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들-간주곡

골치아픈 이야기를 한만큼 간주로 이야기를 한번 느긋하게 풀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이벤트같은 것을 많이 하더군요. TV 드라마나 우리 결혼했어요 같은 프로에서 사랑의 이벤트를 하는 것을 보면,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이제는 닭살이 돋거나 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 미련 곰땡이 같은 놈은 젊은 시절 도대체 뭣을 했던가 하는 생각에 머리카락을 쥐어 뜯게 됩니다.

이런 이벤트가 흥청망청하다 보니, 아들 놈이 지 아버지 생일이라고 칼과 포크로 살을 짜르고 하는 빛까 번쩍하는 레스토랑(식당이라고 해도 되는데 꼭 레스토랑이라고 합니다)을 예약해 놓았다고 합니다. 일인분에 얼마냐? 한 사만원? 미친 놈. 네 성의는 고맙지만… 난 집에서 미역국이나 먹을란다. 케잌이나 젤루 조그만 것 하나 사라, 어짜피 네 놈이 다 먹어치울 것이니까.

전 이런 식이고,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편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살다보니 감동 먹거나 하는 일은 별로 없죠.

하지만 아들 놈은 제발, 지 아빨 안닮아 여자친구에게 이벤트도 해주고, 감동도 주고 해서 귀여움을 받았으면 하는 생각 뿐입니다.

학교 다닐 때 집에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면. 대부분의 전화가 여자애들이 제 동생을 찾는 전화였습니다. 제 동생은 사근사근하고 여자들에게 선물도 잘하고 그랬죠. 그래서 그런지 후배다, 같은 학년이다, 교회친구다, 옆 집 사는 누구다, 아는 여자애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에 하루종일 울려대는 동생을 찾는 전화를 받다보면 목구멍에서 이런 소리가 치밀어오르곤 합니다.

“아쭈구리! 이 대가리에 피도 안마른 것들이 엇다대고 전화질이야? 연애질 때려치고 공부나 해!”

남이야 짜증을 내던 말던 눈 질끈 감고, 선물도 하고 이벤트도 하고 전화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게으르기가 한량없는 저는 지금도 아내의 생일 때가 되면, 며칠 전부터 선물을 하나 장만해야지 하다가 생일날이 됩니다. 하루종일 일도 전폐하고 하얀 머리 속으로 뭘 사가면 아내로 부터 예쁘다는 소릴 들을까? 결국 집 앞에서 꼴란 생일케잌을 사가게 됩니다. 까딱 잘못하면 딸내미한테 “아빠, 내가 케잌은 샀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라는 불길한 전화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빈 손으로 들어갑니다. 결국 아내한테서 하나있는 남편 잘못 길들였다는 소리를 듣고 찍소리도 못하고 TV나 보는 신세가 되기도 합니다.

뭐 제가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한 것은 아닌데 저는 늘 그래왔습니다.

한번은 여자친구의 공연이 있었는데, 남자가 쪽팔리게 꽃다발이 뭐냐 하며 호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고 보무도 당당하게 갔죠. 공연이 끝난 후, 무대 위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꽃다발을 안고 있는데, 제 여자친구 만 빈손으로 서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도무지 용서받지 못할 죄책감. 그런 것들을 뼈저리게 느끼곤 했습니다.

게다가 축구를 해도 늘 타이밍을 못맞춰 헛발질을 하듯, 감각도 형편없었고, 때론 예기치 않은 불운이 저를 늘 뒤따르곤 했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가 아무리 호랑이가 옆 방에서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긴 해도, 빼빼로 데이는 없어도 발렌타인 데인가 하는 것은 있었습니다. 명동의 어느 카스테라점에서 만나자고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를 받고 나자, 이 외롭고 불쌍한 인생에도 누군가 초코렛 하나는 던져주나 보다 하며 감동에 들뜨기 시작했습니다.

손톱을 깨물어가며 무슨 말을 하면 발렌타인 데이 그 날, 그녀의 머리 속에 찬란한 불빛이 반짝하게할 수 있을까 하며 노심초사했죠.

그런데 제 인생은 무수한 우연과 어긋난 타이밍, 이런 것들로 점철되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발렌타인 데이에 제 메마른 인생 속으로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와 제 마음 속에 퐁땅 빠진 그녀의 중요성, 간단하게 “나 너 없이 몬산다.”에 대한 이백자 원고지 육십장에 분량의 전말을 머리 속에 차곡차곡 챙겨넣고, 함께 물경 팔만원(당시 대졸 초봉 수준의 돈)을 준비했습니다. 오후 세시에서 야통(야간통행금지)이 임박한 11시까지 함께 보낼 생각으로, 아무런 선물은 없었지만(발렌타인 데이에는 남자가 선물하지 않는 것은 알고 있었음) 그래도 제법 갖춰 입고, 신세계 백화점과 한국은행 본점이 합류하는 명동의 뒷골목, 대연각 호텔의 뒷쪽에 있는 카스테라집 이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삼십분인가 늦는다는 그녀를 기다리며, 원고지 육십장 중 삼십장 정도는 복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너 없이는 나 몬산다.”고 읊어대고 그녀를 꼭 껴안아 주기로 몇번이나 다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날로 끝장을 보자는 것이었죠.

제가 한쪽 자리에 앉아 복기를 한답시고 중얼거리고 있을 때, 참하게 생긴 여고생이 짠하고 나타났습니다.

처음 본 그 여고생은 어떻게 알았는 지 머뭇거리지도 않고 저한테 와서,

“오빠 이름이 여인이죠?”
“그런데요? 어떻게~?”(몹시 멍청한 표정이었을 겁니다.)
“언니가 말한 것보다는 괜찮게 생기셨네요. 제 남자 친구해도 되겠어요.”

그렇게 털썩 맞은 편 자리에 앉는 소녀를 보자, 왜 제 여자친구가 다방도 아닌 카스테라집에서 만나자고 했는지 알겠더군요. 애초부터 자신의 동생을 보낼 생각이었던 모양입니다. 그와 함께 원고지 육십장 분량의 저의 고백은 네글자로 요약되더군요.

똥 밟았다!

“언니가 말이죠… 이거 주라고 하던데…”하면서 그 아가씨가 뭔가를 제 앞으로 내놓았습니다. 저는 쑥스러운 느낌에 그것이 뭔지를 까볼 수도 없고 해서 그냥 호주머니에 집어넣었죠.

“안까봐요? 언니가 고심하면서 샀는 데… 라이터에요, 라이터.”

하지만 저는 라이터가 포장된 그 통을 호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빠! 언니가 내가 이것 가지고 가면 맛있는 것 많이 사줄 거라던데. 그런데 우리 언니처럼 못생긴 여자를 오빠같이 참하게 생긴 사람이 어떻게 사귀게 됐어요?”
“그것은… 그것은…”
“말 안해도 알아요. 눈에 까풀이 끼여서 그렇데요. 그래도 오빠가 언니가 말한 것보다 사람같이 생겨서 전 마음이 놓여요.”

재잘대는 그녀의 동생을 앞에 두고, 육십장 원고지가 제 가슴 속에서 한웅큼씩 찢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지요. 제 발렌타인 데이가 흐이유 그러면 그렇지. 제 팔자에 무슨 ‘너 없인 난 몬산다’겠습니까? 저는 동생에게 빵과 고로케, 오렌지 쥬스 등을 다량 으로 공급해주었습니다만, 제가 쓴 돈이라곤 삼천원도 안되었습니다.

동생을 보내놓고, 명동을 지나면서 통에서 라이터를 꺼내 담배불을 붙였습니다. 가스가 없더군요. 다시 성냥으로 불을 붙일 수 밖에 없었죠. 집에 돌아와 가스를 집어넣고 불을 붙이다가 눈썹을 홀랑 태워 먹었고, 며칠 지나자 라이터 돌이 뒤집어져 그 라이터를 다시는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발렌타인 데이에 제가 받은 선물이라곤, 생각만큼 제가 그렇게 못생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팔만원 중 칠만칠천원을 남겨 친구들과 속을 버릴 정도로 술을 마시고 양은 그릇이 찌그러지도록 땡강땡강 두드려대며 울고넘는 박달재를 불렀다는 사실이며, 제가 알게 된 것은 인생과 사랑은 육십장 원고지로 호락호락 때울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냐고요?

고백했는지 궁금하시다고요?

물론입니다. 원고지 육십장 분량의 고백을, 만날 때마다 열두장 씩 다섯번에 걸쳐 할부로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할부가 때론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번은 <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다음번에는 <너>에 대해서, 그 다음번에는 <없이는> 이런 식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쇠뿔은 단김에 빼야한다는 소리가 있나 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사랑은 상상의 산물로, 시적이기 때문에 원고지 두장 이내로 압축하여 표현하는 것이 훨씬 약발이 잘먹는다는 것, 혹은 세 글자 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겁니다.

세 글자가 뭔지는 아시겠죠?

나는 너를 ( )!

* ( ) 안의 정답을 말하시오.(주관식)

This Post Has 5 Comments

  1. 善水

    사랑해!

    아우~너무 재밌어요~~~>.< ㅋㅋ 그 여동생 왠지 제동생과 느낌이 비슷해요-.-;; 눈치없는것하며...ㅋ

    1. 여인

      딩동댕~!

      눈치없기는 바로 접니다.(눈치 + 터이밍 = 으 속터져~)

      오늘 포스트를 읽으면서 동생분이 몹시 신중한 것 같던데…

  2. 아유.. 문제가 왜. ㅋㅋㅋㅋㅋ
    재밌네요. 그 여동생이 더 궁금해지네요. 귀엽고.

    1. 여인

      그 여동생 마음에 들기 위해 그 날 고생 많이했습니다.
      기억이 가물한데 똑똑하고 발랄하고 예쁜 아가씨였죠.

  3. 旅인

    truth 09.01.10. 14:56
    사랑해..^^ perfect 입니다. ㅎㅎ 아주 멋지게 맛깔스레 마무리가 제대로된듯합니다. 여인님 일생중 그녀들의 출현은 감초같았다여겨져서 다들 사랑스럽기만하군요..^^ 덕분에 알지도못하는제가 이렇듯 산뜻한재미를 솔솔누릴수있으니요.. 잘 대하였습니다 . 나누심에 늘 감사드려요..^^
    ┗ 旅인 09.01.11. 09:02
    여자친구가 없었다면 무슨 추억이 있겠습니까? ^^

    스윗 노벰버 09.01.10. 16:37
    아, 너무 재밌습니다. 여인님…ㅋㅋㅋ, 너무 앙증맞습니다. 중요한 건 사랑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리고 고백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랑하느냐의 차이같아요. 그게 맞지 않으니 연인들이 헤어지고 부부가 이혼하는 거겠죠? 각자 사랑방식에 맞는 상대를 만나야한다는 것, 그리고 대화가 가능해야한다는 것… 혼자 짝사랑하면 편지쓰고, 고백하고, 폐기하고…그럴 수고가 없어서 좋지만요. 그래도 고백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리는…^^; 이번 버전은 짝사랑이 아닌 고백버전이군요. ㅎㅎ, 다양한 경험담을 엿듣는 재미…^^,
    ┗ 旅인 09.01.11. 09:01
    제가 이래뵈도 할 것은 다 해봤습니다.^^

    다리우스 09.01.11. 01:56
    헉 간주곡에다 퀴즈까지,,,ㅎㅎ 재밌게 잘 읽습니다.
    ┗ 旅인 09.01.11. 09:03
    잘 읽으셨다면, 정답은…?
    ┗ 다리우스 09.01.11. 09:12
    사랑해?
    ┗ 旅인 09.01.11. 10:48
    주관식에는 각자의 몫에 해당하는 정답이 있을 뿐이죠^.~
    ┗ 스윗 노벰버 09.01.12. 02:02
    “만났어”, 제 답입니다^^,

    샤론 09.01.11. 13:34
    여인님처럼 재미있는 분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그 여자분은 분명 연애기간이 엄청 재미있으셨으리라…주관식 …러브미..러브유…
    ┗ 샤론 09.01.11. 13:36
    그 시절에 야통이 있었나요? 어느시대 분이신가요?
    ┗ 旅인 09.01.11. 15:03
    유신시대에 대학을 다녔습니다.

    라비에벨 09.01.11. 17:42
    정답 : 미워해…^^
    ┗ 旅인 09.01.11. 20:46
    현영 스타일이요? 아잉 자기 (미워~) 땡! 그것은 두글자인뎁쇼^^

    유리알 유희 09.01.12. 09:14
    ㅎㅎㅎ. 재미있네요. 근데 퀴즈는 모르겠어요. 뭐죠? 갈쳐 주시면 안 잡아 먹슴다. ㅎㅎ
    ┗ 旅인 09.01.12. 10:26
    정답 많이 나왔습니다.
    ┗ 유리알 유희 09.01.12. 17:37
    음! 안 갈쳐 주시는군요. 그럼 저는 칼을 갈아야 하는겨? ㅋㅋㅋ

    산골아이 09.05.16. 21:32
    사랑은 언제나 비껴나고 엇갈리고 뭐 그런 거 아니겠습니다. 한동안 만났던 그 숱한(내가 숱하게 만난 남자를 헤아리는 중…) 이성과. 엇갈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폭탄머리를 해 가지고 바가지를 득득 긁어내고 있겠지요. 그래서 빗나간 사람은 언제나 그리운 수채화로 남겨져 있습니다.
    ┗ 旅인 09.05.16. 21:56
    폭탄머리도 그 세계에선 퍠션입니다. 아줌마들의 세계를 그렇게 평가절하하지 마십시요. 그 세계에도 고유한 문화가 있는 법입니다. 하지만 전 아가씨들의 문화가 끌리더라고요^^
    ┗ 산골아이 09.05.16. 22:47
    저 아직 아가씨에요. 보건복지부 아가씨는 애지녘에 떼어버리고… 법무부 아카씨아….. ㅎㅎㅎㅎ
    ┗ 旅인 09.05.17. 08:23
    공무원이신 모양이네요? 하긴 저도 고시에 합격하긴 했습니다. 이종보통면허…
    ┗ 산골아이 09.05.17. 11:31
    아이 참, 여인님 형광등처럼 깜박이시다니… 보건복지부(숫처자냐 아니냐 ) 법부부(호적상 결혼에 꼴인했는냐 못했는냐) ㅎㅎㅎ
    ┗ 旅인 09.05.17. 12:16
    물론 제가 아무리 눈치가 없다기로서니 그 정도야… 알지만 서두 복지부, 법무부하니까 신씨 등 요즘 짜증나는 사람들이 하두 설래발을 쳐대기 땜시 저도 삼수 만에 고시에 합격했다고 자랑하려고…
    ┗ 산골아이 09.05.17. 13:26
    앗! 고시… 그렇군요. 여인님의 고시에 합격하는 건 당연하지요. 여인님처럼 모든 지식을 두루 섭렵하신 분이 법무부에 앉아 계셔다면 지금쯤 이나라 꼴이 이정도는 아닐되었을텐데… 아쉽네요. 쩝….
    ┗ 旅인 09.05.17. 16:01
    이종보통자동차면허고시에 합격하고 맨날 과속 딱지떼고 그런 중인데…죄송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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