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시절 -19

녹슨 시절–○○은 우울한 시절의 빗나간 개인사일 뿐이다. 그리고 남들은 태어난 해 없이 닭띠, 원숭이띠라고 불리는 데, 왜 58년생만 유독 <오팔년 개띠>라고 불리는 이유를 끄집어 내지도 못했다.

왜 남들은 우리들은 오팔년 개띠라고 부르며, 무엇 때문에 자신들을 오팔년 개띠라고 우겨 말하는 것인가? 거기에는 분명 다른 해에 태어난 사람들과 뭔가 다른 점이 있거나, 차별되기를 바라는 점이 있을 것이다.

“오팔년 개띠에게 물리면 약도 없다.”
“오팔년 개띠는 보신탕으로도 쓰지 못한다.”
“오팔년 개띠는 오뉴월 땡볕에 혀 빼물고 있는 꼴이다.”

그러면 이런 말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개띠들에게 요리조리 물려보고 임상적인 소견을 제시한 것인지 아니면 자셔 보고들 하시는 말인지? 또 지들의 팔자는 지초방초 피는 봄날처럼 늘어졌느냐 이 말씀이다.

때론, “그 유명한 일구오팔년의 견띠세요?”라고 되묻는 놈들도 있다. 개띠도 아니고 써글 견띠는 또 뭐며, 뭐가 그렇게 유명하냔 말이다.

“어머, 어머, 전 칠공년 개띠인 줄 알았어요. 오빠는 너무 젊어 보이셔~.”
“그래, 나 집에 갈 차비 밖에 없다. 너무 오버하지 마라.”하는 술집에서나 칠공년 개띠도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살아본 바로는 57, 58, 59가 다 그 놈이 그 놈들인 것 같고, 재수 있는 놈 있으면 재수없는 놈들도 있으며, 일이년 사이로 국가경제가 확 피거나 확 쭈그러들 것도 아니었으며, 58년 자식새끼를 가진 집은 못살고, 여타 해에 태어난 자식들의 집이 잘사는 것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오팔년에 고등학교 평준화가 되면서, 지연학연이 판치는 세상에 고등학교 동창 선후배라는 결속이 희미해져, 사회에 나와서 홀로 고군분투하게 되었다거나, 어렵게 어렵게 대학을 들어갔더니 이삼년 이후에는 졸업정원제로 대학 정원이 왕창 늘어났다더라, 그리고 입사를 했더니 인사적체가 되어 진급도 안되더라는 등, 오팔년이 세상 건너기가 힘들었다는 것은, 수 없이 열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나의 개인사를 보면, 나에게는 아무런 방향도 없었고, 무엇이 되고자 한 것 또한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나마 잘나가던 나에게 고1 여름방학의 단순한 사고는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여름방학을 며칠 남겨놓지 않은 어느 날, <애들은 가라 파> 즉 그룹 <몽따다>의 집행부에서 방학 동안 친목을 다지겠다고 “여인아! 방학이 시작되면 출렁출렁 파도가 넘실대는 대부도로 가는 거야. 모래사장에 텐트를 치고, 늘씬한 간나들도 꼬시고, 여하튼 청춘을 버라이어티 하게 즐기는 거야.”라고 했다.

집의 자유방임 정책 상 친구들과 놀러가는 데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응락을 했고, “어머니! 친구들이 방학에 며칠동안 인천 아래에 있는 대부도로 놀러 가자는 데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이유로 식구들 모두 근신을 해야 한다며, 친구들과 놀러가는 것을 허락치 않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차 싶었으며, 친구들과 놀러가는 것을 선선히 포기했다.

아버지의 병명은 디스크라고 했다.

아버지는 몇 년동안 걸을 때, 꼭 술취하신 것처럼 비칠비칠 걸으셨고, 통증을 느꼈지만, 당시에는 디스크 수술은 위험천만하여 멀쩡하던 사람이 수술실에 들어가 반신불수가 되어 나오는 것을 심심찮게 보와 왔다. 그래서 침이나 한방치료에 의지해 보았지만, 점차 기동이 어려워져 갔다.

그래서 다시 한번 정밀 엑스레이 촬영을 한 결과, 디스크가 아닌 척추종양이었고, 디스크보다 수술의 난이도가 훨씬 높다는 것이었다. 종양은 더 이상 수술을 미룰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다고 했다. 그래서 수술 날짜를 잡고 아버지는 학교에 미리 휴직계를 제출한 상태였고, 집 안은 침울해 있었다.

어머니는 수술 중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무엇인가를 해서라도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중압감에 눈에는 날이 서 계셨고, 나도 나름대로 학교라도 제대로 다닐 수 있을 것인가를 걱정하고 있었다.

방학이 왔고, 친구들은 대부도로 떠났고, 방학부터 신문이라도 한번 돌려보겠다는 나에게 아버지는 화를 내셨고 나는 그만 빈둥거릴 수 밖에 없었다. 유난히 날이 맑았던 그 해 여름의 찌는듯한 더위는 한참 자라고 있는 나를 미치도록 했다. 책이나 읽으며 지내기에는 시간은 한정없이 길었고, 공부란 것은 때려 죽여도 하기가 싫었다.

하루는 식구들이 모두 외출하여 집 안이 텅비었는 데, 심심하기가 그지 없었다. 그때 거실에 걸린 전등이 보였고, 갑자기 높이차기로 그것을 깨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두 번 발길질을 해보니, 아무리 도약을 해도 안될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왕 시작한 것, 오기가 있지 하며 사각의자를 도약 중간 지점에 세워놓고 내달아 그것을 밟고 뛰어올랐다.

그러나 사각의자가 구르며 나의 몸은 휘청했고 아득한 어둠 속, 무수히 반짝이는 별빛 속으로 통증과 함께 가라 앉았다.

일이 분쯤 후에 정신을 차렸을 때, 온몸은 몽둥이에 흠씬 얻어맞은 것 같았고, 뒤집어진 사각의자를 껴안고 나뒹굴고 있었다.

거실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고 하자, 손끝에 닿아야 할 바닥이 거기 없었다. 어찌된 일 인가 하고 바닥을 보았을 때, 바닥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른손이 탈구되어 <ㄹ>자로 손목 위로 올라와 있었다.

그 모양의 손을 보자 너무 막연하였다. 그리고 한낮인데도 거실 구석 구석에 어둠이 벽을 타고 오르고 있었고, 온몸에 차디찬 냉기가 끼쳤다.

그러나 그대로 놔두기에 너무나 끔찍하여 왼손으로 팔목 위에 올라간 손을 잡았고, 숨을 멈추고 죽어라고 잡아 당겼다. 그러자 덜컥하고 손이 탈구된 자리로 안착했다.

손목을 조심조심 움직여보니 둔통이 있기는 해도 움직일 수는 있었다. 그리고 몸의 다른 쪽은 이상이 없었지만 미열이 뜨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어 어머니가 돌아왔을 때, 손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 뒤, 몰려오는 피로감에 자리에 누워 잠이 들었고 밤새도록 꿈과 추위에 시달리다 깨어났을 때, 오른 손 팔뚝이 무처럼 부풀어 있었다.

의사는 뼈에 금이 갔다고 했다. 붓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가 깁스를 일주일 정도 한 후, 석고붕대로 오른손을 칭칭 동여맸다. 한 여름에 깁스를 하면 이가 나오고 간지러워 미친다고 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단지 때가 땀에 절은 콤콤한 냄새가 깁스 사이로 솔솔 새어나왔을 뿐이다.

그 해 여름 광복절에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었고,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게 저격 당하여 운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북상한다던 태풍은 하늘에 주황빛을 잔뜩 뿌리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육여사의 국민장일에는 그림자 밑도 푹푹 찌는 염천 땡볕이었다. 우리는 용산역 앞으로 차출되어, 국모라고 불리운 여인의 운구행렬이 시속 4킬로도 안되는 속도로 환장하게 천천히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다.

운구행렬이 스쳐지난 후 우리는 난생 처음으로 에어컨 조차 없는 지하철을 타 보았다. 그러나 갓 파낸 지하동굴 속은 지금처럼 후끈하지 않고 서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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