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들-06

첫사랑

첫사랑은 함께 살고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리워하면서도, 첫사랑으로 부부가 된 사람들을 보면, 아내나 남편 몰래 추억할 것과 비밀이 없다는 점에서 다소 심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재미없는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모르는 비밀은 늘 필요한 법입니다.

부부 싸움을 대판 벌이고 집 사람의 꼴도 보기 싫어 담배를 피울 때, 추억할 것이라곤 아내와 함께 했던 시간 뿐이라면, 몹시 가혹하죠. 추억이란 지나간 시간 속에서 그 날들의 젊음을 풋풋하게 간직해야 하는 데, 아내의 얼굴과 함께 시들어간다면 이 또한 가혹하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요따위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도둑놈의 심보를 가졌다고 해도 할 말 없습니다. 최초로 욕정이 생기기 시작한 이래, 포말처럼 일어났던 갈증들 속에서 어느 것이 최초의 사랑이었던가 반문해 보면, 저의 첫사랑은 언제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랑 아닐까 했던 그 순간으로 부터, 첫사랑은 고집스럽게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행복했거나, 불행했거나, 격정적이었거나, 무미건조했던 간에 첫사랑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숱한 나날들을 이성과 함께 침대에서 뒹굴었으면서도, 어느 날 불현듯 첫사랑이 다가올 수도 있으며, 분명히 첫사랑이 있었는데, 또 다른 사랑이 뒤통수를 냅다 갈기며 첫사랑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첫사랑이란 두 번째, 세 번째의 사랑이 있거나, 최초로 사랑했던 그 사람과 헤어졌다는 것에서 도출되어 나오는 변별적인 개념일 뿐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최초로 실패한 사랑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무한 소급을 거치면서 사랑은 늘 실패하는 것입니다. 결혼을 했다고 해서 사랑에 결실을 이루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혼이라는 위태로움은 늘 있을 뿐 아니라, 대충 결혼을 하고 난 후, 어느 날 불현듯 살을 맞대고 산다는 것이 몹시 피곤하다는 것을 깨닫기 마련입니다. 그러면서도 같은 이불을 덮고 자는 것이 부부입니다.

이렇듯 사랑은 늘 실패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친구의 우화가 갑자기 기억나는군요.

친구는 몇차례 연애의 실패 끝에 결국 나이는 찼지만, 이빨도 닦지 않고 추리닝과 난닝구 바람에 사타구니나 벅벅 긁으며 일요일 내내 텔레비전과 얼굴을 맞추고 벌쭉벌쭉 웃는 사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꼴을 보고 미치지 않는 부모는 몇사람 되지 않습니다.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런 분들에 들어가긴 합니다. 그래서 한번도 맞선을 본 적이 없다는 불행한 이력을 저는 간직하고 있습니다.

정신병원에 가지 않기 위해서, 친구의 어머니는 모처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아들이 위대하지는 못해도, 훌륭하기는 하다는 너스레(순노가리)를 풀고, 마침내 시내 모 호텔의 커피숍에 자리를 예약합니다. 제 친구와 같은 형편없는 놈일수록 반드시 별다섯 짜리의 호텔의 커피숍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갓 드라이 크리닝을 새로 한 양복을 찾아다 입히고 놈을 맞선자리에 투입합니다.

이것이 놈의 첫 맞선 자리였습니다.

까짓 놈이 연애는 몇 번 해봤다고 하지만, 첫선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어색했다더군요. 어색함을 극복하고 전투 모드로 전환하기에는 아가씨가 어머니가 말했던 한 미모하는 여자는 아니였다고 합니다. 자식이 지 꼬라지는 모르고, 엄마와 자신 사이의 미적 개념의 차이를 도저히 매울 수는 없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놈은 “못생겼으면 상냥하거나 겸손해야 하는 거 아니냐? 못생겼다고 유세하는 것도 아니고, 인상까지 구겨가며 내슝까지 떨 일은 아니잖아?”

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못생겼다는 것은 범죄입니다. 뭐 대단한 범죄는 아니고 <도시미관훼손죄>라는 경범죄라는 겁니다. 그런데 내슝까지 떨면 가중처벌죄에 해당된다나요?

그러나 놈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는 않았답니다. 항상 남자들의 문제는 우유부단하다는 것이죠. 놈은 여자가 아무리 안 생겼기로서니 자신과 같은 신사가 <나이는 몇이세요?> <형제는 어떻게 되구요?> 하는 호구조사만 하고 돌려보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놈은 여자에게 그렇게 말했답니다.

“어짜피 둘 다 패자부활전인데, 너무 내슝 떨지 말고 이야기도 하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다 갑시다.”
“뭐요? 패 자 부 활 쩌~언?”
“……”(놈은 찍소리도 못합니다)
“댁이 뭘 안다고 제게 패자부활전 운운이에요?(속으로; 지랄이에요?) 시간이 남아돌아 여기에서 댁과 같은 사람과 만나고 있는 줄 아세요?”하고 핸드백 등을 주섬주섬 챙기고 난 후, “그럼 혼자 패자부활전을 하던지, 말던지… 즐겁게 노세요.”라고 가더랍니다. 마지막에 “흥, 재수없어!”라는 멘트는 빠질 수 없죠.

못생긴 게 가려면 그냥 갈 일이지, 도끼눈은 뭐며, “뭐? 내가 재수가 없다고? 빌어먹을…”하면서, 집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대문을 열자마자 부엌에서 “이 육실헐 놈아! 뭐 패자부활전?”하는 어머니의 높은 음자리와 함께, 솥뚜껑이 음속으로 자신의 마빡으로 날아왔다는 것입니다.

놈은 결국 우리 집으로 달려와, 제 추리닝을 입고 사타구니를 긁어가면서 잠을 잔 후 출근을 했다는 서글픈 전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로 놈이 입었던 추리닝을 빨았죠.

그런데 첫사랑이란 추억할 것은 많아도 그 내용은 별반 없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저의 경험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객관적인가 하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친구 놈의 첫사랑을 첫 라운드에서 삼진 아웃되는 마지막까지 중계방송 혹은 현지답사를 통해 참관한 결과, 그렇다는 겁니다. 제 사랑은 애틋한 데, 남의 사랑은 무지하게 재미가 없더군요.

그렇다고 두 번째, 세 번째 사랑이 화끈하고 찬란하란 법은 없습니다. 다 그 나물에 그 밥. 재미없기는 매한가지란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랑할 때, 가슴이 울렁거리고 혈압이 오르고 하는 것을 보면, 사랑은 늘 주관적이라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첫사랑이 그리운 것은 못 다한 것들에 대한 갈증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가슴을 풀어헤치고 이 세상을 건널 수 없기 때문에, 갈증은 여전하고, 세상의 모든 사랑은 결국 첫사랑일 뿐 입니다.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러시아황녀 09.01.06. 17:04
    세상의 모든 사랑은 첫사랑입니다 가 정답일 것 같네요.
    ┗ 旅인 09.01.08. 22:58
    그런가요? 저도 많이 헷갈립니다.

    유리알 유희 09.01.06. 23:15
    못다한 갈증. 맞아요. 그런데 저는 추억할 것이 무지무지 많아요. 손길 한번 스친 거, 그애가 들려 준 별 이야기. 삶아 준 강냉이, 그리고 우연히 마주친 순간들까지. ㅎㅎ 맞아요. 저 혼자 짝사랑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아, 그리워라. 호호
    ┗ 旅인 09.01.08. 22:58
    짝사랑이 그리우신가요? 그럼 제가 유희님의 짝사랑이 되어드릴까요?

    다리우스 09.01.06. 23:24
    크, 사랑의 주관성, 주옥같은 아포리즘들,,, 철학과 일상의 이 뒤엉킨 혼연일체! 뒤로 넘어갑니다.~^^
    ┗ 旅인 09.01.08. 22:59
    여기에는 철학은 없고 노가리만 있는데… 고맙습니다.

    샤론 09.01.07. 13:31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여인님은 이런쪽으로 글을 쓰시면 책이 아주 많이 팔릴거란 생각이 들어요..너무 재미있어서 혼자 깔깔거리고 웃습니다..저도 어디까지가 첫사랑인지 헷갈렸는데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가 정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상대가 늘 다르니까 그 상대에게는 첫사랑이 된다는 생각이들어서요..
    ┗ 旅인 09.01.08. 23:00
    …….. 조금만 저도 생각을 해봐야 하기 때문에…

    다리우스 09.01.07. 18:18
    사랑에 관한 사설, 가히 여인님의 사랑론이라 이름해도 될 듯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旅인 09.01.08. 23:02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이 놈의 사랑이라는 걸 모른다는 것이 탈이지요. 그래서 사랑이 뭘까 하고 탐구하는 입장에서 이 부스러기 같은 글들을 쓰고 있습니다.

    스윗 노벰버 09.01.08. 14:34
    치열한 거리두기하다 각자 다른 삶을 걸어야해서 어쩔 수 없이 공간적으로 먼 거리를 서로 떨어져 지내다보니 그 갈증이 나중엔 바다처럼, 파도처럼 그렇게 밀려오더라구요. 사랑하는 사람과 바다 앞에 서있는 그 느낌이 갈증과 연결되어서 계속 쭉…서로 말없이 서서 바다를 보면서 아마 비슷한 예감을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처음엔 그런 갈증이 삶의 활력소였는데, 몇년전부터 좀 아프고나서부턴 담담해졌네요^^, 얼마전에 우연히 다시 연락이 닿아서 몇 달 후에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한 번 만나자고 하는데…조금 설레면서도 긴장되고…그렇지만 만나기가 좀 망설여지네요. 두려운 건가?…
    ┗ 스윗 노벰버 09.01.08. 14:54
    제 친구 중 하나가 첫사랑과 헤어진 후 6년 동안 가슴앓이하다 다시 만나게 됐거든요. 그러고는 바로 결혼했는데, 첫사랑이 이루어지는 과정도 얼마나 처절하고 가슴아픈지… 가장 친한 친구여서 가까이서 봐서 잘 알거든요. 그런데요, 그 친구 결혼생활을 지켜보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해도 삶에 대한 회의감 드는 건 마찬가지더라구요. 그러다 아이 하나 태어나니까 다시 삶의 의욕이 생긴다고…둘 다 법조계에서 건조한 일 하면서 살아서 그런건지도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감정은 자신의 일과 별로 상관없는 것 같아요. 그러고보면 어쩌면 사람들의 사랑은 첫사랑이 아니라 ‘한 사랑’을 찾는 과정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 旅인 09.01.08. 23:06
    언제나 우리는 사랑 앞에 서면 두려워지는 것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다가오는 사랑이 나를 휩싸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 이끌어 패대기 칠까 무섭고, 그 안타까운 사랑이, 내 품 안에 꽁꽁 매어두고 싶은 사랑이 홀연히 사라질까 무섭고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아낌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용기가 저는 늘 부러웠습니다. 저는 그만큼 용기가 없었지요, 그래서 제 젊은 시절은 보잘 것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 다시 만나는 어린 사람들의 글을 올릴 기회가 있겠지요.
    ┗ 스윗 노벰버 09.01.09. 03:37
    제 경우는 환상에 얽매일까봐, 얽매이게 할까봐 그런 게 가장 두렵더라구요. 20대 초반이면 아직 삶도 죽음도 세상도 잘 모르는 시기인데, 너무 성급하고 어린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그런 두려움 때문에, 아무리 사랑하는 감정 가지고 있어도 가까이 갈 수가 없었거든요. 한 사람을 이해하고, 내 사랑을 이해하고, 그 사람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최대한 크고 넓은 시공간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고, 그게 영원히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용기가 없었던 건 아닌 것 같은데…그 때가 지금보다 무모함이 없었던 것 같아요. 너무 신중한 척만 했던 기억…
    ┗ 스윗 노벰버 09.01.09. 04:33
    그렇게 떨어져지내다보면 또다른 얘기치 못한 삶의 사건들 만나게 되고, 생각이 변하게 되고,,,그러면서 점점더 삶을 사랑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삶의 사건들을 잘 소화해내면 점점 더 열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집착도 덜어지는 것 같고…그렇게 되어가는 건지, 그러길 원하는 건지…지금까지 제가 이해한 사랑 중에 어머니의 사랑만큼 뜨거운 사랑은 없는 것 같아요. 연인들의 사랑에서도 그런 사랑 할 수 있을까…황폐까지 끌어안는… ㅎㅎ^^;
    ┗ 旅인 09.01.10. 07:56
    자신은 늘 안타까운 사랑을 하는데, 남들의 사랑은 늘 쉬운 것처럼 보였죠. 저도 그 시절엔 노벱버님과 같은 생각을 늘 하고 있었죠. 하지만 지금도 안타까운 것은 왜 그때 좀 더 안아주고 좀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뿐입니다. 늘 언젠가 헤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져 있었으면서도 그 순간, 상대편을 위하여 뭔가 해줄 것을 해주지 못하고 함께 마음을 나누지 못한 채, 쓸데없는 자신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 후회됩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것이 후회가 없다면, 어쩌면 사랑이 아닐지도 모르죠.
    ┗ 스윗 노벰버 09.01.10. 16:39
    아, 0.5%의 아쉬움과 여운이 주는 무한자유…^^,

    산골아이 09.05.14. 23:06
    첫사랑했던 사람이 그리워질 때도 있어요. 허나, 내가, 또는 그가 기억하는 지난 시절의 모습이 아닌 낯선 얼굴을 보이고, 본다는 게 끔찍해서 만나지 않는 게 더 낳다는 결론에…. 그냥 문득 생각나며 추억하는 걸로 즐깁니다.
    ┗ 旅인 09.05.15. 16:03
    첫사랑을 헤어진 후 만나신 모양이네요. 부럽습니다. 전 한번 헤어지고 나서 한번도 다시 만난 적이 없어서… 늘 그리울 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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