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시절 -03

우리는 그렇게 친구가 되었고 놈은 늘 나를 싸부라고 불렀다.

놈은 나를 따라다니며 이러저런 것을 묻곤 했다.

“싸부, 너 수레바퀴 밑에서 읽어봤냐?”
“그래, 읽어보았지. 읽어보니까 어떻든?”
“뭐가 그런지 모르겠어. 왜 한스란 놈은 자살을 했을까?”
“사실 자살에 대한 뚜렷한 이유를 아마 작가도 설명하지는 못할 꺼야. 누군가에게 들었는 데…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소설에서 뚜렷한 이유도 없이 주인공을 죽도록 만들었고, 작가가 주인공을 살해했다고 소송이 붙었다는 거야.”
“그래서?”
“작가는 법정에 서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작가는 <제가 죽였다기 보다 주인공은 소설이라는 운명에 따라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라고 답변했다더군.”
“니가 지어낸 노가리지?”
“넌 헤르만 헤세가 그 소설을 처음 쓸 때부터 한스를 죽이려고 작심했다고 생각하니?”
“아니 쓰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을 지도 모르지.”

놈은 나와 만난 후, 정말로 훌륭한 제자가 되어 나한테 “나는 이제 더 이상 너한테 가르칠 것이 없다. 이제 하산하도록 하여라.”고 할 정도로 미친 듯이 책을 읽었다.

“너 게오르규의 25시 읽어봤니?”
“아니, 못 읽어보았는 데…”
“이거 신나는 데, 니가 못 읽어 본 소설도 있다니… 야! 그것 읽느라고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내내 꼼짝도 못했다.”

내가 황석영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놈의 덕이었을 것이다.

놈이 하루는 옆구리에 <객지>라는 책을 끼고, 교정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이 보여서

“거 뭐냐, 니 옆구리에 끼고 있는 것?”
“너 이것도 모르냐? 황석영의 중단편집이다.”
“어떤데?”
“이런 것을 읽어야 소설 쫌 읽었다는 축에 드는 것 아니냐? 객지다, 객지.”

놈은 그 해가 저물어 갈 때 쯤 자신은 <문과>를 간다고 했다.

“싸부, 너도 같이 문과로 가지 않을래? 난 소설가가 될꺼다.”
“아니, 나는 이과로 갈꺼야.”
“아니 왜? 넌 이과 적성이 아닌데…”
“나는 항해사가 될꺼다.”
“뭐하려고?”
“나는 일곱개의 바다를 지나서, 먼 세상을 구경하려고 해. 그리고 바다를 지날 때면 책을 읽을 꺼다.”
“그것 멋있는 데…”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마도로스가 될 생각이었다.”
“아참! 이번 겨울방학 때엔 아버지의 산막으로 올라갈꺼다. 수십권의 책을 들고 올라가 방학동안 그 놈들을 작살낼꺼다. 싸부, 너도 방학 때 심심하면 우리 산막으로 한번 놀러와라.”

놈의 아버지는 산지기였다. 지금의 개포동 앞에 있는 대모산 속에 산주인이 산막을 세워놓았고, 규동의 아버지는 사나흘 씩 산막에서 지내다 내려와 옷가지와 먹을 것을 들고 산막으로 오르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방학이면 자신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산막에서 지내곤 했다고 한다.

“겨울이면 산에 눈이 내려. 성애가 잔뜩 낀 유리창으로 눈송이가 스쳐지나면, 정말 끝내준다고. 라디오를 켜고 난로에 라면을 끓여먹으면 신선이 따로 없어.”

그러나 놈의 산막에는 올라가 보지 못했다.

어느 날인가 학교에서 영화 단체관람을 갔다. 아마 에디 듀친 스토리인 <애심>인 것으로 기억되는 데, 끝난 후 보니 놈의 눈은 눈물을 흘린 듯 좀 부어 있었다.

“짜식~ 또 울었지? 그동안 좀 짜지 않아서 사람됐는가 했더니… 이제부터 또 울려고 그러냐?”
“얌마! 감동스럽잖아. 싸부 넌 다 좋은 데, 애새끼가 싸늘해.”
“별로 슬프지도 않은데?”
“아무튼 나 감동먹었다. 그런데 너 영화같은 건 좀 보았냐?”
“영화라~ 한 오백편 이상은 봤을꺼다.”
“새끼 순 노가리는… 뻥을 쳐도 봐가며 쳐라.”
“이 사부의 말씀, 잘 들어봐라. 토요일 저녁에 주말의 명화하지?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한주도 한 빼고 보면 몇편이냐?”
“삼사오륙, 일이삼, 일. 팔년에, 일년이 오십이주라면 한 사백편? 사백편 밖에 안되잖아?”
“거기다가 극장가서 본 것은 어디가고?”
“그러면 극장에서 백편 이상을 보았다는 거냐?”
“그렇지, 임마 이래봬도 여섯살 때부터 극장을 들락날락 한 사람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난 영화관에서 본 영화란 한손으로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주말의 명화 같은 것도 별로 못보고.”
“내 기억으로는 주말의 명화를 빼놓은 적은 없는 것 같아.”
“그럼 식구들이랑 영화관에 자주 가냐?”
“아니, 주로 혼자 다녔어.”
“혼자 어떻게?”
“그냥 돈들고 가서 표사고 극장에 들어가면 되지 안될 게 뭐 있냐?”
“야 걸리면 정학 아니냐?”
“국민학교, 중학교 애들을 잡아다 정학시키면 어떻게 하냐? 문제는 고삘이 들이지. 겁나면 명찰 뜯고 가는 거야. 또 잡히면 드립다 튀면 되는 거고. 그런데 그렇게 극장에 다녀도 한번도 잡힌 적은 없다. 명찰 뜯을 일도 없고.”
“그럼 다음에 극장 갈 때 나도 데려가라.”

그 후 놈을 극장에 몇번 데려 갔고, 놈은 영화에 점점 미쳐갔다. 그때는 개봉관이 적어서 좋은 영화가 들어오면 표를 구하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수원까지 영화 원정을 가곤 했다. 서울의 개봉관의 영화가 300원 할 때, 수원의 개봉관인 서문극장에서는 150원이었다. 안양까지 전철로 가서, 안양역에서 버스를 타면 서문극장 앞에 버스는 섰고 차비는 한 30원 정도였다. 서문극장에는 늘 자리가 남았고,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차비를 계산하고 저녁을 먹어도 돈이 몇십원 쯤 남았다.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서문극장에서 하는 영화가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무조건 영화를 보았고, 밤길로 돌아와 통행금지 전에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놈은 이학년 때부터 반이 달랐고 교실 건물도 달랐지만, 늘 나의 주변을 맴돌았고 내가 대학을 다닐 때도 심심하면 우리 집을 찾아왔다. 놈은 나의 방을 좋아했다.

“니 방은 분위기가 있어. 도서관하고 서점 빼고 니 방보다 책이 많은 곳을 본 적이 없다. 몇권이나 되냐?”
“모르겠는 데. 한 천권쯤 될까? 우리집에 있는 책을 몽땅 다 이쪽으로 몰아왔거든. 폼나라고.”
“그런데 너 <광장> 초판에 혁명공약이 들어 있었다는 것 아냐?”
“모르겠는 데…”
“얼마 전에 중고서점에서 <광장> 초판을 샀는 데 혁명공약이 들어있더라.”
“혁명공약이 뭔데?”
“박정희가 군사혁명을 일으키고 나서 국민들에게 어떻게 하겠다고 씨부린 것이지. 뭐 반공을 국시삶아먹고 미국과 유엔군에게 말 잘 들을테니까 걱정 말라는 그런거야. 그런데 문제는 육항인가 거기에 쓰여있는 것이 문제인데…”
“머라고 쓰여 있는데?”
“자신들이 할 일을 다하면 다른 사람에게 정권을 물려주고 자신들은 군사혁명위원회를 해체하겠다는 거지. 그런데 씨팔, 대통령도 해먹고, 삼선짬뽕도 아닌 삼선대통령이 되더니, 웃기는 짜장인 체육관 대통령(통일주체국민회의 의원들이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을 선출)까지 다 해먹은 거 아니겠어?”
“아직 못해 먹은 것 있어.”
“뭔데?”
“임금님! 육영수가 국모라면 박정희는 임금이고 싶었고, 각하보다는 폐하가 되고 싶었던 것 아니겠어? 차라리 그치가 왕이 되어 박씨왕조를 세우고 청와대에서 폼잡고 살고, 우리는 우리 맘대로 수상이나 뭐나 뽑아서 민주주의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만 하자. 이러다 우리 잡혀가겠다.”

놈은 결국 예비고사에서 지방에 간신히 붙었으나, 지방대에 갈 형편이 못되었고 취직을 한다고 하다가 내가 대학 삼학년 때, 서울예전 문예창작과를 들어가 우리가 존경하는 최인훈씨 밑에서 일년인가 공부를 했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개포동이 개발되며 아버지가 불하받은 땅값이 오르고 아파트를 받는다 하면서 집안이 펴졌고, 놈은 다시 공부를 하여 경희대 영연과를 들어갔다.

그리고 놈이 졸업을 하고 충무로에서 제작사의 밑에서 기획을 하고 있었음에도 회사 일에 바빴던 나는 그런 것을 전혀 몰랐고, 놈을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한번 사부는 영원한 사부겠지만, 대학을 들어가고, 내가 대학 생활을 꾸리고 여자의 뒷꽁무니를 찾아 다니느라고, 놈이 나를 찾을 때 나는 늘 없었다. 혹여 집에 찾아 온 놈을 박대한 것이나 아닌지나 모르겠다. 놈이 집을 찾아오는 것이 뜸해지고, 전화통화수가 서서히 줄어들어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으며, 아직도 학원가를 전전하는 놈을 귀찮아 했을 지도 모른다.

놈이 13년만에 만난 나에게 거만했던 것이 아니라, 놈이 종로통의 학원을 전전하며 고달펐던 시절에 나는 서서히 서로의 우정을 지워나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군대갈 때에도, 장가를 갈 때에도 놈이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았으면서, 13년만에 만난 놈이 나를 아는 척 하지 않았다고 섭섭해 할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그 후 나는 놈을 만나지 못했지만, 나는 늘 함께 본 <금지된 장난>과 무수한 영화, 수원 서문극장 옆의 허름한 국수집에서 함께 먹었던 저녁, 댓병 소주를 책가방에 찔러넣고 북한산에 오르다 병주둥이가 깨어져 책을 다 버렸음에도 유리가루가 섞이지 않았나 하며, 댓병 소주를 다 마시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산을 내려오던 고삼 어느 토요일의 가을을 추억할 수 있다.

그것은 내가 놈에게 문학과 영화를 알려 준 사부라서가 아니라, 오래 전 한사람의 친구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 때문이다.

다시 한번 놈이 멋진 영화를 제작하여
어린 시절과 같이 어느 조그만 극장으로 홀로 가,
어두운 극장의 한모퉁이에서 눈물을 흘리며
놈의 영화를 보기를 원한다.

친구야! 이제야 나는 너한테 미안하구나.

아마 우리들은, 우리들의 녹슨 시절의 녹을 조금씩 닦아가며 그 시절에서 바라보았던 지금을 다시 돌아봐야 하는 지도 모른다. 친구야! 그 시절의 우리나 지금의 우리나 모두 조금씩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들이, 지금은 우리가 어긋나 있을 뿐.

혁명공약 전문 펼치기…

<혁명공약 전문>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 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이 이상 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 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 혁명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 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 정기를 다시 바로 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입니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 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애국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본 군사혁명위원회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동요 없이 각인의 직장과 생업을 평상과 다름없이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이 순간부터 우리들의 희망에 의한 새롭고 힘찬 역사가 창조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단결과 인내와 용기와 전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참고> 위의 육항은 박정희가 대통령 출마를 하면서 정권이양과 군 복귀라는 단어는 싹 빠져버리고 “민주공화국의 굳건한 토대를 이룩하기 위하여 우리는 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을 경주한다”라고 바뀌었으며, 그 후에는 혁명공약을 운운하기만 해도 잡혀가는 자기 부정적인 일들을 저질렀다.

 

6 thoughts on “녹슨 시절 -03

  1. 놈이 고달펐던 시절에 나는 서서히 우정을 지워나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한다. 라는 말이 화살처럼 가슴에 팍! 꽂혀 아픕니다.

    그시절의 우리나, 지금의 우리나 조금씩은 어긋나 있었다는 말도.. 마음안으로 들어왔어요. 어긋남속에서도 굴러가는 것이 사는 일이라면 그러면서도 그 나름의 질서와 리듬을 타고 있음을 보게된다면 조금 편해질까요? 그런것 같아요. 지금은.

    1. 세 건의 댓글에 어떻게 답글을 올려야 할 지…?

      이 < 녹슨 시절>이라는 제목의 연작은 지금 21회 정도까지 진전된 상태에서 중단되어 있습니다. 이 규동에 대한 세편의 포스트는 후일 썼으나, 녹슨 시절의 앞머리에 놓게 되었습니다.

      이 글들은 저의 청소년기를 통하여 느낀 점들을 희화화한 글이긴 하지만, 어떤 면에서 내가 어떻게 어긋난 날들을 보내게 되었는가의 전말서입니다만, 마무리가 늘 연기되고 연기되는 글입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아프게 하고, 밉게 한 점 죄송합니다. 빨리 회복하시고 이 글의 뒷글들을 읽으신다면 미움도 약간 덜해지시리라 믿습니다.

      미운 여인이…

  2. 샤 론 09.05.12. 18:53
    잘 읽었습니다..어찌 어찌 하다 보니 그리 된 거군요…그렇죠 관계란 서로 노력해야 이어지는 것이겠지요…찐한 사이셨는데 아쉽습니다..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찐하게 이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 旅인 09.05.13. 10:48
    그 이전에 녀석이 다시 좋은 영화를 만들어 부활했으면 하는 바람이 큽니다.

    다리우스 09.05.12. 21:15
    잘 읽어보겠습니다, 여인님~
    ┗ 旅인 09.05.13. 10:48
    예 이 글들을 완주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이슬 09.05.13. 14:12
    남자와 여자의 우정에 관한 자존심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여인님 글을 쭉~ 읽어 보니… ^^
    ┗ 旅인 09.05.13. 19:01
    전 우정에 관한 한 의리도 없고 그래서 남자의 전형적인 우정을 보여주지는 못할 겁니다.
    ┗ 이슬 09.05.15. 10:14
    저런..ㅋㅋ
    ┗ 旅인 09.05.15. 16:05
    죄송합니다.
    ┗ 이슬 09.05.15. 19:14
    아니에요.^^

    라비에벨 09.05.13. 17:45
    친구가 흔쾌이 싸부라 부른 이유를 알겠네요…빨려들어가는 입담… 글로써도 묻어납니다.
    ┗ 旅인 09.05.13. 19:06
    싸부가 되면 제자 친구에 대한 부담이 꽤 커집니다. 놈이 커서 잡아먹으려고 들거든요. 고등학교 3학년 되더니 짜식이 불란서 문화관에 턱하고 자리잡아서 불란서 영화에 대해서 아주 꿰차더라고요. 책도 닥치는데로 읽고… 싸부의 권위를 유지하느라고 고생 많이 했습니다.

    유리알 유희 09.05.14. 11:26
    이때 유리알은 뭘 했을까요. 참으로 얼치기, 여고시절을 보냈거든요. 파격도 없고 그렇다고 열정적으로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책을 파고 든 것도 아닌.. 그래서인지 여인님의 학창시절이 새삼 부럽게다가 옵니다. 졸개까지 그느렸으니 ㅋㅋㅋ. 안양으로 원정영화 보러가는 대열에 저는 끼지 못했거든요. 겁쟁이라서요. 우린 안양으로 주로 가더군요. 대부, 빠삐옹 같은 영화를 보러. 녹슨 시절도 빈추해 보는 지금은 빛이 납니다. 그립기 때문일까요. 유신의 시절이 무에 그리 그립겠는지요. 아마도 푸르지 못했던 청춘에 대한 향수인가 하노라.. 부디 완성하시길 빌어요. 저도 쓰려고 합니다. 이미 5줄 썼답니다. 중딩시절을요. ㅋㅋ
    ┗ 旅인 09.05.14. 12:59
    빠삐옹은 중학교 1학년 때 소설로 읽고 아마 고2땐가 보러갔죠. 아직도 수원 서문 옆에 서문극장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별로 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유희님의 중딩시절을 위하여 화이팅!!
    ┗ 유리알 유희 09.05.14. 14:34
    지금은 없답니다. 있다면 유희가 달려 가서 상영하는 걸 무조건 볼 터인데. ㅋㅋ
    ┗ 旅인 09.05.14. 21:36
    좀 아쉽네요. 수원가 본지도 너무 오래되었네요.

    truth 09.05.20. 02:14
    놈이 13년만에 만난 나에게 거만했던 것이 아니라, 놈이 종로통의 학원을 전전하며 고달펐던 시절에 나는 서서히 서로의 우정을 지워나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좋은영향력을 서로간에 공급하였던 그 긴날수만큼이나 헛된일이 하나도 없군요..아..다행이고 따듯한진행입니다..휴~다소 안정모드입니다 제겐^^길냥배식 운동조금 족욕후 다른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너무 잘 읽겠습니다 감사 드려요 싸부!^^
    ┗ 旅인 09.05.20. 10:55
    간만에 싸부라는 소리를 들으니 목에 힘들어 갑니다. 정말로 친구놈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 truth 09.05.20. 16:11
    ^^목에 힘주실만한 여인님 이세요..^^그리고 제겐 싸부님 맞습니다. 친구분들께 미안한생각드는거 참 좋은현상입니다. 그러게요…다할수없었고 스쳐지난것들에 대한 미안함 참 세월지나면서 더해지는듯해요..부모님도 형제도 주변인들모두에게 저는 늘 미안한맘이…
    ┗ 旅인 09.05.21. 14:12
    저도 미안한 마음…

  3. 샤 론 09.05.13. 09:21
    여인님이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실 때 저희 시골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하늘이 낸 사람 ..우리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 줄 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우리마을이 새마을 운동으로 깨끗해졌고 다들 겨울에도 일 열심히 하여 보릿고개가 없어졌으며..시골 마을 어귀에는 새마을 운동의 여파로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 가득 심어져 있었고…하여간 시골에는 눈에 보이는 혁명이 아름답게 펼쳐 짐으로써 순진한 농민들을 기쁘게 했던 것만은 사실이었으니까요…
    ┗ 旅인 09.05.13. 10:51
    저도 고등학교 때까진 샤론님처럼 생각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부터 그가 미워지기 시작했죠.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박정희가 가까운 사람에게 총맞아 죽을 것을 추리해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몇년 후에 그리되었죠.
    ┗ 샤 론 09.05.13. 13:25
    고 2 때 그런 생각을요?…조숙하셨군요..전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요..그런 사회 현상에 대해..오로지 학교와 집외에는…게다가 가끔 사회 선생님이 그런 반동적인 생각을 말씀하시면 공산당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전 박대통령은 영생 불멸할 걸로 생각했었지요.ㅎㅎㅎ
    ┗ 旅인 09.05.13. 13:49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죠. 전 초등학교를 청와대 근처에서 다녔는데, 처음에는 대통령 아저씨라고 부르랬다가 육학년 쯤 되니까 대통령 할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좀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 그리고 박지만이 국민교육헌장을 한시간 만에 외웠다고 하는 우상화 정책에 또 기분이 나빴죠. 박정희가 지나가면 검정양복들이 수업시간에 들어와 창을 닫아라 뭐라 하는 것도 기분 나빴고… 경복궁과 청와대 사이의 길이 막혀버렸을 때도 기분 나빴고 그렇습니다.
    ┗ 샤 론 09.05.13. 21:04
    와아! 청와대 근처라구요? 제 꿈이 청와대 가보는 거 였는데..지금도 못 가봤어요..여인님과 저는 신분이 완전히 다르군요..아마 여인님 친구들의 아버니는 모두 한 가닥하는 부르조아가 아니었을까요..그 근방이 거의..제 친구의 아버지들은 모두 가난한 농민..이러니 신분차가 보통이 아니군요..생각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겠는데요..하늘과 땅 차이..ㅎㅎ..기분 나쁘실 만도 하시군요..하지만 그것마저도 부러운 사람이 있다는 거 기억하시길요…ㅋㅋ
    ┗ 旅인 09.05.13. 21:44
    예전에 서울 인구가 300만 정도 될 때, 영화 < 효자동이발사> 사는 동네에 살았습니다. 다닥다닥 적산가옥에 공동으로 수도를 쓰고 그랬습니다. 그때는 모두 가난해서 저희 집도 쌀 한말 갖다놓고 살기가 힘들었습니다. 밀가루 타기 위하여 동사무소도 자주 가고 이 집 저 집 뭐 빌리러도 자주 다니고 했습니다.

    샤 론 09.05.13. 22:05
    그럼 지금 생각하는 서울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거네요…전 서울 사람은 모두 잘 사는 줄 알았지요..제가 워낙 시골 사람이다보니..서울을 잘 모른답니다..그저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지요..서울에서 대학 다니고 나서야 겨우 알았으니까요..그 전에는 그저 동화 속의 궁전이 있는 그런 동네로 여겼지요..
    ┗ 旅인 09.05.14. 08:08
    광화문통는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공기냄새까지 기억하고 있는데 사뭇 다르죠. 인구 300만, 600만을 지나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우마차도 다니고 전차길 위로 시발택시도 다니고… 아무튼 그랬습니다.
    ┗ 旅인 09.05.14. 08:11
    청와대 옆 삼청동, 저희 동네를 지나 옥인동, 누상동 등은 좀 잘살았고 통의동, 적선동, 효자동, 청운동 등은 그냥 서민이 살던 곳입니다. 그리고 사대문을 넘어선 영천 등은 좀 가난한 사람들이… 청계천변에는 빈민들.
    ┗ 샤 론 09.05.14. 08:20
    맞아요..청계천 빈민이란 말을 책에서 본 듯 해요..그 당시..시골과 다를 바가 없었군요…1960년대를 기억하시다니요?..제가 태어나기 전인데요..어떻게 된 거지요?
    ┗ 旅인 09.05.14. 10:40
    58生, 61上京, 65 入學, 최초 기억 시작 61, 정상기억 시작 63~64 그렇습니다. 광화문통에도 우마차가 다니고 전차가 댕댕거리며 달리고, 시발택시가 다녔지요. 그 시절 광화문, 종로, 시청 등이 제 나와바리라 잘 압니다. 참고로 서울 인구는 1965년 347만(1학년), 1970년 550만(6학년)입니다.
    ┗ 샤 론 09.05.14. 13:39
    아참 ! 깜빡했네요..소설 속에서 말씀 하셨는데..전 저랑 비슷한줄 알고..ㅎㅎ 이렇게 정신이 없다니까요..

    산골아이 09.05.14. 11:46
    날던 새도 떨어트린다던 최고의 권력자의 마지막도 참 비참했지요. 남북의 긴장된 대치상태였던 시기에…. 절대자에 대해 신처럼 주입되었던 교육관을 먹고 자란 후 그 오해와 진실을 깨닫고 느낀 혐오감이 지금도 되살아나는 기분입니다.
    ┗ 旅인 09.05.14. 12:53
    궁정동이면 제가 살던 때는 전차종점으로 일반 주택이 있었고, 제 친구 집이 있어서 놀러가면 그 집 창에서 청와대 잔디가 보였습니다. 그런데에서 총성이 울렸고 청와대의 채홍사들이 연예인을 픽엎하러 가던 내자호텔은 동네 앞 정부청사 건너편이었지요.

    지건 09.05.14. 16:47
    고딩 때…기차를 타고 이리저리 다닐 때…문득…왜 시골풍경의 집들은 거의 비슷한 개량 가옥으로(푸르고 붉은 철지붕) 지어져있나를 의아해 한 적이 있습니다…지방마다 동네마다 가지고 있어야 할 개성(?)이 사라진 이유….당시 내린 결론은…개발독재의 횡포 탓이다..라 생각 들더군요…해서..간혹 뭍 어른들이 박통을 칭송할 때마다…쇄뇌 당한 불쌍한 영혼으로 여겨졌습니다…근현대사에 관심을 갖다보니…임모씨가 말했던…’일상의 파시즘’ 그 뿌리의 한 축에…정희씨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걸 봤습니다….어느덧 삼십대 중반으로 걸어가는 제 눈은…어설픈 좌 편향에서…벗어나…왔다갔다 사시가 되어버린…잃어버린

    지건 09.05.14. 16:52
    의욕….상실된 정치…경제가 모든 것을 빨아들여 버린 세상..자본우선, 자본최고, 자본,자본,자본…..주의…..눈에 보이던 적보다…보이지 않는 적이 더 무섭다는 말의 절실함…..이제 더 이상 무소불위의 권력자는 있을 수 없고….자본주의의…괴뢰, 수뢰,들이 판치는…꼭두각시들의 세상, 시대….그 속에서…어쩌면..영화 ‘매트릭스’에서 편안함을 위해 배신했던 ‘그 녀석’이 이해가 가는….배신의 시대를 개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그게 과연 현실….현실이라 주입된 현실이고 사회인지…무력감만 밀려들어…여러 샛길에 관심을 분산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그래서 죽는 날…’허무’ 빼곤 없는 빈 결론만.

    지건 09.05.14. 17:00
    신이 있다고 믿는 유신론자들이 비춰보이는 일면의 편리함처럼….누군가는 세상을 진보시키고 변화시킬거라는 당위 속에서…개인인…나는…그리고 너는…해서 …우리는…달관하는 듯한 모습으로….허망함을 품고….살아가는 척하는 게 아닌지….간혹 불끈 거리는 가슴은….갈수록 쉽게…식히고 마는…해서…편안함을 추구한답시고…편리와 조용함을….선택하고 추구하고..사실..선택 당하고 추구 당하는 불편한 편리함과 편안함 속에서…휘황찬란한 눈가리개를 덮어 쓰고…..그렇게….내면을 외면하며…오늘도…내일도…어제처럼…..

    旅인 09.05.14. 17:23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엄청나게 많은 것 같습니다. MB가 박통시절에 잡혀갔던 한일수교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통은 모든 배상청구권을 피해자들에게서 몰수하여 국가에 집중시키고 값싸게 팔아먹습니다. 부록으로 독도도 팔아먹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모든 경제력을 수도로 집중시키기 위하여 지방자치제를 말살시킵니다. 그리하여 박정희 시절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수도권집중이 시작되었고 지역경제는 붕괴됩니다. 그래서 전국민의 타향살이 생활이 시작됩니다. 또 밀가루 수입 등 농촌 궁핍화 정책을 통하여 자본가에게 돈이 집중되게 하는 한편 농촌인구를 도시빈민으로 전환시켜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旅인 09.05.14. 17:40
    통일벼를 대표로 하는 종자개량이랍시고 토종농작물의 씨를 말리는 한편, 고금리 고인플레 정책, 등등 열거할 것 없이 많은 것들을 인위적으로 비틀어놓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을, 이웃, 행복, 자유 이런 것들을 너무 많이 잃었고 너무 많은 인권들이 짓밟혔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truth 09.05.19. 21:56

    ┗ 旅인 09.05.20. 10: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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