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두바이-6

잠시 역사로(I3)

고등학교 세계사의 경우, 이란(페르시아)의 역사는 세계사에 갑자기 편입된다. 그것도 그리스에 패배하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마라톤에서 패배(BC490)한 것과 살라미스의 해전에서의 패배(BC479), 이를 세계사 교과서에는 페르시아의 전제 정치가 폴리스의 민주주의에 패배한 것이라고 강개에 넘친 어조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마라톤에서 승리는 해방을 약속받은 노예들의 분전의 결과였고, 살라미스에서는 가진 것 없는 무산대중에게 수부로 전쟁에 참여한다면 정치적 발언권을 주겠노라고 공언함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폴리스의 민주주의가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이 아니라, 페르시아의 대군을 눈 앞에 두고 이왕 죽을 바에야 인심이나 팍 쓰고 죽자 하던 그 심사가 결국은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이끈 것이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의 선왕인 다리우스왕이 메소포타미아, 이집트를 지나 리비아까지, 인더스강의 유역까지, 흑해를 둘러싸고 그리스의 내륙까지 페르시아의 강역을 넓혔다는 사실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잠시 나오던지, 아니면 아예 없다.

이는 분명히 민주주의가 정치체제로 자리 잡힌 현대사의 입장, 게다가 서구중심 사관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란의 역사는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단절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아랍민족이 아닌 아리안이다. 그들은 중앙아시아 지방에 살고 있다가 기원전 3천년에서 2천년 사이에 남하를 시작한다. 남하를 하던 그들은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을 만나게 된다. 아리안족의 일부는 파미르 동쪽으로 흘러가 모헨조다로에 살던 선주민을 정복하고 오하지방(인더스 상류)에 정착한 자들이 지금의 인도인이 되고, 나머지 일부는 파미르 서쪽으로 돌아 이란고원에 정착한다. 이들이 페르시아인들이다. 이들은 종교적 천재들로 인도가 베다와 우파니사드, 바가바드 기타 등을 통하여 브라만교와 힌두교를 만들어 냈다면, 페르시아는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를 만들어 냈다. 조로아스터교는 율법주의적인 종교인 유대교에 종말론적인 요소와 사탄 그리고 영육이라는 개념을 수혈함으로써 기독교라는 고등종교로 발아할 수 단서를 제공하였다. 특히 구약의 이사야서에 “기름부은 자”로 칭송된 <고레스>는 키루스(Cyrus)로 아케메니드조 페르시아를 세운 자이며, 바빌론을 정복(BC539)하고 유대인들을 고향,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도록 해주었다.(참고: 이슬람의 지도에는 이스라엘은 없다)

이러한 아케메니드 왕국은 알렉산더에게 정복(BC330)당하고, 유목민에 의한 파르티아 왕국에 지배를 당한 후, 기원223년에야 사산조 페르시아가 건국되기에 이른다.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한 사산조 페르시아는 7세기경 이슬람의 침공을 받아 1258년까지 아랍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 후 몽고의 지배를 받은 후, 16세기 초까지 셀주크 터키의 지배를 받는다. 1501년이 되어서야 이스마엘 1세에 의하여 사파비 왕조가 건국되었고, 이스파한은 바로 그 수도이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 제정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침공, 아프간 왕국의 침략 등으로 쇠락의 길을 거닐다가 1794년 카자르 왕조로 이어서 1925년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1919년 영국이 공산주의로부터 이란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보호령으로 하였고, 1921년 리자 칸이 쿠테타를 성공시키고 1925년 팔라비 왕조를 세운다. 그는 1935년 국호를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바꾸었고, 1941년 그가 죽음으로써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팔레비 2세)가 샤에 올랐다. 팔레비 2세의 백색혁명(종교재단의 토지몰수) 등 개혁운동이 종교지도자들의 반정부 운동을 촉발하였고, 1979년 호메이니를 지도자로 한 이슬람 혁명으로 1979년 4월 1일 왕정이 폐지되고, 이슬람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러한 페르시아의 역사는 유구함에도 기록에 의하면 자신들에 의한 통치가 기원전에 약 650년간, 사산조에 약 400년간, 사파비왕조 이후 끊어질 듯 이어질 듯 600년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유적이라고는 무너진 배화교의 신전과 회교의 사원에 불과하다. 또한 문화의 단절이 심하여 사산조에 믿었던 조로아스터교의 아베스타서가 아케메니드조의 원시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를 담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한다.

이란고원을 스쳐지나간 무수한 민족들 때문에 구성은 다음과 같다. 7천만의 인구 중 51%가 페르시아인이며, 이맘의 용병으로 페르시아에 유입되었거나, 셀주크 터키의 지배 시 유입된 터키계의 아제르바이잔들이 24%, 이란의 북서부 갈란-머잔다런인 8%, 터어키 동부, 이라크 북부, 러시아남부, 이란 북부에 흩어져 있는 쿠르드족이 7%, 그 외에 아랍족이 3%, 유태인, 그루지아, 투르크맨 등이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다.

이 중 유태인들은 기원 70년 디도에 의한 예루살렘의 함락 이후, 바빌로니아로 망명한 유태교를 믿는 정통 유대인과 달리, 유태 기독교인들이다. 이들은 영지주의 일파인 만다(Manda: 아람어로 靈知)교를 믿어왔다. 이들은 1세기경에 성립된 긴자(보물)를 소의 경전으로 한다. 이 만다교에서 기독교의 프로토 타입과 그노시스적 전통에 대한 일면을 보고 싶지만, 최근에는 거의 멸절되었다고 한다.(신도수가 2천명에 불과하다고 함.)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애린]
    세계사 공부를 다시하는 기분입니다. 이란과 페르시아는 같은 나라인데도 웬지 이름에서 느껴지는 위용이 다릅니다. 이란인이 남하한 아리아인이라면 국민 대다수가 잘 생겼다는 사실이 이해가 됩니다. 잘생긴 민족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러시아(코커서스계)인와 그 뿌리가 같으니…
    [여인]
    저도 이란의 역사에 대하여 무지한 관계로 이쪽 저쪽을 들여다 보며 썼습니다. 충분히 공부가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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