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antz St-8

잠시 블로그를 쉬는 동안 이사를 했다. 이사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하는 일이지만 그렇다는 것이다. 특히 이사하는 날 회사에 무슨 일인가 있어서 아주 늦게 퇴근을 했다. 아파트의 동과 동 사이에서 잠시 길을 잃어 아파트 단지를 삥 돌아 집에 들어갔더니 가구 등은 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창 밖, 길 건너편 성당의 십자가가 푸른 불빛에 감싸여 있는 것이 보였다.

회사에서는 바빴고, 휴일이면 집 안 정리를 하느라고 몇 주를 보냈다.

집의 크기로 남자의 능력이 평가되는 사회에서 나의 모자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집이기는 하지만,  새로 이사한 집이 마음에 들었다. 창 밖으로 야트막한 야산이 보이고, 휴일 아침이면 해가 떠오를 즈음, 야산의 계곡 사이로 안개가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사를 했지만 밀린 일들은 해결되지 않고, 어지러운 일만 새로 생겼다.

그 사이에 그만 사고를 치고 말았다.

대충 하루 일을 끝내고 시간이 남아 오랜만에 포스트나 하나 써서 올려볼 까 했지만, 글이 써지지 않았다. 그래서 오디오 관련 글을 잠시 읽었다.

비록 중고이긴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앰프는 쿼드(Quad) 44 프리앰프에 405-2 파워앰프로 아주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써 줄 만한 것이다. 예전에 이보다 하급기종인 34와 306을 써 보았을 때, 음색이 투명하고 깊이가 있지만 출력만 다소 미흡할 뿐 흠잡을 것이 없는 것을 알고, 출력이 높은 44와 405-2를 샀다. 그러나 이 놈은 기대와 영 딴 판이었다. 아무리 잘 들어주려고 해도, 소리만 클 뿐, 다른 것은 영 개판에다가 소리가 너무 평면적이었다. 그래서 앰프와 매칭이 잘 될까 해서 쿼드 스피커를 사서 물려보아도 소리에 차이가 없었다. 북셀프형의 작은 스피커의 한계가 아닐까 해서 예전에 사용하던 낡아빠진 AR-14를 찾고 있었다. 이십년전에 친구들은 그 AR-14를 보면서 “이렇게 낡아빠진 스피커에서 소리나 제대로 나오냐?”라고 묻곤 했지만, AR-14는 중고시장에 거의 매물이 없다.

오디오 관련 글에 “튜너를 바꾼 후 더 이상 CD를 사지 않아도 되었다.”라는 구절이 보였다. 그 글을 보면서 아주 오래전 오디오점 주인이 “삼만원을 투자하면 백만원을 건질 수 있다”하며 건네 준 카트리지 바늘을 턴테이블에 물렸을 때, 스피커로부터 나오는 소리의 입장감에 놀란 적이 있었다.

혹시나 해서 테스트용으로 옥션시장에서 만팔천원 짜리 중고 인켈 튜너를 배송비 삼천원을 얹어 이만천원에 샀다. 튜너를 앰프에 연결하자, 구박을 했던 쿼드의 실력이 나왔다. 결국 플레이어, TV 등의 인푸트 소스에 문제가 있었지, 앰프나 아웃풋인 스피커에는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DVD 플레이어의 저질 신호를 한 단계 올려보려고 CDP를 사기 위하여 중고시장을 뒤지다가 그만 마란츠 튜너 St-8을 보고 만 것이다.

이 기계는 1978년 제품이다. 1978년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음향기기들이 옮겨가기 시작한 시점이다. 이 St-8은 마란츠의 거의 마지막 아날로그 튜너인 셈이다. 이 튜너는 1980년에 출시된 산수이 TU-X1의 다음으로 튜너 역사 상 가장 명기로 호평을 받는 제품인 동시에 튜닝 방식이 마란츠 특유의 자이로 튜닝이라는 점에서 인기가 있었다.

출하 당시 이 기계는 출하가가 U$650 이었지만, 보관상태가 양호한 경우 이베이를 통해 U$1,200에 거래되곤 했다. 반면 80년대에 출하되었던 마란츠의 후속 디지털 모델들은 출하가 대비 1/3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

이는 아날로그 특유의 음색이 귀를 찌르는 디지털에 비하여 깊이가 있고 부드럽다는 점 때문이고, 사용 상의 다소 불편은 따르지만 디지털이 갖지 못한 외관 상의 우아함이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그래서 덜렁 St-8을 질러버렸다.

출장을 갔다 온 금요일 저녁, 기계가 배달되 있었고, 아내는 “엊그제 튜너가 들어왔는 데, 또 무슨 튜너?” 하며 볼멘소리를 했다.

그러나 포장을 뜯자 삼십년 된 튜너가 마치 신품같은 모습으로 드러났다. 아내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간신히 앰프와 연결을 하고, 스위치를 눌렀다. 그리고 주파수를 맞추니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 소리는 그동안 앰프에 대한 불만을 완전히 불식시키고 FM 방송국에서 날아온 소리가 그토록 풍성할 수가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했다.

몇 시간 청음을 하고 나니 주파수를 93.1에 고정시키게 되었다. 한동안 안 듣던 클래식에서, 특히 고전주의 음악에서 조차 다양한 떨림을 느낄 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불을 껐다.

1970년대는 녹턴형의 불빛이 리시버형 오디오와 튜너를 지배했고 아직도 푸른 불빛은 일부 기종들에 적용되고 있다.

예전에도 밤이 되면 불을 끄고 마란츠 리시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와 감미로운 불빛을 보곤 했다. 거기에는 바슐라르적인 몽환이 있다.

고등학교 때인가 아버지가 사온 전축을 아무도 듣지 않고 나만 듣게 되자, 결국은 그것은 내 것이 되고 말았다. 진공관 전축이었는 데, 스위치를 켜도 소리가 나지 않다가 진공관에 불이 붉게 떠오르면 소리가 차츰 커지기 시작했다.
소리가 존재할 수 없는 진공 속에서 신호가 불에 달구어져 소리로 살아나는 역설적인 치환을 바라보곤 했다. 그것을 증폭이라고 하지만, 음반이나 주파수에 갇혀 있던 소리가 불의 세례를 통하여 거듭남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녹턴의 불빛을 바라보고 있으면, 청소년기에 바라본 진공관의 불빛이 생각난다.

이제 튜너는 되었으니, 좋은 CDP와 AR-14를 마련해야 할 것 같다.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여인]
    아들 놈이 산 일안리플렉스 디카로 찍으니 사진이 꼭 상업용처럼 나왔다. 맨 위와 아래는 나의 인스턴트 디카 작품.
    [마래바]
    이사를 하셨나 보군요.^^
    사진이 바깥 풍경인가요? 아즈넉히 예쁜 모습이네요.
    그나저나 어째 이사하시는 날에도 휴일을 얻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부인되시는 분의 노고가 크셨겠네요.
    [여인]
    늘 그렇습니다. 이사할 때마다 바쁘다고 아내의 핀잔을 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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