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그리고 후기

…그리고 또 다른 후기

우리나라에 旌善 이씨(2000년 인구 : 3,657명)와 花山 이씨(2000년 인구 :1,775명)가 있다. 이 두 성씨는 본질적으로 같은 이씨다. 정선 이씨는 大越(베트남) 李왕조(1009~1225)의 왕자인 이양혼(李陽焜)에서 시작한다. 이양혼은 5대 신종(이양환)의 동생으로 왕위를 다투다가 고려로 망명을 한다. 양혼의 6세손이 무신정권 때의 이의민(李義旼)으로 고려를 14년간이나 실질적 지배를 한 적이 있다. 이후 대월 이왕조의 7대 고종의 동생인 이용상(李龍祥)이 이왕조가 진씨에 의해 무너지는 상황에서 고려로 도주, 황해도 화산에 정착한다. 용상의 후예는 몽고의 침입 시 잘 싸워 화산군으로 봉해진다. 그러니 우리의 월남과의 교류는 깊고도 오래되었다.

국민학교라는 곳에 들어가서 학교에서 배운 노래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맹호부대 용사들아~ 그런 것이다. 입학을 하고 난 후 월남파병이 본격 시작되었고, 나의 어린 시절 베트콩은 파리처럼 죽여야 당연한 것, 그것도 참새보다 더 쉽게 에무완 또는 카빈 소총으로 쏘아 맞추는 그런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4~5학년이 되어 위문편지를 쓸 수 있을 때, 외삼촌, 아저씨들이 파병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위문편지를 썼다.

“삼촌 베트콩 많이 죽였어요? 백명 이백명 마구 죽여서 훈장받아 돌아오세요!”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총알이 딱쿵 딱쿵 빗발치는 사선에서 살아남기가 얼마나 기가 막히는 일인지를, 나는, 어려서 정말로 몰랐다.

월남파병은 정말로 창피한 일이다. 용병이라고 파병을 폄하했지만, 내가 볼 땐 인신매매다. 용병은 돈을 벌기 위해 자진해서 전장에 뛰어드는 일이지만, 월남파병은 도덕성없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우리의 젊은이들을 거짓된 전장에 쏟아부은 것이다. 군바리 정권은 우리의 젊은 목숨을 남십자성이 뜨는 열대, 소련제 아카보 소총 소리가 딱쿵거리고, 미제 소이탄이 밀림을 깡그리 튀겨버리는 그 곳으로 보냈다. 그렇게 미국에 아첨하며 정권을 유지했고, 젊은 피 값은 따로 챙겼다.

1964.8월 의무중대 파견을 시작으로 1973년까지 연인원 312,853명(최대 5만명)을 보냈다. 이 중 5천명이 사망했고, 참전자 중 2만명 정도가 고엽제의 후유증을 앓고 있으며, 많은 상이군병이 발생했다.

이때 미국으로부터 받은 한국군의 봉급은 미군의 1/3수준으로 30만의 파병군이 받은 수당은 236백만달러, 이 중 195백만달러가 국내로 유입되어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 투입된다. 1968.2월 경부고속도로가 착공되고 40년후인 2008.2월 고속도로를 공사한 현대건설의 주역인 이명박씨가 대통령에 취임한다.

이러한 우리 자신의 이야기 뿐 아니라, 1966년 빈호아사 커우 마을 학살사건(131명)을 필두로 민간인 학살 사건이 자행되었고, 콩까이(아가씨) 따 먹는 것은 간식이라며 베트남 처녀를 보고 급히 탄띠를 풀기 위해 일어섰다가 AK-47의 약실을 벗어난 총탄에 절명하기도 했다. 갈보 중에서도 양갈보가 제일로 더럽다면서도, 무책임하게 라이따이한들을 싸질러놓고, 베트남에서 철군한다.

그리고 30년이 지났다. 농촌이나 어촌 마을의 나이든 총각들이 호치민행 비행기를 탄다. 그들은 하루에 수십명의 콩까이의 선을 보고 골라잡아 그 날로 호텔에 신방을 차린 후, 다음 날 함께 한국행 비행기를 탐으로써 면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나라로 남편만 믿고 무작정 따라온 아오자이를 입은 아가씨들의 운명은 또 어떤지 모른다.

임진왜란이 끝나는 무술년 음력 11월 이순신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적들을, 끝끝내 막아서고 끝내 쫓아가 왜선 500척 중 450척을 격침시킨다. 거기가 남해와 하동이 마주하는, 남해대교의 아래 노량이다. 이순신은 남해의 서북단, 관음포에서 노을을 마주하고 죽는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은 그냥 대마도를 지나 고향으로 돌아가면 되는 부산과 사천, 남해의 왜군들을 기어이 노량으로 집결시키고 이순신과 마주하게 했을까?

왜 이순신은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을 만날 것에 들떠 있는 저들을, 적들로 끝끝내 죽여야만 했을까?

충정이었을까? 아들 면이의 죽음 때문이었을까? 무엇이었을까?

아아 어질지 못함이여~!

This Post Has 3 Comments

  1. 위소보루

    소설을 정말 흥미롭게 읽었습니다만 그 배경이 글의 후기에 나타나있는 것과 같은 것에서 출발했다는 것에 다시 한번 여인님의 글풀기 솜씨에 감탄을 하네요

    서정적 자아님께서 이 글을 보시다 실화인줄 알았던 것처럼 무척이나 흡인력이 있는데다 사실감까지 있으니 읽다보면 여인님을 몰래 지켜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저에게 이런 관음증이 있는 줄은 ㅡㅡ;;;;;

    1. 여인

      이 글을 읽고 있을 줄을 몰랐습니다. 이 글을 쓸 당시 회사에서 짤린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던 시기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 旅인

    목련
    정말 한번도 외롭지도 않으셨나요?.
    그렇다면, 그만큼 지금 주어진 현실에서의 삶들에 있어 행복한 삶을 사신것 아닐까 싶습니다.
    이글을 읽는동안 …아잉…이 되어 우리 여인님을…….히히…이또한 장난이며 농담이에요.
    한번 웃으시라고요…~
    어떻게 이렇게 완벽한 설정을 하실수 있는지요?..
    에이 속았다니요…쩝^^*..ㅎㅎ
    분명 아닐거에요.
    이 글속의 여인님이 훨 멋있는데…..헤헤헤
    └여인
    행복해서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남들이 저를 보면 몹시 고독해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외로워보인다는 말은 않더군요. 거의 같은 말인데…
    아마 저의 속성은 왠만한 외로움같은 것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주 외롭거나, 불감증에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늘 시원하게 설명할 수가 없더군요. 왜 제가 외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지에 대해서는 [어느 소녀에게 보낸 편지]에 약간 이야기가 되어있으나, 그것은 몹시 비참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속였다고 너무 저를 욕하지는 마십시요. 글을 쓰면서 아잉과 사랑에 빠져버렸었거든요. 그녀의 숨소리와 안아줄 때의 그 느낌, 그리고 묵은 이불과 그 집의 수채구멍에서 나는 냄새마저도 맡을 수 있었습니다. 너무 묘한 느낌이었습니다.
    자신의 조각상과 사랑에 빠져버렸다는 피그말리온의 느낌이 이런 것일까요?
    이건 비밀인데…
    잘보면 영화배우만큼은 못돼도 봐줄만은 하다고 하더군요.^.~
    └목련
    그모습이 매우 궁금합니다.헤헤헤
    └여인
    네이버에 가면 포토로그에서 중학교 때 것은 볼 수 있을지도…
    그런데 안가보시는 것이 일주일은 행복하실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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