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양식

대학 1학년 1학기 때인가? 국문과를 다니던 사촌누이가 우리 집에 살 때, 한 번인가 내 방에 들어와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던 책을 보면서 언제 이 많은 책을 모았느냐고 했다. 60~70%는 이미 읽었다고 하자 고등학교 때 공부는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포기했던 셈이라고 말했다.

사촌누이는 그 후 내 방에서 책을 빌려가 읽곤 했다.

그리고 책 두권을 가져와 한번 읽어보라고 했다.

그것은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와 지이드의 <지상의 양식>이었다.

<아웃사이더>는 금방 읽고 돌려주었지만, 지이드의 <지상의 양식>은 결국 돌려주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마 지이드가 말한 이 책을 읽어야 할 <회복기의 환자>가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어떠한 유형의 책도 아니었다. 그 애매모호함을 간직한 채 오랫동안 읽기를 유예해 왔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열병이 들었다. 서글픔과 피로와 외로움이 뒤범벅된 그러한 병 속에서 이 책을 펼쳐들었고 한장씩 한장씩 읽어갔다.

나의 창 밖에서 회복기의 환자에게 다가오는 봄날의 햇빛처럼 여리고 나른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삶의 어긋난 틀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빛이 흘러들었고 나도 <나타나엘>이나 <메날크>와 같은 추상의 친구를 간직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후 나는 문고판을 사서 배낭 속에 집어넣고 남도를 돌아다니며, 시외버스 안에서, 아니면 완행열차가 서는 시골의 역사에서 한장씩 야금야금 이 책을 읽었다.

그러면 여행이란 더 할 수 없이 아름답고도, 고독하다는 이유로 처량한 것이 되곤 했다.

20050717 18:42

地上의 糧食

중판을 거듭하며 손이 많이 가서 푸근한 책,
그리고 젊은 시절에 매료되었던 글들이
아직도 풋풋한 책,
그리움처럼, 친구처럼 옆에 있는 책이 좋다.

늘 다시 읽고 싶으면서도, 책을 펼쳐 들면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글귀들과
믿을 수 없는 먼 곳에 대한 이야기를
나의 바쁜 가슴은 받아들이지 못하나 보다.

아니면, 예전처럼 이 책은
완행열차나 시외버스의 한쪽 구석,
외로운 여인숙의 따스한 방바닥에 등을 누이고
흐릿한 전등불 아래에서
먼 곳에서 불어오는 들 바람 소리를 들으며,
읽어야 하는 지도 모른다.

참고> 지상의 양식

This Post Has 6 Comments

  1. 흰돌고래

    으우.. 이거 정말 많이 들어본 책인데.
    여인님 글을 보니 꼭 읽어야 겠어요.
    오늘 책 두 권 빌리려다 늦어서 못 빌렸는데, 요거 부터 빌려야 겠는걸요? ㅎㅎ

    1. 旅인

      지상의 양식은 빌려읽기 보다 한권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보다 아무 곳이나 펼쳐서 조금씩 읽기를 바랍니다.

    2. 흰돌고래

      아앗.. 오늘 당장 빌리려고 했는데^^ ㅎㅎ
      아무 곳이나 펼쳐서 조금씩.. 네 감사해요 ^^

  2. 하하. 제가 다시 읽겠다고 했더니 올려두신 건 아니지요?

    1. 旅인

      아직까지도 이 텍스트큐브 닷컴의 생리를 잘 모르겠는데, 아마 이 포스트가 신규로 작성된 것처럼 올라와 있을겁니다.

      지금 태그를 정리하고 있는데, 그것 때문에 앞으로 올라온 모양입니다.

      저도 서정적…님의 글이 새로 올라와 있어서 급히 가보면 오래전에 본 글인데 앞으로 올라와 있고 날짜는 예전 그대로 인 경우가 있더군요. 그래서 잘 생각해보면 무슨 이유인지 손을 댄 경우인 것 같습니다.

      한번 다른 사람의 ID로 들어가 봐야 속성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요즘 카메라도 블로그도 심드렁해지신 것은 아니죠?

      서정적…님의 글을 기다리고 있는데, 몇일을 기다려도 글이 안올라와 섭섭한 마음으로 하루를 넘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3. 旅인

    난 향 09.02.02. 20:14
    여인님의 글을 읽으면서 ‘풍요롭다 ‘ 라는 단어가 생각났습니다..짧은 시어에서는 책 냄새가 향긋이 올라오는 것 같았구요..
    ┗ 旅인 09.02.03. 09:59
    지드의 지상의 양식에서 양식이란 난 향님의 말씀대로 풍요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느끼지 못했던 이 대지 속에 깃든 양식들을 지드는 퍼 올렸으니까요.

    유진 09.02.02. 22:17
    저는 그 시절에는 책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자체만으로 참으로 풍족함을 선사받았던 느낌이에요, 책이나 음악 따위의 모든 예술분야가 그러하고, 지금이야 넷상에서 책에관해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고 다른 이의 감상을 쉽게 접하고 배울 수 있지만.. 지상의 양식’이란 책은 제게도 조금은 특별한 의미를 건넨 책으로 남아있어요, 제가 아는 어떤 아이가 이 책을 무지무지 좋아했었거든요.. 물론 저도 덩달아, 그렇지만 旅인님 만큼은 즐기지 못한 듯해요.. 한번도 끝까지는 읽어본 적이 없거든요.. 마침 잡은 책이 없어 울적했는데.. 한번 끝까지 정독해 볼께요.
    ┗ 旅인 09.02.03. 09:56
    지상의 양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책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생각나면 책의 아무 쪽이나 열어 읽어볼 수 있는 그런 책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그래서 좋은 책, 전과 후도 없고 여기를 읽다가 저기를 읽을 수 있기에 책에 구속되지 않아도 되는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리알 유희 09.02.02. 23:00
    지금 바람이 부나요? 컴을 끄고 지상의 양식을 펼치고 싶네요. 아웃사이더는 오래 전에 읽고선 콜린윌슨을 매우 좋아했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다시 한반 들추어 봐야할 듯요. ㅎㅎ. 유진님! 우리 같이 양식을 읽읍시다.
    ┗ 旅인 09.02.03. 09:54
    아마 콜린 윌슨은 정신의 진화에 대해서 썼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조르바가 몇단계에 위치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상의 양식은 급히 갈 수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게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던 책도 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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