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의 풍경

 

“사랑하는 아빠, 우린 낙엽처럼 여행하고 있어요.”

떠나는 것이 왜 슬프다는 걸까? 집들은 바닥이 들떠 땅 위로 무너져내리는 듯한데… 눈이 내리고, 사람들은 하늘을 보며 정지해 있다. 그리스의 겨울 위로 내리는 눈과 정지한 채 눈을 올려다 보고 있는 자질구레한 군상들 사이를 뚫고 너희는 꼭 달아나야만 했을까? 거기에 필연성은 없지. 인간들은 늙거나 어리거나 자신들의 땅에 뿌리내리기 보다 늘 어딘가를 꿈꾸거든. 하염없이 북쪽으로 가서 국경을 넘으면 있다고 믿는, 게르마니아.

얘들아! 지금 그 곳의 풍경에 대해 말해줄 순 없어. 단정적으로 너희를 사생아라고 할 수 없듯…

우린 다 사생아거든. 게다가 너희는 낙엽처럼 떠나지만, 우리는 정박되어 녹슬고 있거든.

“내가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해도 수많은 천사들 중에서 누가 내 목소리를 들어줄 것인가”

불행? 행복한 사람들 조차 행복이 뭔지 몰라. 테오 앙겔로풀루스나 나나, 그리고 너희나 매한가지야. 하지만 인생이 카라인드로우의 음악처럼 비극적이라고 말할 순 없어. 그 늙은 여인이, 아다지오를 작곡할 땐 행복했을거야. 오보에의 소리가 비극적일수록 광기와 같은 만족감을 느꼈을테지.

안개가 걷히고 나면 무엇이 보일까? 풍경은 아름다울까? 차라리 안개 속에서 어렴풋한 것이 더 나을 지도 몰라. 흐릿한 바다, 빗줄기로 끝이 보이지 않는 도로, 검지가 부서져 더 이상 어딘가를 가르킬 수 없는 거대한 손의 석상, 술취한 작자들에게 장난거리에 불과한 늙은 말의 죽음, 더 이상 무대가 없어서 무대의상을 팔아야만 했던 광대들. 그 모습들은 다 안개의 이쪽 편, 보이는 쪽의 이야기이지만, 안개 저편의 이야기이기도 해. 안개의 너머는 더 짙은 안개일 수도 있어.

불라! 사람들이 사악하려 하지 않음에도 사악하다는 것은 아직도 이해가 가질 않아. 우리는 늘 순결한 욕망에 불타오르고, 정염에 물들고 있는데… 그 빈 것들을 채우고 또 채워도 가득하지 못해. 네가 순결을 트럭 운전수에게 짓밟혔다고, 오레스테와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수줍고 못생긴 군인에게 게르마니아행 기차삯을 위하여 11살의 네가 몸을 팔려고 했던 것을 잘못이라고 하진 않겠어.

다만 기차삯을 던져 놓고 그가 떠났던 것은 다행이지.

“태초에 어둠이 있었어. 그 후에 빛이 만들어졌지.”

알렉산더! 어린 나이에 길에서 울음과 자신이 아이라는 것을 잊어버렸어. 알지 못하는 아버지를 찾아가자고 어미에게서 너를 떼어낸 너의 누나를 용서하기는 쉽지 않아. 그렇다고 너의 그리움과 꿈을 가로막는 것도 옳지는 않은 것 같군.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악한 것은 너희를 철길 위에 던져 놓고, 어두운 국경선에서 총성을 울리게 했던 테오 앙겔로풀루스야. 너희들이 데살로니키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북상하여 국경선에서 배를 타고 건넜던 그 강은 너희를 게르마니아(독일)로 데려다 주었을까? 아니면 총성과 함께 너희는 레테의 강을 건넜던 것인가?

Landscape in the Mist

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
음악: 엘레니 카라인드로우
제작: 1988년

참고> Landscape in the Mist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旅인 08.11.19. 20:43
    여행의 旅자는 군사를 뜻한다. 旅는 길한 것이 적다고 주역에 적혀있다. 농경사회인 고대의 중국에서 먼 곳을 갈 수 있는 기회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이 나면, 그들은 이곳 저곳을 떠돌게 된다. 주역의 상에 말하기를 산(艮) 위에 불(離)이 있는 것이 旅라고 한다. 결국 멈추어 있지(艮) 못하고 떠도는(離) 것이다. 그래서 여행은 고달픈 것이다. 여인이란 나그네이다.
    ┗ 유리알 유희 08.11.20. 10:50
    그렇군요. 스스로 고단함을 자처하는 나그네, 근데 갑자기 왜 긴긴 설명을 하시는지요? 무서버! 아니죠?

    truth 08.11.19. 20:44
    두번읽는동안엔 아직은..왠지 매끄럽지못한 번역글을 대하는기분입니다. 한가지 마음에 담겨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호받아야할 어린아이들의 존재가 그나마..다행스럽다는겁니다..차근히 더 시간을 두고..기회를 얻어 감상도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旅인 08.11.19. 21:34
    이글은 따옴표 외에는 제가 쓴 글인데, 아마 율리시스의 시선에 대한 어느 분의 뛰어난 감상문(감상문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창작)을 보고, 저도 한번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를 보면 그런 감상문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아마 이 글은 욕심에 비하여 능력이 모자라 그런 것일 겁니다. 뱁새와 황새 사이의 쨉새라든가, 한단지보에 해당하는 그런 글인지 모르겠습니다.
    ┗ truth 08.11.20. 21:07
    아..제가 읽어본 여인님 문체와 다소 차이가있어서 다양성에 기초하지못한 저의 불찰인듯합니다^^감사한맘으로 다시 읽어보며 감상에 젖어봅니다 감사드려요^^

    전갈자리 08.11.20. 14:54
    旅인님 워드패드 쓰는 가요.
    ┗ 旅인 08.11.20. 18:41
    저는 글을 올릴 때 Tag로 좌우를 정렬하여 HTML로 올립니다. 그래서 워드패드나 한글이나 아무거나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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