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삼혜 중 석명언

哲學三慧 中 釋名言

이 글은 方東美 선생의 글이다. 방동미 선생은 1899년에 중국 안휘성에서 태어나 대만대학에서 봉직한 新儒學의 대표자이다. 도올의 스승인 김충렬 교수가 이 분의 직전 제자이며, 도올 또한 이 분 밑에서 동양철학을 배운 바 있다.

사실 방교수의 이 글을 번역해 보고자 수차 시도해 보았으나 끊임없는 좌절을 맛보았을 뿐이다. 대만에 동양철학 배우고자 유학했던 선배에게 본문의 번역에 한계를 느낀다고 토로했더니, 이 글은 한문이 백화문으로 전환하는 시대에 나온 고백화문으로 한문 해석의 애로와 백화문 번역의 애로점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글이라고 하였다. 나와 같이 보통화 한마디, 한문 또한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 아마추어에겐 번역을 한다는 것이 분명 무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애로점에도 불구하고 전문에 흐르는 내용이 단지 철학자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아니라 정치가, 문필가, 직장인 등 모든 보통인에게 보내는 삶에 대한 자세와 지혜에 대한 이야기로 지인들과 함께 뜻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늘상 있어왔다.

이러한 글은 한번에 해석하기 보다 몇 번을 곱씹고 또 씹어 뜻이 자연히 살아날 수 있도록 해야 번역의 묘를 살릴 수 있을 것이나, 일단 광역(狂譯: 미친 번역)을 시도한 후 조금씩 수정· 보완해 가고자 한다.

一. 太初有指 指本無名 熏生力用 顯情與理.

1.1 情理爲哲學名言系統中之原始意象. 情緣理有 理依情生 妙如連環 彼是相因 其界繫統會可以直觀 難以詮表.

1.2 總攝種種現實與可能境界中之情與理 而窮其源 搜其眞 盡其妙 之爲哲學.

1.3 哲學意境內有勝情 無情者止於哲學法門之外 ; 哲學意境中含至理 違理者逗於哲學法門之前, 兩俱不入.

一. 태초에 무엇이 있었다. 무엇은 본시 이름이 없었으나 서로 스며들고 힘과 쓰임새가 생기자 감정과 이성이 드러났다.

1.1 감정과 이성은 철학 술어 중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감정은 이성에 연유하고 있으며, 이성은 감정에 따라 생긴다. 서로 오묘하게 얽히고 영향을 미치는 까닭에 연결·종합되는 것은 직관으로 알 뿐, 밖으로 설명하기란 어렵다.

1.2 현상계와 가능(Idea)계를 통털어서 나타나는 감정과 이성의 활동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그 근원을 궁구하며, 진리를 찾고, 활용도를 극대화하는 것이 철학이다.

1.3 철학의 세계 속에 뛰어난 정감이 있는 바, 감정이 부족한 자는 그 법문의 밖에 머물 것이며, 철학의 경계 속에 지극한 이치가 있는 바, 이성을 거스르는 자는 그 법문의 앞에 멈출지어니, 모두 그 안에 들지 못하리라.

二. 衡情度理 遊心於現實及可能境界 妙有深造者謂之哲學家.

2.1 情理境界有遠近 有深淺 有精麤 ; 有顯密 出乎其外者末由窺測 入乎其內者 依聞∙思∙修之程度而定其等差 故哲學家有大小之別.

2.2 人類含情而得生 契理乃得存 生存原爲人類根本權利 故哲學之在宇內 勢用可以周徧圓滿 其有反對哲學 輕心以求生存者 常墮於無明 人之大患端在無明!

二. 정서와 이치를 형량하고, 현상과 가능 세계 속을 소요하면서, 탐구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는 자야말로 철학자이다.

2.1 감정과 이성의 영역에는 遠近, 深淺, 정밀함과 조야함, 드러남과 감추어짐이 있다. 법문 밖에 있는 자는 엿보고 헤아려도 지엽에 불과할 것이고, 그 안에 들어선 자도 배우고, 생각하고, 실천의 정도에 따라 차등이 생긴다. 따라서 철학가도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2.2 인류는 정서를 지님으로써 삶을 얻고, 이치에 따르기에 삶을 이어간다. 생존은 본시 인류의 근본 권리이다. 따라서 철학은 우주 내에서 그 미침과 쓰임새가 두루 원만해야 한다. 철학에 반대하는 것은 마음을 가벼이 하면서도 살기를 바라는 것인 바, 늘상 어리석음에 빠질 뿐이다. 사람에게 있어 큰 우환의 실마리는 어리석음에 있다.

三. 人生而有知 知審乎情 合乎理 謂之智. 智有所緣之謂境 境具相狀 相狀如實所見 是謂智符. 人生而有欲 欲稱乎情切乎理 謂之慧 慧有所契之謂界 界闐精蘊 精蘊如心所了 是謂慧業.

3.1 智與慧本非二事 情理一貫故 知與欲俱 欲隨知轉 智貫欲而稱情合理 生大智度; 欲隨知而悅理怡情 起大慧解. 生大智度 起大慧解 爲哲學家所有事 大智度大慧解哲學家所託命.

3.2 知有是非 故智分眞僞 ; 欲有靜染 故慧分圓缺 演事理而如如 趣於眞智 契性情而化化 依乎圓慧 是哲學家之理想生活.

三. 사람이 태어나고 앎이 있다. 앎이 감정과 통하고 이성에 합치하면 이것을 밝다고 한다. 밝음이 연유하는 곳이 바로 외부 세계이며, 여기에는 대상세계가 구비되어 있다. 대상과 본 바가 같고 진실되면 이를 밝음의 표상이라 한다. 사람이 태어나고 바램이 있다. 바램이 감정과 어울리고 이성에 따를 때 이를 슬기롭다한다. 슬기로움은 내부 세계와 연관되어 있으며, 여기에 정신과 인식이 갖추어져 있다. 받아들인 것과 인식 사고한 바가 같고 마음에 합하면 이를 슬기로움의 지음이라 한다.

3.1 밝음과 슬기로움은 둘로 나뉘어진 것은 아니다. 감정과 이성은 서로 통하는 까닭에 앎과 바램이 함께 한다. 앎이 움직이면 바램이 따르고 밝음과 바램이 통하는 까닭에 감정을 바르게 하고 도리에 맞아 세상을 살아가는 큰 밝음(大智度)을 낳는다. 바램이 앎을 따르는 까닭에 순리에 따르고 정감에 드니 만사를 풀어나가는 슬기로움(大慧解)이 있다. 大智度와 大慧解를 만들어가는 것이 철학가의 할 일이요, 大智度와 大慧解는 철학가에게 위탁된 사명이다.

3.2 앎에는 옳고 그름이 있는 까닭에 밝음은 참과 거짓을 가리며, 바램에는 깨끗함과 더러움이 있기 때문에 슬기로움은 바른 것과 어긋난 것을 가린다. 참된 밝음에 따라 만사가 이치에 맞아 그러하며, 원만한 슬기로움에 의지하여 본성과 감정이 화합할 때, 이를 철학가의 이상생활이라고 한다.

四. 此標三慧 非聞思修 『聞所成慧 思所成慧 修所成慧』乃哲學境界之層次 哲學功夫之階梯 聞入於思 思修無間 哲學家兼具三慧 功德方覺圓滿. 聞所成慧淺 是第三流哲學家; 思所成慧中 是第二哲學家; 修所成慧深 是第一哲學家. 修而不思 思而無聞 爲哲學之倒行; 思不與聞修俱 爲哲學之逆施; 聞不與思修俱 爲哲學之竭澤而漁.

4.1 哲學智慧生於各個人之聞∙思∙修 自成系統 名自證慧. 哲學智慧寄於全民族之文化精神 互相攝受 名共命慧. 本篇銓釋依共命慧 所論列者 據實標名哲學三慧 ; 一曰希臘 二曰歐洲 三曰中國.

四. 여기에서 거론하는 三慧는 단순한 배우고, 생각하고, 실천함은 아니다. 배워서 얻은 지혜, 생각하여 이룬 지혜, 실천하여 쌓은 지혜이다. 따라서 철학의 경계에 층차가 있고, 공부에 단계가 있다. 배우면 생각하며, 생각과 실천 사이에 빈틈이 없을 때, 철학가는 삼혜를 고루 갖춘 것이며, 그 공덕과 깨우침이 원만하다. 배워서 얻은 지혜는 얕으니 삼류 철학가이며, 생각하여 이룬 지혜는 중간 정도이니 이류철학가요, 몸소 실천하여 쌓은 지혜는 깊으니 일류 철학가이다. 실천하되 생각하지 아니하며, 생각하되 배우지 아니하는 것은 철학을 거꾸로 하는 것이요, 생각하되 배우고 실천함을 구비치 못하는 것은 철학을 거꾸로 베푸는 것이요, 배우되 생각과 실천을 함께 하지 않는 것은 마른 연못에서 고기를 잡겠다는 것과 같다.

4.1 각 개인이 배우고, 생각하고, 실천함으로써 스스로 이룬 철학 지혜를 스스로 밝힌 지혜(自證慧)라 하고, 전민족의 문화 정신에 상호 간에 영향을 준 철학 지혜를 함께 받은 지혜(共命慧)라고 한다. 본편에서는 共命慧를 상호 비교해 가며 풀어나갈 것이다. 그 실체의 지류를 들어 철학삼혜라 하니, 하나는 그리스, 둘은 유럽, 셋은 중국이다.

– 대만 삼민서국간 철학삼혜 중 釋名言 –

<번역후기>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번역을 시도한 것은 잘못이었다. 우선은 방선생의 글 속에 스며있는 정서적인 유려함과 에너지를 살려내지 못하였다는 데 있고, 다음은 이 글이 작성된 시기가 한문과 백화문이 충돌하는 시기이고, 서구의 명료한 술어에 대응되는 과학적인 용어가 중국에서 안출되고 고착화되기 이전인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방선생의 뜻을 살리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읽는 이들에게 글의 의미조차 전달치 못했다는 참담함, 즉 똥 밟는 기분을 어찌할 수가 없다.

철학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진부하여 비웃음을 짓게 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소학, 대학, 철학으로 단계를 지어보면 소학은 일상의 실천윤리의 배움이고 대학은 격물에서 평천하하는 궁리와 정치윤리의 배움이라는 측면에서 스케일의 차이가 있다면, 철학은 밝은 학문으로 대·소학이라는 X축의 스케일 차원에서 깊이와 통합이라는 Y축의 질적인 차원으로 전환된다.

東哲과 西哲에 구분이 있을까마는, 구분하자면 프락시스(實踐智)와 테오리아(理論智)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실천지는 현실세계 내에서 사해만민의 도덕을 바르게 하고 복리를 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나, 이론지는 실천보다 관념과 인과율에 중점을 둠으로써 분과학이 발달할 토양을 지닌다. 결국 동양은 가치(사람이 느끼는 것) 중심적인 전통을 갖게 되고 서구는 진리(우주의 질서) 추구의 전통을 지니게 되었다. 따라서 동양에서는 문사철의 인문학적 학통이 강한 반면, 서구에서는 과학적 학통이 강한 특징을 지닌다.

방동미 선생의 글에서 특징적인 것은 서양철학의 이성 일변도에서 벗어나, 정(감정)과 리(이성)가 병립적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동양철학이 드라이한 분과학보다 역동적이고 유기적인 학문 체계를 구축하게 된 기본 동인인 것 같다.

그리고 배우고(In-Put), 생각하고(Process), 실천한다(Out-Put)는 것을 통해서 슬기로움을 가꾸어 간다는 그것은, 소학과 대학을 포괄하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의 위치를 정립하는 하나의 방법서설이 될 것이다.

This Post Has 2 Comments

  1. 旅인

    [애린]
    전 읽기 어려운 글은 내용이 어려워서라기 보단 문장 자체의 결함에 기인한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글은 내용이 딱딱해서 그렇지 여인님께서 해석한 문장은 매우 훌륭합니다. 이렇게 평가하는 것도 제 주제를 넘는 일입니다만 지나치게 겸손하신 것 같아서요. 여인님의 정신세계는 짐작하기가 힘듭니다. ㅠ.ㅠ
    이성에 비해 감정은 본능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무시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전 궁극의 이성에서 궁극의 감정도 나온다는 말에 동의합니다.물론 이 말은 앞.뒤를 바꾸어도 무방하겠죠. 이성과 감성 그리고 실천력, 어느 하나라도 결핍된 지성은 절름발이 지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인]
    방선생의 글은 그 풍모가 몹시도 문학적이면서도 광대하며, 정감적이란 점에서 매력이 있습니다만(그가 광대화해란 단어를 즐기듯), 제 번역에서는 방선생의 웅변적이고 서사적인 느낌을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글을 읽으면, 생생불식하며 대해광탕하는 생명의 느낌이 가득한 데… 이 글에서는 살리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한국어로 번역된 유일한 책인 [중국인의 인생철학]을 읽을 때도 참으로 그 맛을 살리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이것이 번역의 아쉬움인가 봅니다.
    살다보니까 IQ보다 EQ가 더욱 지혜나 지성과 가까운 것이 아닌가 싶은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EQ가 낮을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애린]
    제 포스트는 펌에 의존한 글이라 망설이다가 트랙백을 보냅니다. 근데 윗 덧글을 작성할 때 비밀번호를 넣지않았더니 수정이 안되는군요. ㅠ.-
    전 스스로 책을 많이 읽진 못했지만 아주 적게 읽은 편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도무지 어휘력이 늘지 않아 고민입니다. 글쓰는 재능은 음악이나 회화처럼 상당 부분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제 부족한 글쓰기에 대한 변명이 가능하지만 부족한 어휘력에 있어선 어떤 변명도 생각해 낼 수가 없네요. 여인님의 해박한 지식과 적확한 어휘력 앞에서 울고 있는 1人…
    [여인]
    무슨 말씀을……
    어휘는 모두가 부족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 부족한 탓은 결국 자신의 삶의 테두리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제가 볼 때, 애린님의 글(어휘의 사용)은 제가 본 블로거들(그러나 거의 프로 경지를 넘어선)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고 봅니다.
    단어가 춤을 추어 도저히 어휘의 진면목을 바라볼 수 없는 [푸른 목숨]의 마콘도님과 단어에는 날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La Strada] 클라투님, 문득 한숨을 쉬게 하는 [카피최의 여행일기]의 카피최님, 한때 아침마다 배달되는 세상에 대한 백과사전과 같았던 isist님(지금은 블로그를 접었습니다)의 글, 그리고 어휘의 끝에 옅은 색이 배어나는 애린님의 글이 있습니다.
    사실 마콘도님이나 클라세님, 카피최님은 댓글 교신이 어려운 분들이라 글만 읽고 지나는 형편입니다. 그나마 isist님은 몇번의 대화는 나누었지만 블로그를 그만 하셔서 섭섭하던 차에 애린님이 동무를 해주시니… 저의 영광이올씨다.

  2. 旅인

    旅인 08.12.30. 10:30
    본 글은 방동미 교수의 철학삼혜 중 서언에 해당하는 글입니다. 한자 중 일부는 깨져있는 바, 근일 내로 보완토록 하겠습니다.
    ┗ 자유인 08.12.31. 00:22
    한번 더 읽을 기회를 주심도 감사하구요.여인님 대단한 내공에 찬사와 감사를.. ^^
    ┗ 旅인 08.12.31. 12:58
    전에 이 글을 읽으실 기회가 있으셨던 모양이네요?
    ┗ 자유인 08.12.31. 22:36
    본문중 “정서적인 유려함과 에너지를 살려내지 못하였다는”부분을 읽고 다음에 수정본을 올려 주시리라 여기며 그때 한번더 읽고 싶다는 댓글였습니다.감사합니다.(두개의 글 스크랩했습니다.)^^
    ┗ 旅인 09.01.02. 00:21
    이 글 번역하는데도 너무 고생을 해서 다시 번역에 손을 대볼 염두가 나질 않네요.^^

    다리우스 08.12.30. 15:32
    아 예 이렇게 멋진 한자가! 철학삼혜 잘 읽겠습니다.
    ┗ 旅인 09.01.02. 00:35
    그렇죠? 본시 방교수는 한학을 하다가 서양철학을 전공, 그 후 다시 동양철학에 경도되어 20세기를 대표하는 신유학의 리더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민국 60년(1972년)에 초간되었다고 하나, 아마 이 글이 학술지에 실린 것은 남경대학살 몇년 후인 것으로 압니다.

    러시아황녀 09.01.01. 22:29
    철학에 감성이 필요하고 그 것이 부족한 자는 그 경계에 들어 설 수 없다.. 대단합니다.. 저도 스크랩 합니다..
    ┗ 旅인 09.01.02. 00:37
    이것이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경계면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립다능..^^*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