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생긴 스피커

사고를 쳤다. 거의 한달 간 인터넷을 뒤져 결국 남들이 보기에는 폐기 직전에 놓인 AR2ax를 사고야 말았다. 소리소문없이 진행된 이 사건에 대하여 아내는 물론 열 받고야 말았다.

AR2ax는 1969년에서 1976년 사이에 생산되었다. 내가 산 것이 후기 모델인 만큼 늦게 잡으면 1976년의 제품이다. 적어도 서른두살이나 쳐 먹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초기모델에 비하면 품격이 떨어지는 제품이다. 초기제품의 경우 미송으로 직육면체를 감쌌다면, 원가절감을 위하여 전면과 후면을 칩보드(합판은 아님)를 썼다고 하며, AR 한자리 숫자의 스피커의 뒷면에 붙은 보증서인지 뭔지 모를 종이쪼가리도 붙어있지 않다. 그러니까 순싸구려다.

본래 AR11이나 AR14를 사려고 했다. 그것들은 AR이 영국회사인 Teledyne Acoustic Research에 인수된 후 1977년부터 생산된 제품들이지만, 소리는 AR적인 품격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여 그나마 인기가 있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AR의 인기는 이제 시들하다.

놀랄만한 일은 밀폐형으로 유명한 AR에서 이제는 스피커 케비넷에 구멍이 난 베이스 리플렉스(저음반사)형 제품도 생산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AR의 모습을 보면, 거의 대부분 흉측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일부러 못생기게 만들려고 한 것처럼 AR의 모습은 외관 상 상품성을 결하고 있다. 이와 함께 스피커와 크기와는 달리 묵직하다는 특성을 지닌다. 또 스피커의 고음 트위터와 중음의 미드레인지, 저음의 우퍼가 한짝이 좌우 대칭이 아닌 모습을 지니고 있어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 이유는 밀폐를 위한 실런트가 시간이 지나면서 표면으로 새어나와 외관을 얼룩지게 하고, 외관을 망치더라도 소리 중심의 설계를 하다보니 지저분하다. 또 밀폐된 통속의 공진을 흡수하기 위한 천조각이나 석면 등의 각종 흡음제가 통 속에 가득하다 보니 무겁다. 게다가 AR은 스테레오를 생각하고 제품을 생산한 것이 아니라, 모노와 스테레오가 겹치는 시대에 제품을 생산한 관계로 스피커를 한통씩 팔았다. 모노앰프를 사용하는 사람은 한통을 사면 되고, 스테레오 앰프를 가진 사람은 두통의 스피커를 사서 한조로 사용하면 될 뿐이라는 것이 AR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AR의 제품을 사는 사람들은 일련번호에 신경을 쓴다. 일련번호에 차이가 많으면 그만큼 두 스피커 사이에 소리에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AR2ax는 3웨이이다. 그런데 중음을 내는 미드레인지가 노란솜같은 것으로 틀어막혀 있다. 어떤 글에서 보니 미드레인지가 솜과 같은 흡음제로 막혀 있는 것은 고음의 돔형 트위터와 중음의 미드레인지 사이에 고음 중음을 컨트롤하는 크로스오버 장치가 없어서 트위터와 미드레인지 사이에서 일부 고음이 중첩된다는 것이다. 그 중첩되는 고음을 빼내기 위하여 흡음제를 앞에다 갖다 붙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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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든 점에서 이 놈의 스피커는 못생겼다.

드디어 스피커선을 연결하고 나서…

93.1로 주파수를 맞추었다. 조금 수줍은 듯 소리가 조그맣게 난다.

AR의 특징은 대표적 저능률의 스피커다. 출력이나 댐핑(구동)능력이 모자랄 경우 개미가 스멀거리며 기어가는 소리만 난다.

못생긴 것이 먹기도 많이 쳐 먹는 스피커인 셈이다.

그래서 평소에 5이상 올리지 못했던 볼륨을 8~10까지 올린다.

아아 그 소리란…

물려두었던 쿼드 스피커를 다시 물릴 생각이 전혀 나질 않는다.

딸내미 왈 “못생긴 것이 소리는 들어줄 만하네.”

한참 후 집에 돌아온 아들내미 왈 “이런 소리가 클래식 소리였나요? 그런데 참 아날로그적으로 생겼네.”

집 사람, 아직 침묵 중.

나는 AR에서 나오는 음악소리를 들으며 약 이십년전에 팔아먹었던 AR14에서 나던 소리를 추억 속에서 더듬어 봤다.

그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소리는 소리와 소리 사이에 자리잡았던 그 침묵의 소리가 아니었을까 하고… 아니 소리가 나더라도 그 소리의 옆에 놓여있던 공간이 간직하고 있던 그 깊이를, 소리와 침묵 사이에 놓여 있던 그 떨림들을, 비극적인 저음의 위로 맑게 떠오르던 명도가 낮은, 마치 소근대듯 다가오던 미세한 쾌감들을 다시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93.1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를 들으며, 스피커가 기계인가 아니면 악기인가 하는 질문 속으로 다가가는 것만 같았다.

불을 끄고 튜너에서 흘러나오는 녹턴 불빛을 바라보며, 이미 한계 수명을 한참 지난 저 못생긴 스피커와 얼마만큼의 세월을 보내게 될 것인가를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씨디플레이어는 하나 또 개비해야 겠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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