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술

기술이라는 단어가 유행이다. 싸움의 기술, 연애의 기술 등의 영화 제목에서 보듯 현대는 모든 것을 테크롤로지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어느 시대에도 그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는 <이상>의 말대로, 싸움이나 연애의 본질에 이르지 못한 자들이 테크닉을 탐하게 마련이다.

싸움에는 이기는 것이 본질이지 품새가 아니다. 연애의 기술에 집착하다보면 정작 사랑에 도달하지 못하고 여관이나 모텔 때로는 호텔 이름이나 기억할 뿐이고 자신이 만났던 연인의 이름마저 까먹어 버리는 절망적인 사태에 이르기도 한다.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이 있다. 원제는 The Art of Travel이다. 저자는 알렝 드 보통(Alain De Botton)이라는 보통스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다.

대체로 Art가 붙어있는 책치고, 논점이 명확한 책을 본 적이 없다. 멋들어지게 연애를 한번 해 보겠다고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샀는 데, 결국 히틀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가학성 음란증과 피학성 음란증을 읽게 되었을 때, 그 책은 집단적 변태성욕에 대한 어쩌고 저쩌고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실 이 <여행의 기술>을 서점에서 살 때, 책의 일부분을 보고 샀다.

내가 본 구절은

하렘의 여자: 모든 동양 여자는 하렘의 여자이다.
야자나무: 지방색을 제공한다.

등의 플로베르의 <기성관념 사전>에서 발췌한 것들이었다.

이 글들이 플로베르의 글임을 알지 못한 나는 이 구절들을 읽으면서 이 보통스러운 사내가 상당한 유머가 있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이 상당히 우울하지만, 박식한 사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글에는 아무런 감탄이 없다. 더 멋진 여행을 상상하며 이 책을 산 사람들에게 그는 여행이 쓸데없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여행에 대한 매혹적인 환상을 갖기 이전에, 여행이 무엇인가에 대한 조촐한 사유는 필요하다. 드 보통은 여행이란 실질적인 면에서 즐거운 것이 아니라, 때로는 불편하고 불쾌한 것이기도 하며, 여행사의 사진과 같은 풍경과 그에 상응한 기쁨을 여행이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한다.

보들레르는 늘 떠나기를 갈망했지만, 갈 장소에 대하여 갈팡질팡했으며, 늘 도착한 곳에서도 무기력과 슬픔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고 한다. 그것은 그가 갈망한 것이 여행이나 목적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라도! 어디로라도!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다면!”하는 뿌리없는 갈망에 있었다고 한다.

이집트 여행에 대한 갈망에 허덕이던 플로베르는 아버지가 죽고 거대한 유산을 받자마자 즉시 배를 탔고 이집트에서 한동안 머문 후 결국 이집트에 대한 환상을 접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여행에 대한 기대와 그 현실 사이의 관계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다보면 여행을 하게 되는 이유란, 결국 멋진 여행사의 안내책자나 사진 때문이 아니라, 칙칙하고 끈적거리는 일상으로 부터 무조건 떠나고 싶다는 충동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워즈워드나 고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레이크디스트릭트나 프로방스는 여행지가 아니라 살던 곳이나 작업을 위하여 정주한 곳이다. 단지 드 보통에게 여행지였을 따름이다.

그는 이 두 곳을 통하여 워즈워드가 시골과 와이강과 새들, 온갖 동물과 도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또 고호가 프로방스에서 사물을 어떤 눈으로 보았는가를 우리에게 설명해준다. 그의 설명은 친절해서 워즈워드의 시가 지닌 사색적인 특성과 건강함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고호가 플로방스에서 그린 싸이프러스 나무의 곱슬머리처럼 웨이브진 모습과 색채의 강렬함은 그의 눈이 지독한 난시(어느 잡지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때문이 아니라, 프로방스에 부는 건조한 바람(미스트랄)은 안개와 구름 때문에 만들어진 프랑스의 흐릿함을 일소하고 강렬한 태양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고호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그리기 보다 진정한 것을 그리고자 했으며, 그때 밝은 태양 아래 미스트랄을 받으며 휘청거리는 싸이프러스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는 빛 아래 흔들리는 사이프러스의 줄기와 잎을 자신이 느낀 그대로 표현했을 뿐이지, 파리 기성의 화법에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분명 알렝 드 보통의 글은 재미는 없다. 화려하기 보다 축축하다. 그것은 여행에 대하여 감상적인 입장이 아니라, 평론가적인 입장에서 접근한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의 글에는 어둔 방에 탁상전등을 켜고 보는 듯한 고요함이 있고, 우리가 간과했던 것을 상기시켜줌으로써 공감을 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힘이 있다.

<사족>

旅行의 旅는 군대이다. 그러니 여행이란 군대의 움직임이다. 동양의 고대 농경사회에서 사람들이 먼 곳으로 가는 일이란 드믄 일이어서, 전쟁이 나야 장정들은 먼 곳으로 가 볼 수 있다. 그래서 주역에는 旅는 길한 일이 적다고 한다.

ART에 대한 번역은 늘 기술이라고 되어있다. 예술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여행의 예술이라면 표현이 너무 지나치게 되어 오히려 그 여자 몸매가 예술이네! 하는 류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기술은 Art라는 의미를 포괄하기에는 너무 딱딱하다.

참고> 여행의 기술

This Post Has 5 Comments

  1. 보통의 글이 재미없나요? 저는 참 재밌던데. 보통의 글을 문학이라고 보지않고.. 저는 그냥 철학이라고 생각하고 읽었어요..
    그래도 이런 소설가 하나 있는 것.. 참 좋은 일 같아요. 저는.

    1. 여인

      서점에 가다보면 사고는 싶은데, 책 값이 생각나는 책이 딱 알랭의 책입니다. 사실 알랭의 글이 저에게 몹시 적당하고, 그의 온건한 상식이 좋고 위트도 있지만 책을 덮고 나면 뭔지 모르게 싱겁다는 느낌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 책 이후에 <불안>과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을 읽었지만 동일한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글은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입니다.

  2. 클리티에

    저는 이 책이 좋아 chapter별로 야금 야금 읽었던 생각이 납니다.
    이 책이 만약 여행지에 대한 정보와 여정만을 기술하고 있다면, 세계적으로 읽히지도 않았겠죠. 그런 종류의 책은 넘치디 넘치고, 흔하디 흔하니깐요.

    책의 곳곳을 채우고 있는 흑백 사진들과 소개되는 예술가들의 그림, 혹은 시와 산문등에서 인용된 문장들이 참 좋았었습니다.

    아, 그리고 그동안 왜 여인님의 여가 旅일까.. 궁금했었는데.. 답이 되었습니다. ^^

    1. 旅인

      알랭 드 보통의 글은 항상 서점에 가면 살까 말까를 고민하게 되는 책입니다.

      얄미울 정도로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절묘한 인용 그리고 핵심을 간파하는 예리한 눈에 위트까지…

      하지만 그의 글을 읽다보면 원전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데, 거기까지 갈 능력이 없어서…

  3. 旅인

    [애린]
    산 바로 밑 민박집에서 하룻밤 묵은 적이 있는데 자고 일어나서 커피를 찾으니 어디에도 없는 겁니다. 없으니까 더 간절해서 정말 환장하는 줄 알았죠. 제가 원래 몸이 고생하는 여행을 무척 두려워했어요. 텐트에선 한 번도 자 본 적이 없고 심지어 베개까지 싸들고 간 적이 있었죠. 여행 가방의 크기가 곧 그 사람 불안의 크기라고 하던데 절 보고 한 말인가 봅니다. 요즘은 여행지에서 물품이 부족해 곤란을 겪는 일이 드물기도 하지만 혼자서 이곳저곳 싸돌아다니면서부터 몸고생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어요.
    어르신들 단풍구경 가는 심정으로 떠나는 여행과 이곳이 아니라면 어디든 좋다는 심정으로 떠나는 여행은 많이 다릅니다. 전 후자의 경우가 더 많아서 여행지의 풍경에는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 편입니다. 여행도 일종의 꿈이라면 하나 정도는 이루려 애쓰지 말고 그냥 둬도 좋을 것 같아요. 플로베르의 이집트처럼요.
    사족을 참으로 재밌게 읽었습니다. 오늘날 예술이란 단어의 아우라는 정말이지 처절하게 추락했죠. 그래서인지 기술이란 말이 더 적절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행의 기술, 사랑의 기술, 상실의 기술…
    [여인]
    저도 몸이 고생하는 여행은 질색입니다. 가장 쾌적한 몸상태를 유지하여야 더욱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점과 즐거운 여행이 되기 위해서는 피로하지 않아야 되죠. 한 여름에 텐트에서 한번 자 보니 더 이상 텐트에서 잘 생각이 들지 않더군요.
    관광과 여행의 차이라면 저는 관광은 목적지가 중심이고, 여행은 여기에서 목적지까지의 이동과정이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관광은 “자! 여기가 우리가 오려던 그 곳입니다. 카메라 꺼내셔서 맘놓고 찍으십시요.”식이겠지요.
    칼 구스타프 융은 이집트에 가 보고 싶은 열망을 간직하면서도 두려워서 가보질 못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마침내 진실을 알아버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는 가 보질 못했다고 합니다.
    저 또한 인도에 가보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나도 모르는 두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저를 두렵게 하는 것의 실체를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말입니다.
    [애린]
    여인님의 열망은 인도, 저는 사막이네요. 사막이라도 사하라 사막 쪽이 좀더 끌립니다. 인도를 다녀오신 분들은 대개 극과 극의 반응을 보이더군요.
    [여인]
    인도에 가면 천국과 지옥을 함께 볼 수 있다는 것 이야기 때문에 가고 싶습니다. 저의 눈으로 천국을 볼 능력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지옥과 열기만 보고 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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