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그늘에서…끝

아잉이 없는 이곳에서 시간이 느릿느릿 지나가는 것을 보다가 자살을 하거나, 미쳐버리는 것이 아닐까 했지만, 가을을 다 보내고 겨울을 지난 후 또 봄을 맞이했다. 그러니까 살다보면 살아지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을 내가 사는 것인지, 인생이 나를 사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매일 구루마를 끌고 국도 위로 올라 남해의 바다가 날마다 새로운 색깔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세상은 날마다 변하면서도 무표정했다. 무표정한 세상에서 터질 듯 외롭다는 것도 웬만큼 견뎌졌다.

아잉이 떠난 집은 곳곳에 먼지가 앉았다. 벽지에는 곰팡이가 오르고, 나이 든 홀아비가 사는 집은 이유없이 균열이 갔다.

방문 옆에 걸린 쪽거울에 비친 얼굴은 까맣게 그을었고, 깡마른 얼굴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나도 몰라 볼 얼굴이었다. 거기에는 추억도 없고 기쁨도 보이지 않았다. 고통이나 불행에 대하여 불감한 얼굴이었다. 그런 무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담배를 피워 물고 장독 뚜껑 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만이 끝나는 곳을 따라 쭉 나가면, 망망대해라서 수평선이 동그랗게 보일 것이다.

좀더 나가면, 유구열도. 거기에서 세시 방향으로 계속 가면, 대만을 스쳐 팽호열도. 거기를 가로질러 홍콩, 해남도를 거치면 베트남의 북안에 가 닿는다.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면 호치민, 그 아래로 메콩강이 기나긴 토사를 내뱉는 곳을 따라 내륙으로 오르면 티엔강의 지류가 얽히고, 코찌엔 강변에 토사가 만든 섬 사이로 다리가 놓여 있다. 거기가 빈롱이다.

그 강과 다리 위로 남국의 햇빛이 내려 앉고, 아오자이를 입은 아가씨들이 잇빨을 하얗게 드러낸 채 웃으며 지난다. 야자수의 빗살무늬 그림자가 드리운 그 곳에 아잉이 살 것이다. 십년동안 쓰지 않았던 고국의 언어로 동네 아줌마들과 수다를 떨거나, 수줍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어느 젊은 남자를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때때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강 위에 걸쳐진 다리 위에서 자전거에서 내린다. 그리고 티엔강이 흘러가는 동쪽을 바라볼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와 같은 것이 떠오른다. 아니 미소라기에는 그리움 같기도 하고, 그리움이라기에는 외로움들로 점철되어 있어서 더 이상 기억에 떠올릴 수 없을 것 같은 자신의 오래 된 전설을 맞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외롭고 어두웠던 전설이… 하루 하루 다가오는 밝은 나날들의 기쁨을 밝혀주는 그늘이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우리의 나날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기대하는 행복은 늘 다가갈수록 조금씩 멀어지며,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약간의 결여감일 뿐. 우리가 지닌 외로움이야말로 본질이다. 내가 다른 이와 다를 수 밖에 없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그것이야말로 외로움이며, 그래서 사람은 늘 가난할 수 밖에 없다.

이제야 노을이 진다. 수평선 위로 빛이 자글거리는 낮은 하늘에는 내륙을 향하여 새들이 지친 날갯짓을 한다. 무연의 날개짓이건만… 새들은 그렇게 난다.

노을이 풀어지며, 밤이 하루의 끝으로 밀려들어온다. 하루의 마지막 빛이 잠기며,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순간 아잉의 미소가 수평선 위로 떠오른다.

“씬 짜오 아잉! 1안녕, 아잉!” 바다를 향해 소리쳤다.
“안 호이, 씬 짜오! 2아저씨, 안녕!” 아잉의 웃음이 만에 반짝거리는 물비늘 위로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만에는 달빛이 가득하다. 밤바다는 너무 고요해서 정적이 파도소리를 삼키고, 세상의 언어를 단 하나로 엮는다.

외로움!

광대해서 그것과 마주하기가 무서웠는지 모른다.

바다 안개가 피어오르듯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외로움이 스며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젖은 바다의 바람처럼 흐느끼더니, 몸 곳곳으로 스미고 세포 하나하나를 낱낱이 갈라, 나를 해체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거친 세상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밤과 바다와 아잉과 아내의 눈물과 집요한 자신에 대한 이기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던 무수한 사람들의 이야기들, 그리고 계절이 남기고 간 지친 노을들이 들어찼다. 한번도 외롭지 않았다고 고집했던 교만을 떨쳐놓고, 그만 외로움에 치를 떨었다.

열병처럼 외로움이 나의 몸을 스치고 지나자, 밤 하늘 위로 명멸하는 별빛이 뚜렷하게 보였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찢어진 세계 속에서 조각 난 나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이며, 외롭지 않다는 것은 자신 속에 이기적으로 내려앉아 있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자신을 품에 앉아 주었음에도, 세상은 홀로 감내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무지이며… 어리석음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긴 밤을 지나고 아침 해가 떠오를 즈음에, 낮익은 골목을 지나 내가 그토록 혐오해왔던 생활이라는 것들, 아내가 미쳐 치우지 못한 씽크대 위의 그릇들과, 뚜껑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꽉찬 쓰레기통과, 엘리베이터에서 형식적으로 인사를 하던 사람들과, 항상 뜻 모를 숫자들만 떠올리던 통장의 잔고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식구들의 몸의 비릿한 체취 속에 낡아빠진 내 속살 냄새를 뿜어내며, 몇몇 친구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기억해내고, “야! 너 요즘 뭐하냐? 바쁘지 않으면 실업자 한테 술이나 한번 사라.”라고 지껄이고 있을 지도 모른다.

단지 외로울 뿐이니까 말이다.

This Post Has 2 Comments

  1. 旅인

    유리알 유희 08.10.23. 23:36
    일상에서 밀려나 아웃사이더가 되어 찾아간 섬, 거기서 이앙을 만나 지극한 사랑을 쌓았고,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의 화자는 섬그늘에서 추억의 시간을 살다가 드디어 출구를 찾은 셈이로군요.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소설 즐감합니다. 무엇보다도 묘사가 압권입니다. 유연한 문장도 부럽고요. 더욱더 건필하시길 빕니다 이류님!
    ┗ 이류 08.10.24. 13:05
    유희님께서 이렇게 말씀해주시니 뿌듯합니다. 하지만 묘사나 문장 면에서는 늘 한계를 느낍니다.

    지건 08.10.24. 01:35
    어쩌면….아잉은…화자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잠재되어..있던…한 인간의…실존감…이었던 게 아닐까…싶습니다…화자의 치열했던 만큼이나 무뎌진 현실의 흐름 속에서….아잉을 통해…한 여인의 삶을 통해…사실..화자는…자신의 아픔을 구체화 시켜 대면할 수 있었던 계기가 아니었을까요….화자의 도움으로 아잉은 고향으로 갈 수 있었지만….결국 화자는 아잉을 통해 자신의 고향…삶의 현실로(세상속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어쩌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보다 극한 상황에 처한 이들을 보면서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 보고 있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지건 08.10.24. 01:36
    감사합니다. 이류님 ^^
    ┗ 이류 08.10.24. 13:07
    지건님 덕분에 너무 빨리 빨리 올렸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맞습니다. 서로 구원을 얻었을 겁니다. 그것이 사랑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리우스 08.10.24. 12:34
    대단원의 막을 내리셨군요, 좋은 소설 감사합니다.이류님^^
    ┗ 이류 08.10.24. 13:08
    레테의 식구들이 이 형편없는 글을 꾸준히 읽어주셔서 그만 감사할 따름입니다.

    무인선 08.10.24. 15:33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을 축하드립니다.
    ┗ 이류 08.10.24. 18:27
    감사합니다.

    자유인 08.10.25. 00:25
    섬그늘에서.. 재미 있게 읽었습니다.마지막 (“섬 그늘에서..끝”) 여백을 더 주셨어도 충분하지 않았을까.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 이류 08.10.25. 08:55
    저도 좀 그런 기분이 있었지만, 그냥 막을 내렸습니다.
    ┗ 자유인 08.10.27. 23:55
    독자의 몫 을 화자가 가져 가버린 부분이 있는 듯도 하네요..제 느낌입니다.
    ┗ 이류 08.10.28. 10:00
    그런 부분이 어려운 부분입니다. 여운을 남겨주어 독자가 새로이 해석하고 상상해야 할 부분들의 여지를 남겨놓지 못했다는 자책이 있을 수 있습니다.

    러시아황녀 08.10.25. 01:19
    잘 읽었습니다..후감은 찬찬히 할께요^^*
    ┗ 이류 08.10.25. 08:56
    예 감사합니다.

    truth 08.10.25. 09:03
    휴…복잡해지네요…서둘러 마친듯해서 아쉬워요..너무 잘 읽었습니다..
    ┗ truth 08.10.25. 15:08
    마지막편만 다시 한번 더 읽게되는데요…여전히 좀 이른감을 느낍니다..좀더 연장하시지 그랬나요,…하는 어린투정을 ..^^ 감사히 읽었습니다^^
    ┗ 이류 08.10.25. 15:43
    모두들 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더 나아가려고 했지만, 당시에 바쁜 일도 있고, 아잉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나니 더 이상 그곳에서 살기도 싫고 그래서 끝내버렸습니다.
    ┗ truth 08.10.25. 18:52
    아..이제서야 윗릿플을 읽어볼 여유가생겼습니다. 다들 그런생각들였네요^^ 하긴…그렇긴해요 사랑이 떠났는데…그사랑에 아낌없이 인간적였는데 뭘 더…^^

    더불어숲 08.10.27. 01:58
    잘 읽었습니다. 아프고 낮은 곳으로 주제를 설정하신 것이 돋보였습니다.
    ┗ 이류 08.10.27. 08:17
    고맙습니다. 긴 글 읽으시느라고 고생하셨습니다.

    다리우스 08.10.29. 19:11
    문득, 혹 방생함으로써(이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주인공은 다시 어떤 인생의 주요한 귀결점에 도달하는 것은 아닐까 그 생각 들어 여기 적습니다.^^ 즉 린 아잉을 그의 고국에 돌려보내는 행위, 그것은 일종의 뭐라고 부르는지는 모르지만 자비 내지는 보시가 아닐지,,,건필하시길요! 그리고 제가 여기 적는 행위 또한 독자 입장에서의 해석의 일환이겠네요~
    ┗ 이류 08.10.29. 19:25
    저 남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너무 낙관적이고 이기적인 결론에 도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 다리우스 08.10.29. 19:51
    조금은 낙관적인데 그건 아마도 중간과정에서 소설진행상 내적 갈등(아잉의 갈등, 부인의 갈등, 남자의 갈등, 3국면)을 생략하신 탓인듯 합니다. 헉 그렇군요, 남자가 집에 못돌아가네요? 아잉은 갔는데, 남자는 어디로 가죠? 궁금한 것은 그가 가정과 아잉을 맞바꾸는 댓가를 치른 것일까? 하는 그 국면입니다. 거기에 대한 번민스런 구절이 빠르게 시간상 지나가버린 듯해서요~동시에 남자가 애초 가정을 떠난 이유가 내적이 아니라 단순히 외적 탓인가 그리고 필연적으로 아잉을 만나게된 그 합일이 주인공의 성격과 어떤 깊은 연관성이 있는가 하는 그 지점일 듯 합니다.
    ┗ 이류 08.10.30. 10:24
    우유부단함과 생활력 부족, 이런 성격들이 운명을 결정하겠지요.

  2. 旅인

    목련
    바람도 바람 나름, 이 바람은 예사 바람이 아닌, 늦바람..ㅋㅋ(여인님…죄송해요.농담에요.)
    아잉과의 사랑을 읽는동안, 제가슴이 다아리고 한편 여인님이 이해도 가네요.
    저도 비슷한 사랑 해봤는데…
    아잉의 나이때, 꼭 여인님처럼, 아저씨라 부르며 따른그분과 깊은정들어 힘들었는데..
    어린나이에…..
    살면서, 잊혀지지않을 사랑 지금까지 크고작은 네번입니다.
    우리 여인님…사랑을 하는동안에요.또 아내분께서도 많이 참으셨을것같은…
    이제는 아내에게 더잘해드리세요.
    아잉은 마음으로만 간직하시며 보고플때, 언제든 꺼내보시고…
    우리 여인님의 이야기 정말 가슴을 쓸어내리며 잘보았습니다.
    어쩜 이렇게 감동적으로 …정말 영화보는듯 했어요.
    제가 꼭 아잉이된듯한 착각을….헤헤
    └ 여인
    ㅎㅎ 잘 아시겠지만, 불행하게도 여태까지 바람 한번 피워보지 못했습니다. 여건이 안되어서… 인물로나,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속으셨죠? 후기를 하나 올리겠습니다.

    ^^
    아 말두안되요?…
    속은거 아닐거에요?…이야기 실화쟎아요.ㅎ.. 편안한 휴일 보내세요^^*..친구가 도착할때가 되어 지금나가보려합니다.
    └ 여인
    아직 멀쩡히 회사다니고 있는 것 알면시롱.
    └ ^^
    어째…띵~~~~~한 느낌이에요..헤헤헤
    우리 여인님께서도 귀여우실때가 있으시네요..ㅎㅎ (죄송해요!..애교의농담이였습니다. 실화 맞쟎아요..으하하.)
    └ 여인
    저도 뒤통수치는데는 일가견이…
    └ 목련
    여인님의 애달픈 사랑 아잉은 잘있을까요???…
    그런데요.
    아잉…..
    이름이 참 사랑스러워요……갑자기 인위셜을 아잉으로 바꾸고싶다는 생각이…..헤헤헤
    즐거운 하루 되세요!..ㅎ
    └ 여인
    안 되는데.
    잘못하면 련님과 사랑에 빠질지도…
    └ 목련
    그럼…아잉…더하고싶어지는데..헤헤헤
    (농담이에ㅛ^^*.)
    그런데…이름바꾸고싶은데 …이기회에 아잉으로……헤헤
    └ 여인
    정그러시다면 할 수 없죠.
    아잉보다 [아~잉]이 낫지 않나요?
    └ 목련
    이곳에 섬 그늘에… 앉아 쉬면서..올만에 웃을수 있어 감사했어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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