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시절 -01

친구 규동은 한때 잘 나가던 영화기획사 사장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른다. 마지막으로 접한 소식은 중국과의 영화 합작 MOU체결을 위하여 신은경을 대동하고 상해로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은경이 <조폭마누라 2> 제작 인터뷰를 해야 겠다고 돌연 약속을 취소했다. 영화보다는 신은경의 상업적 가치에 눈독을 들였던 중국 놈들에게 신은경에 대한 지배력을 갖지 못한 놈의 영화기획사는 더 이상 합작할 가치가 없었기에, 계약은 그만 무산되었다.

고등학교를 입학한 햇수로 20년이 되는 해, 동기회 자리에서 13년 만에 놈을 만났다. 그때 놈은 젊은 나이에 영화계에서는 상당히 거물이 되어 있었고 파워100인가 하는 축에 들었다.

놈이 나를 보면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여인이 아니냐? 어디 얼굴이나 다시 한번 보자.”라고 할 줄 알았다. 놈은 아는 척도 안했고, 학교 때 늘 같이 다니던 우리들과 자리를 함께 하기보다는 “규동아! 여기야, 여기야!” 하고 불러대는 학교 때는 알지도 못하던 놈들 쪽으로 가서 넓찍한 자리에 앉아 허허거리며 이놈 저놈들과 잔을 부딪히며 희희낙락하는 것이 보였다.

동기회가 끝난 후 집으로 가려고 하는 데, “간만에 1학년 2반만 남아 맥주나 한잔하자”고 누가 말했고, 맥주집에 들어섰을 때 놈은 상석에 떡하니 앉아 있었다.

놈은 “오! 여인이 모하냐? 명함이나 하나 줘봐”하며 비스듬한 자세로 손을 내밀었고, 나는 초라한 명함을 건내고 놈의 명함을 기다렸다.

놈은 “오늘 이눔 저눔에게 명함을 주다보니 다 떨어졌다.” 하고는

“음~ 과장이라? 고생하겠다.”하며 내 명함을 명함집이나 셔츠의 호주머니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바지주머니 속에 질러넣는 것이었다.

내가 그곳을 떠날 때, “그 새끼 잘나간다고 너한테 그럴 수가 있냐? 최소한 놈이 너한테는 그럴 수가 없는 데… 니가 놈의 싸부 아니냐?”하고 친구가 말했다.

그 일이 있은 다음 해 봄에, 동창놈들이 산세바스티안 영화제에서 비평가 연맹상을 받고, 대종상 기획상까지 거머 쥔 놈의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난 뒤 그 영화를 비디오로 보았을 때, 그 영화야 말로 놈과 나의 청춘에 대한 과장된 작은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우정이나 사랑이나 늘 여전한 것이 아니며, 단지 지나간 시간의 어느 여울에 정박해 있는 그때의 것일 뿐이라는 것을 그 영화를 보며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홍콩에서 돌아와 얼마 안된 때에 <필름 2.0>이란 잡지에 놈과의 인터뷰 기사가 나왔다.

“행복? 우리가 정말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나? ○화○상 ○규동 대표”

[필름 2.0  2002-02-27 15:50]

3년 만에 영화를 제작하는 만큼 그에게서 들을 말이 많을 것 같았다. 얘기를 들어보니 긴 휴면기간 동안 쌓인 울분이 많았던 모양이다. 격한 감정의 소유자란 소문답게 이야기 도중 잠깐씩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한때는 잘 나갔지만 그다지 성공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제작자란 오명까지 참아내야 했으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재기에 도전하고 있는 ○규동 대표와의 격정 대담. 그리고 눈물.

이런 타이틀 밑에 기자와 놈의 인터뷰가 실려 있고, 모르는 사이에 내가 살아가는 세상과는 다른 세상에서 커져 있었던 놈의 좌절을 볼 수 있었다. 그 기사의 내용을 보면서, 세월이 친구로서 놈과 공유할 여백을 더 이상 남겨 놓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일년쯤 지난 후, 어떻게 알았는 지 놈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 규동이다. 알겠니?”
“모를 리가 있냐?”
“잘 지내냐?”
“그럭저럭”
“언제 한번 점심이라도 하자”
“그러자.”

우리는 더 할 말이 없었고 사막과 같은 대화를 나눈 후, 그만 전화를 내려놓았고 그 후론 만나지 못했다.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이슬 09.05.12. 09:42
    소설이면 픽션으로 생각하며 읽어야 하는데…논픽션으로 다가오네요. 혹 여인님 실화를 바탕으로?^^
    ┗ 旅인 09.05.12. 11:21
    넌픽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픽션을 써도 제 생활에서 60% 정도는 차용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죠

    샤 론 09.05.12. 09:50
    오랜 공백기간이 정말 씁쓸한 미소를 남기고 만 만남이었군요..너무 오랫만에 만나면 저리되기 쉽상이지요..너무 오랫만의 만남은 처음 얘기가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다음에 만날 기약이 정해지기도 하구요…이야기 남의 얘기 같지 않네요..여인님…
    ┗ 旅인 09.05.12. 11:00
    이 친구에 대해서 제가 뭐라할 처지는 못됩니다. 졸업 후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기 때문에…

    산골아이 09.05.12. 14:41
    눈탱해야 할 것들이 수북한데 바빠서… 여인님, 찜해놓고 다음주에 읽을게요. 두근두근….쿵쿵….
    ┗ 旅인 09.05.13. 10:45
    쉬엄쉬엄 하십시요.

    유리알 유희 09.05.13. 11:16
    즐거워라. 오랜만에 여인님의 소설을 대하는군요. 녹슨시절을 수면에 올려 놓고 반질빈질하게 닦으셔서 빛나는 시절로 만드시길 기대하렵니다. ㅎㅎ
    ┗ 旅인 09.05.13. 11:19
    58개띠들의 이야기입니다.
    ┗ 유리알 유희 09.05.13. 12:59
    헉! 글쿠나요. 더욱더 군침이 돕니다. 꼴까닥~~
    ┗ 旅인 09.05.13. 13:51
    뭐 새로운 게 있겠습니까?

    라비에벨 09.05.13. 11:46
    담글이 몹시 궁금해 집니다. 실명인가요? 규동님^^
    ┗ 旅인 09.05.13. 12:35
    지금도 상당히 유명한 친군데… 실명은 아닙니다. 실명으로 냈다가 잘못하면 소송들어옵니다.

    산골아이 09.05.13. 12:52
    으음, 그렇군. 여인님은 개띠고,,,, 라비님은 규동이시구만 기억해두어야지. ㅎㅎㅎ
    ┗ 旅인 09.05.13. 13:52
    라비님이 규동님은 아닐텐데요…?
    ┗ 산골아이 09.05.13. 14:46
    이크 규동은 소설인물인데… 여인집 미안합니다. 꾸벅… 읽지 못하고 괜히 아는 척 하다가 꽈당~~ 부끄부끄해서 문닫고 나갑니다. 내일 오전까지 합평할 작품 쓰러…
    ┗ 旅인 09.05.13. 15:39
    좋은 작품 쓰시길 빕니다.^^
    ┗ 엘프 09.06.03. 12:26
    ㅋㅋ여인집~^^
    ┗ 旅인 09.06.03. 23:01
    ㅎㅎ 여인숙??
    ┗ 산골아이 09.06.03. 23:45
    아따메,,, 두 분이 날 놀리시네.. 그럼 지금부터 엘프님은 여인집이고 … 여인님은 여인숙 하세요. 오타 하나로 또 웃어보네요. 두 분 때문에 우울함을 털어내고 혼자 킬킬거리게 해주셔서 땡큐!!!

    산골아이 09.05.14. 11:27
    기동과 어떤 갈증이 벌어질까 기대가 되네요. 규동의 무의식에 잠재된 열등의식 때문에 허세를 부리는 것처럼 느껴지네요.
    ┗ 旅인 09.05.14. 14:20
    거만과 열등의식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겠지만, 당시에 놈은 무척 대단했습니다. 동창 중에 가장 성공한 놈이었으니까요. 그렇다고 놈이 술값을 내진 않았으니 그게 저랑 아무 관계도 없지만…

    truth 09.05.19. 21:46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