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La vie devant soi

<자기 앞의 生>, 이 책은 중2인 딸내미의 논술공부와 관련된 책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쥐스킨트의 <향수>도 논술과 관련한 교재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딸내미는 14살이다. <자기 앞의 생>은 배달되어 오자마자 내가 읽었으니까, 딸아이가 아직 읽기 전이지만, <향수>는 1/3만 읽었는데, 그 내용도 잘 모르겠고 지루했다고 한다.

나는 논술학원에 정중하게 편지를 한 장 쓰려고 하는 중이다. ‘젊잖다“라고로 대변되는 <조숙성>에 대한 끊임없는 우리 사회의 요구가, 아이들로부터 문학과 예술에 대한 흥미와 재미, 열정과 같은 것을 빼앗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14살의 딸아이에게는 더도 덜도 말고 14살의 자기 앞의 생에 알맞은 책이 필요하다.

사실 14살 먹은 청소년한테, 적절한 책은 없는 법이다. 책이란 늘 14살보다 훨씬 나이든 사람들이 쓰기 때문이다. 그리고 14살에게 하이틴의 이해력을 요구하기도 무리다.

그래서 자신을 10살로 알고 살아가고 있는 14살짜리 모모(모하메드)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자기 앞의 생>은 14살에게 아주 적절한 책이라고 비쳐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쥐스킨트의 <향수>에 비하여 이 책은 몹시 까다로운 책이다. 쥐스킨트의 <향수>는 코엘류류의 동화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동화적 요소는 헤르만 헤세의 성장소설처럼, 아니 독일인이 좋아하는 초월, 절대, 유미적인 요소들로 채색되어 있어서, 글의 경계가 뚜렷하며, 화려하다. 그러나 에밀 아자르(그는 로맹가리라는 소설가이기도 하다)의 <자기 앞의 생>은 무채색의 소설이다.

본래 삶(생)이라는 것은, 특히 빈민가의 골목에서 자전적으로 쓰여진 삶은 너무나 많은 지저분한 냄새들로 길들여져 더 이상 자신의 체취를 맡을 수 없는 것처럼, 그늘이 깊어 그 색을 뭐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의 아파트에, 창녀들이 맡겨 논 어린 아이들과 창녀를 하다가 늙어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것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늙은 여자의 이야기라면, 삶이란 것은 없을 수도 있다.

이 책 또한 <호밀밭 파수꾼>이나 <프랑스적인 삶>처럼 지루한 수다를 만난다. 그러나 주인공 모하메드는 엄마와 아버지도 없고 자신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조차 모른다. 호밀밭…이나, 프랑스적…의 수다에서 만나는 것은, 삶은 너무 흔하고 가벼운 것이라서, 폐기되어야 하거나 경멸의 대상이라면, 자기 앞…에서 生에서의 삶은 아무 것도 없는 속에서 (엉덩이로 빌어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의 사랑과 믿음을 조금씩 덜어가며 어떻게 살아가는 가를 보여준다.

그것을 사랑이라는 천박한 말로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의 살 냄새와 온갖 잡탕들이 섞여 더 이상 자신들이 사랑하고 있는지 미워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정>이라고 하자.

에밀 아자르는 우리가 경멸하는 사람들의 삶으로부터,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보잘 것은 없으나 아주 존귀한 삶의 모습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런 글을 읽어본 지는 아주 오래된 것 같다. 아자르의 글은 그러니까 빈민이나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속에서 영웅을 그려내는 까뮈적인 전통과 이어져 있다.

<자기 앞의 생>이란 열 살인 줄 알고 있던 열네살 짜리 모하메드라는 갈보의 자식의 위대한 영웅담인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에밀 아자르의 전신인 로맹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멋진 제목의 단편집을 샀다. 하지만 열네살 짜리 내 딸아이가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다지 적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 딸이 자기 눈높이에서 자신 나름대로 이 책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지만 말이다.

나는 내 딸이 아직은 인생의 의미 따위에 신경을 쓰기 보다 즐겁게 독서하기를 바란다. <자기 앞의 생>은 주인공이 열넷이거나 팔십을 먹은 노인이건 간에 아주 나이든 소설이기 때문이다.

참고> 문학동네에서 펴낸 자기 앞의 生(La vie devant soi)에는 부록으로 로맹가리가 쓴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라는 왜 자신이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네편의 소설을 썼는가에 대한 구질한 글이 있다. 그러나 내가 에밀 아자르나 로맹가리나 금시초문의 불란서 작가라는 점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뒈지다>를 읽어본 후에 다시 한번 읽어볼 만한 글이 아닐까?

참고> 자기 앞의 생

This Post Has 2 Comments

  1. 아, 정말 놀랍네요.
    중학생한테 이 책을 읽히나요..?

    하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막무가내로 아무책이나 막 읽어도 좋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 아무 것도 모르고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버지니아 울프를 읽었을 때가 있었는데…
    서른이 넘어서야 수많은 고전이 다시 읽혔죠.
    이 좋은 걸 그땐 왜 몰랐지, 생각하면서….

    새들은 페루에 가서 뒈지다, ㅋㅋㅋㅋㅋ
    이젠읽으셨겠지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제가 참 좋아하는 소설집이예요..
    저는 <에밀 에자르의 삶과 죽음> 이 책이 무척 읽고 싶네요..
    왜 그가 에밀 에자르라는 가명으로 자기 앞의 생이란 책을 썼을까, 항상 궁금했거든요…

  2. 여인

    새들은… 결국 읽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새들은… 만 좋았지 나머지 글들은 자기 앞의 생에 비하여 훨씬 빠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가끔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한번 부정하고 싶은 심정도 있을 겁니다. 아마 그 전의 작품과 저항운동과 관료로서의 자신의 삶을 한켠으로 접어놓고, 익명의 소설가로 좋은 작품을 한편 내놓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을 수도 있겠죠.
    한편으로 우수운 것은 에밀 아자르가 자기라고 동료들에게 말하자 모두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했다죠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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