적인 농업기술 뿐 아니라, 농업 캘린더가 숨어 있는 토지의 종교적인 성격 또한 알아야 했던 관계 상 바알 신앙을 받아들였고, 야웨 신앙이 바알 신앙에 흡수되는 경향까지 보였다. 구약의 흉년기사는 유목신앙으로 농경생활을 영위하는 데 애로가 있다는 것을 반증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러한 바알화가 진전되는 가운데 이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세력이 등장하게 되는 데, 느비임(Nebiim: Nabi의 복수형이며 나비는 신을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의 뜻)이라고 불리우는 선지자들이었다. 이들은 산이나 광야에서 살면서 신비체험을 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예언은 일반적 보편적이어야 하며, 메시지가 정치적인 야합의 산물이 아닌 근원이 야웨에게 있다고 여겨져야 했다. 이러한 예언을 통하여 야웨는 백성의 불충에 고심하며 죄를 뉘우치기만 하면 용서하겠다고 한다. 이러한 느비임의 활동은 아합 왕 때의 엘리야로 부터 바빌론 유수 때에 이른 예레미야까지 이다.

유대민족의 고난기인 바빌론의 포로시절이야말로 성서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맞이한다. 기원전 597년 바빌론의 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항복한다. 이후 588년 반란을 일으켜, 느부갓네살은 에돔, 사마리아, 암몬 등 주변국과 연합하여 예루살렘이 초토화시킨다. 히브리인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거나, 이집트로 망명을 했다. 단지 선지자 예레미야와 빈곤층, 하층민만 예루살렘의 부근을 배회했다. 이후 히브리인을 유대인이라 명칭했다. 예루살렘의 파괴는 심대했으나, 바빌론에서의 유대인의 생활은 팔레스타인의 생활보다 나은 편이었다. 느브갓네살은 자유로운 생활을 보장해 주었고, 이주지역의 땅은 비옥하였다. 그들의 주거지가 바빌론과 님푸르라는 거대 도시의 부근에 있어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다. 유대인들이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자 반유대주의가 생겨나기는 했으나, 유대인들은 바빌론의 문화와 종교, 풍요 속에 용해되기 시작했고 배교적인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반면 믿음이 있는 자들로써는 예루살렘에서 유리되어 야웨에게 번제를 드릴 수가 없었다. 대신 그들은 안식일에 집에 모여 토라 두루마리와 예언자들의 기록을 읽거나 경전화되지 않은 초기 역사를 큰 소리로 읽고 누군가 기도를 이끌었다. 이런 안식일 집회는 관습이 되었고 후에 바리새인(Pharisees)들이 이 관습을 시나고그로 정형화시켰다. 그들은 이러한 예배 의식의 정립과 아울러 전승을 문자화하는 운동을 벌였다. 에저키엘(Ezekiel)은 신명기의 율법으로 전적으로 신봉한 신명기 학파의 지도자로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를 편집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의 귀환 후의 율법과 재건될 사원과 의식의 비젼을 제시하는 한편, 야웨를 완전히 초월적인 존재로 격상시켜 사제나 천사를 말미암지 않고는 통할 수 없다고 했다. 이 시대에 또 다른 선지자인 이사야는 惡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야웨는 왜 유대인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 것인가? 그것이 그들이 저지른 죄의 댓가라면 바빌론의 유대인은 더욱 타락했음에도 전보다 왜 더 부유한 것인가?라는 질문 속에서 그는 야웨를 유대의 신에서 인류의 구원이라는 세계사적, 범우주적 신으로 승격시킨다. 야웨는 한 지역과 한 민족을 구원코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구원코자 하며, 야웨는 자신의 의지를 인류에게 인식시키기 위하여 중개자를 필요로 하며, 바로 이스라엘이 그 종이다. 따라서 유대인은 선택된 민족이며, 빛의 담지자이다. 야웨는 인류로 하여금 유대인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임재를 의식하도록 헀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사야의 사상은 후기 유대교 뿐 아니라 초기 기독교에도 영향을 미친다.

기원전 538년 고레스 왕은 바빌론을 점령한 후, 유대인들의 환심도 얻고, 이집트와의 완충국을 만들기 위하여 그들을 귀환토록 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를 자기 고향이라 여기고 많은 사람들이 남고, 일부가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들이 돌아간 유다에서는 남아있던 히브리인들이 율법에서 벗어나 있고 에돔, 암몬, 사마리아인들과 통혼하고 있음을 보았다. 귀환자들은 그들을 멸시하였고 두 집단 사이에 긴장감이 돌았다. 따라서 성전의 건축은 지지부진했으나 느헤미야의 지도력과 에즈라의 지원으로 방치된 지 150년 만에 성전의 완성을 본다. 또한 이방의 언어를 쓰던 토착 유대인들도 율법과 종교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고 랍비(Rabbi: 스승)가 형성되었다. 랍비는 당시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에서 사용되는 아람어(Aramaic)라는 방언 때문에 히브리어로 된 성스러운 경전을 이해 못하는 일반인에게 경전을 설명하였고, 종교의 지방분권화를 촉진했다. 사제와 율법학자들은 종교문헌을 보급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전승되던 예언의 시대는 끝났다. 대신 문자화된 경전 속에서 자연과 역사 속에 임재하시는 야웨의 성스럽고 전능하신 힘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그들은 에저키엘, 말라기 등 신진 예언자들의 기록을 복사, 재편집하였다. 또 「J」,「E」,「D」전승이 형성되고 「P」전승이 추가되어 마침내 모세 5경(Torah)이 완성된다. 「P」전승은 유일신론적인 색채를 가장 농후하게 띠고 있는 창세기 1장과 5경의 율법조항의 여러 군데에 영향을 미쳤고 에즈라와 느헤미야에 영향을 준 「H」전승을 문자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등이 수정 증보되었고, 신명기파는 역대기, 에즈라, 느헤미야 등을 완성했다. 이와 함께 사원의 노래들이 후에 시편으로 집대성되고 아가 등이 수록되었다. 이로써 우리가 가진 히브리 경전의 2/3가 이 때에 완성되었다.

신정정치를 하고 있던 팔레스타인은 기원전 322년에 그리스의 지배 하에 들게 된다. 알렉산더는 유대인을 무척 좋아했고, 유대인들 또한 다른 민족보다 알렉산더의 문화정책에 영향을 받았다. 그 후 백년이 지나자 그리스어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자식의 이름 또한 그리스어로 지어 주었다. 특히 사제 계급의 헬레니즘에 대한 경도 경향은 더욱 더하였다. 이러한 헬레니즘의 영향은 Logos로 대변되는 데, 이 기간에 잠언, 욥기, 전도서 그리고 다양한 외경이 지혜서라는 범주에서 저작되었고, 롯기, 에스터, 요나, 시편도 이 기간에 쓰여졌다. 유대교 경전 중 가장 나중 저작인 다니엘과 메시야를 기다리는 외경 또한 저작되었다. 그러나 헬레니즘의 영향은 조로아스터교보다 강력하지도 지속적이지도 못했다. 유대인들은 조로아스터교를 직접 관찰하면서 사탄, 천사, 내세에 대한 관념을 받아들이고 메시아 사상으로 유대교의 미숙한 부분을 보완해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은 첫째 히브리 신앙에서 체계적이지 못하던 악마의 위계질서를 세운다. 둘째 야웨의 사자에 불과한 천사 또한 계급질서를 갖춘다. 셋째 유대 전통에 의하면 죽은 사람들이 저승(She’ol)의 구덩이에서 잠을 잔다는 관념에서 내세에서 완전한 의식과 육체를 지닌 존재로 부활한다는 신앙이 생겨났다. 넷째 메시야가 다윗 가문에서 출현하여 새로운 왕국을 건설한다는 신앙의 좌절 속에서 메시야가 세상의 마지막 날 구름 속에서 나타날 것이라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 다섯째 최후의 심판 사상이 유입되었다. 또한 사두개파(사제 계급을 형성하던 가문집단을 지칭하는 Zadokites에서 유래하며, 대주교, 수상, 외무장관 등 상류층을 형성), 바리새파(땅에 사는 조용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율법주의자들)가 형성되었다. 유대교 경전은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그리스의 영향을 받으면서 70명의 전문학자들에 의해서 그리스어로 번역(Septuagint)되었다.

마카비 일가가 전제정치를 행하고 사두개파의 사상에 밀착되자 바리새파가 봉기를 일으키고 마카비 일가는 피의 복수를 감행하고, 바리새파의 강력한 저항을 하는 등 내란 상태로 접어들었다. 내란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시리아에 있던 폼페이우스 장군이 중재에 나서게 되었는 데, 기원 전 63년에 이 곳에 온 그는 이 곳을 즉각 로마의 영토로 만들었다. 이와 함께 이두메인 안티파터에게 권력을 주었으며, 쥴리어스 시이저는 그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유대의 행정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는 이두메인이 대사제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된 것으로 유대인의 증오심을 키웠다. 그 후 안티파터의 아들 헤롯(Herod)은 기원전 40년에 아우구스투스에 의하여 유대왕이 되었다. 이 후 유대인들은 메시야 사상과 묵시문학에 심취하였다. 이 과정에서 헤롯을 지지하는 소수의 헤롯당이 생기고, 기원 후 6년 로마의 인구조사에 대한 저항 운동의 산물인 젤롯당이 생겨나 로마에 저항했다. 비정치적으로는 에세네파(Essenes)로 자신들을 일컬어 길을 따르는 사람, 빛의 자식이라 했으며, 단식과 기도, 수련에 정진했으며, 조로아스터적인 선악이원론 속에서 초세속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갈릴리의 유다에 의한 기원 6년의 저항 후 유대인은 60년간의 피의 항쟁을 계속해 나갔다. 빌라도는 로마의 황제숭배를 강요하려 했다. 사원의 재산을 이용해 예루살렘의 수도공사를 하려하는 등으로 반발을 사게 되고, 그 후 총독이 수시로 갈리다가 네로의 통치 말기, 타락한 대사제가 암살당하게 되었다. 그를 기화로 유대인과 이방인, 로마인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로마는 베스파시안이 이끌었는 데, 네로가 죽자 그는 로마로 가서 황제가 되었다. 그는 아들 디도로 하여금 유대인을 정벌케 했다. 디도는 항복을 권유했으나 이를 듣지 않자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저항한 유대인을 십자가에 처형했다. 도시는 처절하게 파괴되었다. 그리하여 기원 70년 이후 유대인은 민족적 대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바빌로니아, 아라비아 사막, 시리아, 소아시아, 로마, 이집트, 북아프리카, 스페인까지 이동해 갔다. 그 후 또 60년이 지난 후 또 피의 항쟁이 일어났으며, 로마는 이 곳을 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바꾸고 유대인의 예루살렘 거주를 금지시켰다. 유대인들은 1967년 6월 전쟁에서 승리한 후 옛날 사원의 벽(통곡의 벽)을 자기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디도가 69년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요하난 벤 작카이(Johanan ben Zakkai) 라는 저명한 랍비가 로마의 포위망을 뚫고 해안평야지대에 있는 야브네(Jabneh 혹은 Jamnia)로 피신했다. 그는 배움의 집에서 유대인을 가르치면서 율법과 교리를 체계화하고 재해석하여 유대교의 존속을 도모했다. 또 산헤드린 공회가 없어진 상태이기에 새로운 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령 내의 유대인의 공식적인 대표자가 되었다. 야브네의 학자들은 유대교의 경전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면서 진실된 경전의 골라 편찬하기 시작하였는 데 경전은 세 부류로 정리되었다. 모세 율법의 기본 경전인 토라(Torah), 예언자들에 관한 전승인 느비임(Nebiim), 경전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성문서인 케두빔(Kethubim)이 그것이다. 토라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이다. 느비임은 첫째 문자 이전의 예언자의 전승 역사에 관한 책인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와 둘째 예언자들이 직접 기록한 책인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셋째는 예언자들의 단편적 기록인 호세아, 요엘, 오바댜, 요나, 미가,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가 그것이다. 케두빔은 역대기 상 하, 에스라, 느헤미야, 시편, 잠언, 욥기, 룻기, 애가, 다니엘, 전도서, 아가, 에스더이다. 그들은 이 모든 책들을 『야웨의 말씀』으로 여겨졌으며, 그 때부터 확정된 경전이 되었다. 이 경전을 바탕으로 유대인 삶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미슈나(Mishnah: 반복, 연구)가 유대지방을 중심으로, 바빌로니아 학파는 게마라(Gemara: 추가된 지식)을 출현시켰다. 바빌로니아에 조로아스터의 사제 마기가 지배하면서 유대인의 탄압이 시작되었고 유대학자들은 미슈나의 간결함을 보완하기 위하여 문자화된 율법 할라카(Halakah)와 랍비의 율법 이외의 전승인 하가다(Haggadah)의 집대성인 게마라를 합하여 탈무드(Talmud)를 5세기 말에 완성시킨다.

그러나 이것이 경전의 완성이 아니라 정밀한 텍스트를 만드는 데 또 다시 많은 시간이 흘렀다.

간략하게 이스라엘과 구약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유대인은 역사 속에서 무수히 갈라지고 또 다시 합치면서 이방인의 피가 섞이고, 갈라진 유대인들은 타민족으로 흡수되어 갔다. 그래서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무엇인가가 모호해진다. 또한 여호와는 엘로힘에서 유랑하는 유대인과 함께 야웨가 되고 또 바알의 신화와 교호하고 변형되다가 악마와 천지개벽, 천국을 조로아스터교로부터 수유받고, 성령인 로고스(Logos)를 그리스 철학에서 수혈받으면서 척박한 대지 가나안에서 끈질기게 생존하던 중 그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신 중의 신, 하나의 님으로 열방에 선포되었던 것이다.

20040601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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