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책은 많이 읽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한 해는 발자크의 소설을 손에서 놓지 못했건만 지금은 발자크의 소설은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카잔차키스의 소설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명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읽었지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꿈꾸던 세상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이란 언어가 형성된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보고, 듣고 한 것들이 언어로 추상화(단순화)되어야 기억할 수 있다. 매 순간마다 쏟아져들어오는 감각의 엄청난 데이타를 우리의 뇌수는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순간의 경험들은 언어라는 기호로 환원되고 머리 속에 기억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발자크의 소설이 기억나지 않는 이유란 어리석게도 그의 소설들을 읽을 당시 몇권의 책을 동시에 읽곤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른 책 속에 든 지식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고, 저 책을 읽고 있을 때면 아침에 읽은 글 중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나를 괴롭혔다. 이 책 저 책을 넘나들면서 책을 읽었지만, 결국 나는 한권의 책도 온전히 읽지 못한 셈이다.

읽었던 책의 내용을 다 기억할 필요란 없다. 세상에서 자신 스스로 경험한 것도 까맣게 잊는 판국에, 종이쪼가리 속에 쓰인 것들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카잔차키스의 경우는 다르다. 그의 책을 나는 천천히 읽었고, 상당한 감동을 받곤 했지만, 나는 무슨 글을 읽었는지 기억할 수 없다. 기억이 언어로 저장된다고 할 때, 그의 글들을 기억 속에 가둬두기에는 나의 언어가 너무 엉성했다고 보아야 할까? 그러나 내가 기억하기로는 카잔차키스의 글이 발음하기 어려운 그의 이름처럼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그리스인 조르바’ 또한 조만간 잊혀지고 말 것이라는 느낌이다.

살아오는 동안 조르바적인 사람들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분별한 열정 때문에 거친 그들의 태도와 앞날에 대한 걱정없이 오늘만 살아가는 몰지각함을 차마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이 위험할 뿐 아니라, 비루하여 보살필 것조차 없는 내 인생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그들을 애써 외면해왔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부처의 신화와 예수의 신화에 길들여져 성스러운 사람들의 모습과 태도는 정적과 묵상속에 깃들어 있으리라는 그릇된 관념이, 배가 고파 밥을 먹고, 슬퍼서 눈물 흘리며, 기뻐서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조르바처럼 격정에 넘친 삶이야말로 진정한 방식이라는 것을, 겸허한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와 예수의 우상을 쳐부실 필요가 있는 것이다.

카잔차키스 또한 조르바와 함께 하면서도, 그의 덕성에 대하여 직면할 수 없었던 것은 완벽했던 최초의 인간이었던 부처에 대한 관념이, 자신 앞에 실존했던 인간 조르바를 늘 부정하고 비판하게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애인 앞에서는 여러가지를 생각하느라 정작 사랑하지 못했으면서도, 헤어진 후 진정한 사랑이었노라고 말하는 어리석음처럼, 카잔차키스 또한 조르바와 있을 때는 그와 함께 하지 못했으면서도 정작 헤어지고 난 후 조르바를 생각하며 그가 진정한 인간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아닐까?

카잔차키스는 왜 조르바 앞에 ‘그리스인’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였을까? 그냥 조르바이거나 인간 조르바라고 하지 못하고 ‘그리스인’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이고 찌질한 수식어를 써야 했을까? ‘중국인’ 공자는 말이 되도, 인도인 부처나 유태인 예수는 어울리지 않는다.

카잔차키스의 글에서 느꼈던 것은 그와 같은 갈증이다. 성과 속의 변경에서 늘 서성대던, 성스러움에 대한 갈망으로 속됨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결국 성스러움을 알 수 없었던 한 인간을, 나는 그의 글에서 늘 발견하곤 했던 것이 아닐까?

카잔차키스의 글은 메토이소노 1It can be said to experience ‘metoisono-to be holy’, the change occurring beyond critical state of soul and body, material and consciousness of Nikos Kazantzakis.(최정민의 논문 ‘체험적 행위를 통한 작업’ 중) “포도가 포도즙이 되면 물질적 변화다. 포도즙이 포도주가 되면 화학적 변화다.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우정이 되고, 성체가 되는 것, 그걸 메토이소노(성화)”라고 한다., 즉 “거룩하게 되기”를 이해해야 된다고 한다. 그러나 거룩하게 되기란, 그릇된 관념, ‘거룩’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거룩 또한 이데올로기인 것이며, 외식(外飾)과 같은 거룩을 전제로 할 때, 조르바적인 삶의 진지함은 거룩 앞에서 속물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삶이, 밥그릇이 속되고 하찮은 것으로 보이는 한, 우리는 聖스러워질 수 없는 것이다. 聖스러움은 결국 삶 속에 깃든 것이기에…

참고> 그리스인 조르바

This Post Has 6 Comments

  1. 그래도… 다른 것은 몰라도,
    그리스만 떠올리면 조르바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떠오르잖아요..
    거기만 가면 팔뚝을 걷고 크게 웃는 그 사나이가 있을 것만 같은.

  2. 여인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에 보면 조르바가 영적으로 사단계 쯤 진화된 사람으로 표현되고 있던데… 이 책을 읽으면 생에 대한 뚜렷한 열광을 느끼게 됩니다. 슬프면 눈물짓고 기쁘면 춤추는 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힘들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더군요.

  3. 클리티에

    혹시 나의 그리스식 웨딩이란 영화를 보셨나요?
    그 영화에서도 그리스인들은 아주 유쾌하고 수다스럽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민족으로 나와요. ^^ 그리스인 조르바도 그렇죠..

    모든 내용들이 시종일관 지루하지 않게 잘 서술되어 있어서 정신없이 아주 재밌게 읽었어요.

    조르바처럼 살고 싶어요~ 자유롭게…

    1. 旅인

      제가 본 그리스 영화는 기억도 안나는 아주 오래 전 영화와 최근에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영화 두편 뿐이고, 희랍인 조르바를 소설을 읽은 후 다시 한번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본 영상은 모두 음울하고 깊은 탄식에 휩싸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맑은 하늘과 에게와 아드리아의 짙푸른 바다를 선사받은 그들에게 자연은 늘 밝은 심성으로 그들을 이끌겠지만, 그리스의 역사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저의 팀원 중 한 친구가 매형이 그리스인이라고 하던데, 팀원의 말로는 상당히 낙천적이라고 하더군요.

  4. 旅인

    이슬 09.05.07. 15:24
    여고시절에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니체)’ 책을 읽으면서 저도 천천히 읽었고, 상당한 감동(?)을 받곤 했지만…무슨 글을 읽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죠. 아마도 온전히 제것으로 담지 못했던 것 같아요.
    ┗ 旅인 09.05.07. 16:54
    저는 1/10정도만 읽은 것 같습니다. 파우스트를 읽었던 인내력으로 돌파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과 같은 책은 너무나 즐겁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 이슬 09.05.07. 21:20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책은 전 아직 읽지 않은 책이네요.꼭 읽어봐야 겠네요.^^

    유니스 09.05.07. 17:41
    제게는 조르바가 아주 용기있는 삶을 살아가는 멋진 아저씨로 비쳤습니다. ‘나’라는 인물이 관념속에서 현실방관주의자처럼 살아가는 인물이었다면 조르바는 현실을 온 몸으로 살아내는 인물이었거든요. 아주 감명깊게 읽은 책이었습니다. 여인님의 성과 속의 관점에서 보니 또다시 그 감동이 밀려드네요~~글 잘 읽었습니다^^
    ┗ 旅인 09.05.07. 18:31
    ‘나'(카잔차키스)는 정적에 깃든 부처를 지향하며, 정열에 들뜬 조르바를 맞이하는데… 제가 이 소설을 읽으며, 만약 제 옆에 조르바가 있었다면 저는 어떻게 그를 받아들였을까를 생각해보니 그냥 멋진 놈 아니면 양아치 정도로만 평가하고 스쳐지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샤 론 09.05.07. 18:37
    성스럽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성스럽다와 거룩하다라는 의미에 도달 하고픈 적이 있었습니다만..너무 하찮은 자신이 우습게 보일뿐….많은 책을 읽지만 기억이 안나는 것은 여인님도 마찬가지군요..위로를 받습니다.ㅎㅎ
    ┗ 旅인 09.05.07. 23:34
    성스럽다, 거룩하다, 자유롭다, 고요하다 이런 단어들 중에 택하라면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 진정으로 자유롭고 마음이 고요하여 아무런 흔들림도 없는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성스러움이나 거룩함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 아무 거리낌없이 온전하며 십자가 위에서도 인간의 어리석음과 고통에 애닲아 하신 점등이 당신을 거룩하게 한 것이 아닌지?
    ┗ 샤 론 09.05.08. 08:24
    전 한때는 수녀가 되고 싶기도 했죠..성스럽다는 것 때문에..불교인이었다면 비구니가 되고 싶었겠죠..하지만 수녀도 비구니도 결국 세상사람과 연을 맺고 살아야 함에는 세상사람과 다를 바가 없겠단 생각이 들고…결국 이리사나 저리사나 마음에 달렸다는 생각이 ….몸담고 있는 곳이 다를 뿐..언급하신 네가지는 제가 늘 흠모하는 단어들이지만 제 마음 속은 추악하다고 생각하죠..그러니 감히 그런 단어를 놓고 비슷하게라도 살고 싶다 라는 마음조차 죄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그래서 성인들이 가신 길이 더욱 빛나는게 아닐까 생각합니다..두서없는 제 생각이네요 쓰고 보니..
    ┗ 旅인 09.05.08. 09:29
    저도 한 때 중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똘중! 그 똘중이 된다면 자연과 벗하며 천진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제가 만난 똘중들(나이가 마흔이 넘어도)의 눈에 어린 미소들은 너무 아름다웠고 포근했습니다. 그래서 삭발을 해볼까 했는데… 어머니께서 진노를 하실까봐 그만.
    ┗ 샤 론 09.05.08. 10:01
    ..ㅎㅎㅎㅎ..그렇군요…갑자기 똘중이라하니 우리시골 동네 스님이 생각나네요..매일 고스톱치고 놀다가 돈 떨어지면 삭발을 다녀와서는 또 고스톱치고..ㅎㅎ

    truth 09.05.07. 20:48
    삶이, 밥그릇이 속되고 하찮은 것으로 보이는 한, 우리는 성스러워질 수 없는 것이다. 성스러움은 결국 삶 속에 깃든 것이기에..밥그릇의 의무는 성스런 청지기적 의무이다.이렇게 다가옵니다. 늘 여인님 글을 대하고있으면 그 빛나는 깊이감에 때론 정의로움에 전혀 어울림없는 사람냄새에 반듯한 여인을 만나는 기분입니다. 귀한글 감사합니다.^^
    ┗ 旅인 09.05.08. 09:26
    하지만 거룩한 밥그릇에 후달려 부조리한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으며, 기어이 살고 있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저희는 영웅이며, 모든 인간은 위대합니다.

    라마 09.05.07. 23:33
    조르바가 사랑한, 광산촌의 뚱뚱한 과부. 조르바에겐 그런 속물스런 과부가 바로 성녀였던 듯합니다. 그래서 라마는 거룩한 밥그릇과 속악한 성배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나 밀레의 <만종> 같은 그림에 묘사된 거룩한 속인들. 반면에 성배를 탐하여 십자군의 지랄난장판을 조장하거나 거기에 동참한 온갖 속악한 성자들. 라마의 어림기억으로는, 조르바의 외로운 축제-탕행-예배가 거룩한 과부를 중심으로 치러졌던 듯합니다. 그가 굳이 그리스인이었다면, 그런 거룩성과 세속성을 혼교시킬 수 있는 ‘비극적 명랑성’을 지녔기 때문인 듯합니다^^
    ┗ 이슬 09.05.07. 23:55
    –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나 밀레의 <만종> 같은 그림에 묘사된 거룩한 속인들. 반면에 성배를 탐하여 십자군의 지랄난장판을 조장하거나 거기에 동참한 온갖 속악한 성자들… – 라마님 댓글에 동감합니다.
    ┗ 旅인 09.05.08. 09:33
    이 몸이야말로 말과 업과 영혼의 그릇이니… 조르바의 예배가 그르지는 않았겠지요. 예배라기보다는 축제였겠지요. 그리스인에 적극 공감하면서, 한편으로 조르바를 통하여 찌그러진 그리스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심산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유리알 유희 09.05.08. 11:21
    제가 무지 좋아하는 조르바. 저는 그의 책을 이것밖에 읽지 않았답니다.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없을만큼 저를 매료시켰던 책, 읽을 게 없거나 글줄이 막히면 꺼내 보던 책, 그런데 그 책이 사라졌네요. 그 후부터 저는 비문학적으로 사는 게 아닌가 해요. 바로 제 기준으로는 성을 떠나 속됨으로 살아가는 ㅋㅋㅋ. 고뇌하는 지식인 내가 관찰하는 조르바, 인식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는 소극적인 내가 바라보는 조르바는 얼마나 스스로의 감정에 진솔합니까. 그래서 저는 그가 참으로 좋더랍니다. 서점에 가면 다시 조르바를 데불고 와야겠어요. 그런 날이 올까요. ㅜㅜ
    ┗ 旅인 09.05.08. 16:47
    재작년 여름 조르바를 읽으면서, 작가의 조용한 이야기가 이렇게 긴 카잔차키스의 글을, 어떻게 젊은 시절의 열정으로 읽었으며? 또 매료되었던 것일까? 하고 자문해보았습니다. 아마도 저도 <메토이소노>라는 것에 빠져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위성(爲聖: 성스러워지기)이란 유학자들의 집요한 목표이기도 하지만, 때론 위성(僞聖: 짐짓 거룩한 체하기)이 될 수도 있거나, 성스러워지기 위하여 자신 앞에 놓인 生을 놓쳐버릴 수도 있는 리스크가 늘 존재합니다. 그래서 조르바를 읽고 저 글을 썼던 것 같습니다.

  5. 旅인

    식은카푸치노
    가끔 들리고 있었는데 댓글은 처음 남기네요.
    여인님의 글에는 배울 점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마음이 불편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쁘지 않은 불편함이라 기분은 오히려 편안합니다.
    오랜만의 포스팅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횡설수설했습니다.
    밤이 깊었네요. 자야겠습니다. 좋은 꿈 꾸고 계시길 빕니다.
    └ 여인
    댓글이 늦었습니다. 가끔 들리셨다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여 인사조차 여쭙지 못하게 되어있는 테터툴즈는 퉁명스럽기가 그지 없습니다.
    한가한 제 블로그에 방문하여 댓글을 달아주시니 감사하기 그지 없습니다.
    식은 카푸치노가 놓여 있는 카페를 한번 생각해 보게하는 멋진 이름이네요. 뜨거운 커피가 식을 때까지의 짧은 시간의 여유조차 갖지 못한 오늘의 사람들에게는 그 짧은 시간의 아무런 생각없는 공허한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아마 불편함은 제 글의 문장상의 문제에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이웃분들이 어렵다고 하는데, 그것은 쉬운 말로 풀어낼 만큼 제 생각이 정제되지 못한 탓인 것 같습니다.
    좋은 하루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 식은카푸치노
    불편한 원인은 열등감입니다.
    단적인 예로 여인님의 글을 읽고 남한산성 서평 쓰기를 포기했습니다.
    도저히 제 생각으로 쓸 자신이 없었거든요.
    └ 여인
    카프치노님이 읽고 쓰신 서평처럼 제가 쓸 수 있을까요? 사람들의 독특한 향취가 아닐까요? 사실 카푸치노님에 대해서 잘모르기 때문에 속단할 수는 없으나, 나이에 따라서도 글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이 저한 문화적 환경 또한 개인을 다르게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볼때는 훌륭한 자품을 지니신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 식은카푸치노
    네. 감사합니다. ^^
    그리고 이왕이면 부디 저보다 나이가 아주 많으시기를 바라옵니다. ^^;
    └ 여인
    제발 나이가 많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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