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을 읽으며

能記(기표)는 그 본성 상 없는 것의 상징이란 점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단위다(라캉)

그렇게 꽃들이 져버렸다. 너무도 순식간이어서 벚꽃이 피고 목련이 환하게 빛을 발하는 것이 꿈이 아니었던가 싶다. 벚꽃이 바람에 분분히 떨어져내리는 것을 미소로 바라보았으면서도 어느덧 사라져버린 봄날의 꽃그림자는 믿을 수가 없다. 아직 봄 속에는 지난 겨울의 냉기가 사라져 버리지도 않았건만 낮은 더웠다.

조승희가 버지니아 공대에서 총성을 울리던 날에 나는 까발라와 관련된 책을 사서 읽고, 그 빈곤한 종교적 사유에 조소를 날릴 수 밖에 없었다. 종교적 지식으로 세상의 온갖 진리를 아우르겠다는 것 또한 망상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조승희가 동창들에게 난사를 한 이유를 알고 싶어 망상증이나 정신분열증을 네이버에서 찾아보았다.

거기에는 아무런 확고한 개념적 정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읽으면 나 또한 정신분열증이거나 아니면 과대망상증이나 피해망상증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 설명이 빈한한 이유는 모든 정신적 질환에는 뚜렷한 발병의 원인, 박테리아 등의 병원균이 없기 때문이다. 원인을 모를 경우 늘 결과인 질병은 모호하기가 그지 없다. 열이 있다고 다 감기가 아닌 것처럼…

그래서 라캉(J.Lacan)을 다시 읽고, 라캉의 난해성 때문에 노트를 만들고 있다.

결국 라캉 또한 알 수 없는 주체에 대하여 장대한 가설을 설정한 것이 아닐까? 갈홍은 포박자에서 <설명하기 쉬운 것이 진리다>라고 말한다. 라캉의 드라마는 난해하지만 그 가설은 정합성을 지니고 상당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말하여지는 것의 의미(기의)를 따지지 않고, 말하여지는 것(기표)으로만 심리학의 체계를 만들어 간 그의 천재성에 감탄을 하면서도, 정신분열증과 같은 그의 언어 속에서 혼미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혼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갈홍의 말처럼 우주의 움직임에 대한 가장 <설명하기 쉬운> 모델이었음에도 <진리>로 받아들여지기에는 천동설이라는 앙시앙 레짐에 저들이 빠져 있었던 것처럼, 나는 자아라는 존재하지 않는 망상에 길들여져 있던 것이 아닌가?

라캉을 다시 읽으며, 짧았던 초봄의 꽃들의 열광이 사라져 버린 길을 지나며, 모든 생명 속에는 삶의 찬란한 광기가 빤짝이며 죽음으로 치열하게 달려가는 것을 보게 된다.

PS: 진리나 삶이나 사랑 등등의 내가 알지 못하는 의미들, 향후 내가 아는 선까지만 풀어쓰기로 한 결심을 이 글에서조차 실행치 못한다.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애린]
    타인의 기표를 해석하는 일은 여인님의 말씀처럼 언제나 가설일 수 밖에 없고 타인을 통해 내 기표의 의미를 알게되는 일은 –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경우라 해도 – 당황스럽고 섬뜩해서 피하고 싶습니다.;;
    [여인]
    라깡의 글을 읽다 보면 마치 금지된 정원에 들어선 느낌이 듭니다. 알아서는 안되는 것을 알고 싶어하는 탐험의 끝에 [인간]이 무엇인가를 찾았을 때, 그 보물섬은 과연 보물섬인지 아니면 역사적 쓰레기 더미일지…?
    그러나 뿌리가 없는 말들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아무 것도 알수 없다]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미친 언어들이 허공을 떠도는 광란 외에는 알 수 없으며, 미친 언어들을 쓸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은 누구나 미친 상태일 뿐이라는 것만 알 수 있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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