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칼의 노래

임진년 바다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 많았고,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가장 확실하고 가장 절박하게 내 몸을 조여오는 그 거대한 적의의 근본을 나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으나, 내 적이 나와 나의 함대를 향해 창검과 총포를 겨누는 한 나는 내 적의 적이 었다. 그것은 자명했다. 내 적에 의하여 자리매겨지는 나의 위치가 피할 수 없는 나의 자리였다. 싸움이 끝나는 저녁 바다 위에서, 전의가 잠들고 살기가 빠져나간 함대는 비로소 기진했고 노을 헤치며 모항으로 돌아가는 항해 대열은 헐거웠다.그 저녁에도 나는 적에 의해 규정되는 나의 위치를 무의미라고 여기지 않았다. 힘든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결국 어쩔 수 없다.

<생각과 나무 刊 칼의 노래 1卷 71쪽에서>

김훈은 이 글을 쓸 때, 그의 내면에는 사백여년 전 그 자리로 가서, 이순신, 그가 되어 치열하게 조여오는 적들을 대면했다. 그리하여 그는 적의 적이 되었고, 이순신의 이름으로 칼(펜)을 들어 어쩔 수 없이 이 글을 썼다.

김훈의 글이 가진 사유가 나는 마음에 든다. 적을 나의 적으로 규정하는 일은 쉽지만 적의 적이 나라는 것은, 몹시 난해하고도 피곤한 사유이다. 즉자적인 나는 살기 위하여 두려움에 벌벌 떨며 적에게 칼질을 하지만, 적에게 있어 나란 이유도 없는 적의와 광기에 들떠 피범벅이 된 칼을 들고 달려드는 공포의 그 무엇이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나와 공포의 대상으로 적 앞에 존재하는 적으로서의 나를 안다는 것은 결국 병법(兵法)의 요체(知彼知己)인 것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일을 결국 어쩔 수 없는 일로 이해하는 것이란 얼마나 단호하고 처량한 사유인가?

다시 칼의 노래를 읽는다. 그의 일러두기 첫머리에는 <이 글은 오직 소설로 읽혀지기를 바란다>라고 썼다. 그러나 김훈의 요청대로 읽을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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