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시절 -20

지리한 74년의 여름방학은 끝났다.

북창인데다가 오랫동안 비어 있어서 서늘한 교실로 다시 모였을 때, 우리 개떼 중 병신이 3명이었다. 오른손에 깁스를 한 나와 갈비뼈가 부러져 기침도 못하고 으흐흐 하며 제대로 웃지도 못하는 놈, 견주뼈가 부러져 어디에 부딪힐까 전전긍긍, 어느 쪽으로 돌아앉는 것이 좀더 편안할까 하고, 치질 걸린 똥개 같은 표정을 짖던 놈, 도합 세 놈이었다. 한마디로 화려한 여름방학이었다.

두 놈은 대부도에 놀러가서 섬 청년들과 싸우다 다친 것으로 제대로 웃지도 못하면서도 그 날 밤중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핏대를 세워가며 이야기했고, 우리는 “니들 아프니까, 좀 슬슬 이야기해라. 귀지파고 끝까지 다 들어 줄 테니까.” 하고 말렸다. 그러나 “여인이 너는 왜 부러졌냐?”하고 물으면, “재수 없으려니까 자빠져서 뼈에 금 갔다. 왜 뜺냐?”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개학한 후 얼마지 않아 사일구 때나 학생운동이 심하던 때에 학생들을 한번도 길거리로 내몰아 본 적이 없다던 교장은 교무회의 때 “국모님이 일본에서 온 문세광이 한테 총에 맞아 서거하셨는 데, 그냥 있을 수 없다”고 했고, 교무회의에서는 학생들을 길거리로 내몰자는 것으로 귀착이 되었던 모양이다.

담임 남주가 들어와 “내일 오후 일본대사관 앞으로 가서 규탄대회를 연다. 그렇게들 알아라.”고 말했다.

“그럼 수업은 어떻게 됩니까?” “어떻게 갑니까?” “끝나고 집으로 갑니까?” 이런 질문이 있었고,
“오전 수업을 한 후 점심을 먹고, 걸어서 비원 앞까지 간다. 그리고 규탄대회를 연 후 다시 돌아와 수업을 하던지 해산이다. 알았나?”

교실에서는 우우 소리가 났고, “그게 뭡니까?”라는 소리가 들렸다.

“시끄럽다. 교무회의 결정사항이니까 잔말들 말아라.”
“선생님, 규탄대회는 우리가 하는 것 아닙니까? 교무회의 결정사항이라고 무조건 시키면 어떡합니까?”
“지금은 유신시대다. 니 뜻, 내 뜻이 어디 있냔 말이다. 이 짜식들아. 나도 이런 시대에 좋아서 니들한테 야유회 가자고 이러는 것 아니다. 이걸로 종례 끝이다.”

우리가 책가방을 싸고 일어서려고 하자, “석현이하고 종수, 그리고 진식이는 서관 앞으로 모여라. 내일 규탄대회 준비 때문이다.”하고 말씀을 남겼다.

우리가 교실을 나왔을 때, 운동장의 한쪽 구석에서는 고2 몇명이 내일있을 규탄대회의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의 규탄대회는 예전에 써 놓았던 <병과 깁스>라는 포스트를 참조하면 될 것 같다.

규탄대회에서 돌아와 정상적인 학과가 진행되던 어느 날, 월말고사가 있다고 했다.

“선생님, 깁스를 하고 있어서 시험보기가…”
“깁스를 했다고 시험을 안보다니?”
“아무래도 오른팔이라서…”
“성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 시험에 임하는 정신자세가 중요한 것이지.”

남주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깁스를 한 손에 연필을 끼우고 간신히 시험을 치뤘다. 그리고 반에서 한 20등 쯤 한 것 같다.

어머니는 20등을 한 성적표를 가져다 주니,

“전교에서 20등 정도면 그래도 괜찮네. 20등이면 서울대는 갈 수 있지?”
“아니요, 반에서 20등이예요.”
“중학교 때부터 전교 20등 밑으로는 해본 적이 없던 네가, 성적이 왜 이 모양이 되었니?”
“깁스를 한 채 시험을 봤으니까요.”

어머니는 성적표에 도장을 찍어주면서, 다음 번에는 좀더 잘해서 반드시 전교 10위권에 들어갈 것이 틀림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나는 생각한 것보다 늘 좋은 성적을 받아왔을 뿐이다. 나는 그러한 행운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을 뿐이다.

시험이 끝나고 얼마지나지 않아 나는 깁스를 풀었고, 아버지는 수술을 하셨다.

우리 집안 식구는 모든 것을 걸고서 아버지가 무사하시기를 빌었다.

의사들의 말로는 학회지에 사례보고가 될 정도로 수술은 대성공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큰 종양덩어리가 척추 안에서 신경을 누르고 있었는 데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참고 견디셨습니까? 참 장사이십니다. 아무리 수술이 잘되었다고 해도 삼개월 정도는 병원에서 꼼짝말고 누워 계셔야 할 것이고, 제대로 기동을 하시려면 최소한 육개월의 기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달 만에 퇴원을 하셨고, 육개월의 휴직기간을 앞당겨 삼개월 만에 학교로 복직을 하셨다.

그 사이에 중간고사가 있었고 나는 다시 전교 10등 수준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그것 보라고 당신의 아들이 어떤 녀석인 데, 반에서 20등에 머물겠냐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국영수를 뺀 잡과목에서 공부 잘하는 놈들이 팔구십점을 맞는 데, 나만 홀로 백점 혹은 96점을 맞는다면 어떻게 전교 10등 수준에 못이르겠는 가 말이다. 그래서 중간고사나 학기말 고사만 끝나면, 나는 기타 과목 선생에게 늘 불리어 일어서곤 했다.

“이 반에 이여인이가 있냐? 어디 일어나봐라!”

내가 일어서면,

“아~ 니가 여인이냐? 야 임마 딱 하나만 더 맞으면 백점 아니냐 백점, 그러면 나도 우매한 중생들을 가르친 보람이 있을 것 아니냐? 니가 생물은 전교 일등이다.”

이런 식이었다.

그러나 다시 월말고사에서는 반에서 20등 수준으로 내려 앉곤 했다.

나는 그래도 별로 좌절하지 않았다. 날기만 한다면 모든 것은 끝나니까.

This Post Has One Comment

  1. 旅인

    [목련]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쟎아요?
    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여인님의 아버님게서는 교직에 계셨었나봅니다.
    우리여인님의 훌륭하신 인품은 아버님을 닮으셨나 생각되어집니다.
    그럼 우리 여인님께서도 혹시,
    어느모 대학에 선생님 아니신지요. ㅎㅎ
    언제나 여인님의 높은지식에 놀라는 련이랍니다.
    재밌어요. 나머진 내일 읽으로 오겠어요. 아니면 깊은밤에 조용히……
    [여인]
    선생님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가방끈이 짧아서 못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전주사범을 광복되던 해 졸업하시고 50년동안이나 교단을 지키셨지요. 열여덟에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어 예순여덟(주민등록상의 나이 때문에)에 정년퇴직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 아버지보다 더 오래 교직에 계셨던 분은 몇분되지 않습니다.
    저희 친가는 거의 대부분 선생이어서 아버지께서는 저만이라도 교단에 서게 하고 싶으셨지만, 저는 아버지의 고생과 늘 쪼달리던 살림을 보아왔기에 선생되기를 거부했습니다.
    제가 입사시험에 합격했을 때, 아버지께서 “너만이라도 교수가 되었던 그냥 선생이 되었던 교단에 서게 하고 싶었는 데…”하시며 섭섭해 하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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