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시절 -18

친구의 누나를 좋아한다는 것은 참으로 허무하면서도 성숙으로 가는 여정에 놓여있는 하나의 소품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짝사랑이니까.

친구에게는 누나가 둘 있었다. 큰누나는 9살, 작은누나는 6살이 많았다.

친구는 고향이 천안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어디를 가도 굶어 죽기는 매 한가지라며, 죽어도 서울 가서 죽자며 무작정 올라왔고, 아버지는 공사판을 전전했지만, 밥술조차 뜨지 못하여 친구의 누이들은 학업을 포기한 채 어머니와 함께 생활 전선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고생을 했고, 내가 친구 집에 드나들 즈음에는 이층 양옥을 샀고 어느 정도 살 만큼 되었다.

큰 누이는 늦깍이로 보건전문대를 다니다가, 자신이 어학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영어와 독일어를 드립다 판 끝에 <루프트한자>에 입사를 했다.

친구의 큰 누나는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놀러가면 가끔씩 방으로 들어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때론 뭔가를 나에게 묻곤 했다. 내가 답하면

“아~! 넌 그렇게 생각하는구나.”하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때론 “너희들은 나처럼 각박하게 학교를 다니지 말고, 즐겁게, 책도 많이 읽고 그러면서 학교를 다녀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친구의 집에는 작은 누나는 늘 없었고, 빈 방에는 앉은뱅이 책상과 옷가지, 그리고 몇 권의 책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친구는 작은 누나가 일본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의 작은 누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집에 놀러갔을 때, 아무도 없던 집 안의 거실 쪽에서 나무바닥이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어 보니 처음 본 여자가 일층 거실에서 서성이는 것이 보였다.

“누구야?”
“작은 누나. 어제 귀국했어.”

친구는 소개시켜줄 생각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어느덧 저녁시간이 되었고, 우리가 집에 가기 위하여 방을 나왔을 때, 친구의 작은 누나는 이층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가라앉는 오후의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햇빛 속에 그림자로 그렇게 있었고, 허무해 보였지만 어떻게 생겼는지 주황빛으로 번져가는 오후의 하늘 때문에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친구 중 한 놈이 “누님, 저희 갑니다!”라고 소리를 치자,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담배를 비벼 끄고 우리를 향해 가만히 목례를 한 후, 다시 해 지는 서녘을 바라보았다.

친구 놈들은 떠들어 대며 골목을 내려갔지만, 나는 친구의 작은 누나의 외로움에 전염이 된 듯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골목을 내려오며 친구 집 베란다를 보이는가 하고 나는 몇 번이나 되돌아 보아야 했다. 한참을 골목을 내려가자 베란다가 보였고, 아득하게 그녀가 서 있었다. 아직도 희미한 담배연기가 그녀 주변을 감돌다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 후 몇 번이나 친구의 집에 갔지만 놈의 작은 누나를 볼 수 없었다. 그녀는 밖에 나갔거나, 집에 있어도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다.

일요일 날 어떻게 하다 보니 놈의 집에 학기말 고사 준비를 한다고 가게 되었고, 점심을 먹자는 어머니의 부름에 일층으로 내려 갔을 때, 작은 누나가 거기에 있었다.

그는 내가 내려가도 본 척도 않고, 밥알을 헤아리듯 먹고 있었다. 그녀는 세수도 하지 않은 것처럼 부시시했고 스물 세살이라고 보기에 오히려 큰 누나보다 더 나이가 들어보였다.

“여인이 너 오랜만에 우리랑 식사를 하네” 하고 큰 누나가 말하자, 작은 누나가 머리를 쓸어올리며 나를 쳐다보더니,
“그럼 이 학생이 언니가 말하던 그 친구야? 그런데 우리 연광이 보다 커 보이는 데?”
“그래?” 하고 큰 누나가 나를 보았다.
“예, 요즘 크고 있어요. 이제 반에서 중간 정도는 갑니다. 연광이는 본래 저보다 작았고요.”
“맨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는 안 그랬었는데 그렇게 컸나? 애들 크는 것은 금새 아는 데 왜 몰랐을까?”

사실 그때 나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나보다 꽤 컸던 놈들이 몇개월이 지나지 않아 나보다 적어졌고 더 이상 날 작다고 뭐라할 처지들이 못되었다.

큰 누나가 그렇게 말하자. 작은 누나는 큭 하고 웃으며,
“언니, 귀엽지도 않아. 다 큰 학생인 걸.” 하고 말한 후 조용히 밥을 먹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밥을 먹고 방으로 올라가 공부는 내팽개치고 창틀에 걸터앉아 또 옥상에 널린 외로운 처녀들의 빨래를 보며, 말도 안되는 인생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작은 누나가 들어왔다.

“여인이라고 했지?”
“예!”
“언니가 그러던데 너 책 많이 읽는다고 하던데… 요즘 무슨 책이 재미있니?”
“전 책을 재미로 읽지는 않아요.”
“그럼 뭣 때문에 읽는데?”
“그러니까 별로 할 일이 없어서 머리를 괴롭히려고 읽을 뿐이죠. 그래서 재미있다고 할 만한 책은 못 읽어봤어요.”
“그럼 요즘 무슨 책을 읽는데?”
“윤흥길의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최인훈 씨의 단편소설, 혹은 까뮈의 글들을 읽어요. 때론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헤르만 헤세의 소설도 읽고요.”
“그럼 전혜린의 글도 읽어보았어?”
“예, 저기 연광이 책꽂이에 있는 것을 잠깐 읽어보았지요. 그러고 보니 거기에 누나의 이름이 적혀있던걸요.”
“넌 전혜린을 어떻게 생각하니?”
“독일과 유럽에 미친 여자 같아요. 헐벗은 자신의 나라가 싫었던 것이 아닌가 싶던데요, 남들이 말하는 감수성이라든가, 시대를 앞서갔다는 것은 잘 모르겠던걸요.”
“왜 그렇게 생각해?”
“몰라요, 글을 써본 적이 없어서 내가 쓰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 책 속에서 어느 해변에 대하여 쓴 글을 읽었어요. 저는 글을 읽으면서 유럽에 있는 어떤 멋진 해변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글이 끝나는 곳에 <만리포에서>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내가 가 본 만리포는 글에 쓰여진 그런 해변과 전혀 달랐어요. 그래서 나는 그 여자가 현실을 사는 것이 아니라, 꿈 속에 사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멋진 여자라고 생각하는 데”
“사실 저는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어요. 단지 책에 들어있는 수필 겨우 몇편을 가지고 나름대로 생각한 것 뿐이죠. 그리고 루이제 린저라든가 샤강과 같은 여자들이 쓴 글은 아무런 흥미를 주지 않더라고요.”
“너는 책을 얼마나 읽니?”
“누나, 얘는 독서광이야. 아마 누나가 상상한 것 이상일 걸?”
“아니예요. 그렇게 많이 읽지 않아요.”

작은 누나는 치마의 호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며 담배를 꺼내 물면서, “담배펴도 되지?”하고 방바닥에 내려 앉았다. 그리고 성냥을 긋고 목을 빼서 불에 담배를 가져가 한모금을 빤 후 천장을 향해 연기를 내뿜었다.

나는 젊은 여자가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담배를 필 수 있을까 하면서도, 처음 베란다에서 담배를 필 때 가슴이 짠~하고 저려 왔던 것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담배 필터에서 입술이 떨어지고 필터 끝에 입술 선 자욱이 붉게 음화로 그려지는 것을 똑똑히 보였다. 그리고 작은 누나의 하얀 목과 마르고 긴 손, 그리고 넓은 치마 사이로 빠져 나온 가녀린 발목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막연한 서글픔을 느꼈고 한번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러나 작은 누나가 미치도록 예뻤다거나 하는 기억은 없다. 나는 원래 약간 통통한 여자를 좋아하기 때문에 말이다.

우리는 얼마동안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후, 작은 누나는 떠났고, 대충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하다가,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친구는 자기의 작은 누나가 연예인이라고 말했다. 일본에 가서 부채춤이나 장고춤을 춘다고 했다. 그리고 곧 다시 일본으로 갈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뭔지는 모르지만 놈의 작은 누나가 연예인이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왠지 침울하고 마른 친구의 작은 누나가 애처로웠다. 그리고 작은 누나의 허무한 얼굴이 보고 싶은 까닭에 학교 뒤의 언덕배기를 친구와 함께 오르곤 했다.

결국 나는 친구에게 “너의 누나를 좋아한다”는 소리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작은 누나와 나는 몇해가 지나자 서로 맛담배질을 해가며 이러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좋은 친구가 되었던 것 같다.

때로 사랑은 오랜 짝사랑을 통해서 숙성되고 발아하다가 어느 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수줍은 듯 활짝 꽃망울을 터트리고 오랜 세월 속을 흐르던 갈증 끝에 드디어 감미로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볼 때가 있다.

This Post Has 2 Comments

  1. 旅인

    [목련]
    역쉬!
    우리 여인님의 사랑은 늘 멀리서 지켜보다
    애간장 다 태우고 마네요.
    아, 갈증나라..~~~~
    에~이 그건 아니네요..~ㅎㅎ
    화~~~악~~~ 안아줬으면…에구, 농담할군번이 아니건만,죄송합니다.ㅎㅎ
    이 련의 가슴도 시원했겠꾸믄요…..헤헤헤
    고운글입니다.
    아 저도 이런이야기 기억할것이 많은데..글로 표현을 못하겠어요.
    고운글에 시선을 정겹게 두고 미소로 머물다갑니다.
    [여인]
    갈증나는 것이 하나 둘 이겠습니까? 갈증이 나지 않는 삶을 살았다면 지금 쯤 왕년의 은막의 여인과 함께 살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사실은 사실로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2. 旅인

    다리우스 09.05.21. 16:48
    설마 큰누나는 아니겠지 하면서 계속 읽어 내려가는 중,,,^^; ㅎㅎ

    다리우스 09.05.21. 16:52
    캑 당시에 벌써,윤흥길의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최인훈 씨의 단편소설, 혹은 까뮈의 글들을 전혜린, 사강, 헤르만헷세~ 루이제 린저? 한번 안아주고 싶었다? 아 참 이거 소설이지 참,,, ^^;
    ┗ 旅인 09.05.21. 17:05
    당시의 문제작은 다 사다 읽었습니다. 하지만 사강이나 루이제 린저의 글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사강은 너무 큐티한 기분이었고, 루이제 린저는 답답한 독일작가라는 사실 때문에. 독일 작가의 책이라곤 제가 읽어본 것은 괴테와 헤세가 다였죠.

    샤 론 09.05.22. 09:24
    재미있네요..여인님의 여인상을 살짝 알아챌 수 있었음..ㅋㅋ
    ┗ 旅인 09.05.22. 10:14
    통통한 여자요?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틀려지더라고요.
    ┗ 다리우스 09.05.22. 12:53
    여인상이 변천이라 그것은 대상의 현존에 따라 자각되기도 하는 건가 봅니다. 즉 의식된 여인상과(아, 난 이런 여인이 좋다) 잠재된 미처 의식되지 못한 여인상, 고로 여인상의 변천 또한 자기 자각의 흐름의 일면이라고 보아야 할지 생각 중임. 고로 스스로가 내게 알려지는 것 조차 더러는 대상에 따른 경험(우연적 만남 등)에 따를 수 있다?
    ┗ 샤 론 09.05.22. 13:53
    여인님 !그럼 지금은 날씬한 여자?…전 개인적으로 좀 통통한 여자가 후덕해 보이고 따뜻한 느낌이 있어서 빨리 친해진답니다…다리우스님은 어떤 여인상일까?..남자도 약간 통통한 남자가 마음씨가 넓어보이고 좋더라구요..겨울에는 날씬한 사람옆엔 가기 싫어요..추워서요..
    ┗ 旅인 09.05.22. 16:20
    구체적인 이미지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지하철에서 제 앞을 가로지르며 내리는 아가씨가 있었는데, 향수냄새가 파~하고 저의 코를 찌르더군요. 아가씨는 옷 사이로 각진 뼈가 마치 옷걸이의 모서리처럼 튀어나왔습니다. 그때 “그 사람 비린내 날 정도로 말랐어.”라는 누군가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그러자 그 아가씨의 향수냄새 속 어딘가에 비린내가 배어있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예전에 몹시 예쁘다고 생각한 여배우들의 사진을 보게 되면 역쉬 이효리가 났더라는 생각이… 예뻐서일까 (약간 한물가긴 했지만)젊어서일까? ㅎㅎㅎ
    ┗ 샤 론 09.05.22. 18:11
    예리한 시선을 아직도 갖고 계신가 봅니다..글쓰는 이들의 특징은 뭔가 놓치지 않으려는 그런 자세로 항상 있는 듯 해요..가끔 무섭기도..옆에 있으면 어떤 특징을 잡아낼까 형사하고 같이 있는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旅인 09.05.22. 18:56
    아니요. 제 시선은 늘 흐릿합니다. 공항같은데서 남들 다 보는 연예인 한번 못보고, 마누라는 눈치없다고 구박입니다. 그보다는 제 생각을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라비에벨 09.05.22. 19:31
    어느 글에선가 여인님은 회사의 중역인듯 했는데… 글을 쓰셨으면 유명한 문인이 되었을것 같습니다. 어느쪽이 훌륭하다 비교하긴 어렵겠지만 좀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가능하시겠지만요…
    ┗ 旅인 09.05.22. 20:34
    중역이 못되고 빌빌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문인이 아닌 것이 자유롭고 좋습니다.

    유리알 유희 09.05.25. 23:48
    그렇군요. 여인님의 사랑론 ! 가슴에 안깁니다. 대단한 독서광 맞군요. ㅜㅜ
    ┗ 旅인 09.05.26. 12:57
    당시에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요즘은 영 읽는 것이 시원찮습니다. 진도도 잘 안나가고…

    산골아이 09.05.27. 13:49
    여인님이 묘사한 친구의 작은누나가 젊은날의 내 모습을 보는 듯했습니다. 동료의식이 느껴져서 그녀가 안쓰럽네요.
    ┗ 旅인 09.05.28. 09:00
    세월이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제가 그냥 잘 살고 있다는 자체가 수치스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 샤 론 09.05.28. 18:53
    왜요?
    ┗ 旅인 09.05.28. 22:58
    자신의 달디단 생활에 젖어 이기적이 되어버리고 더 큰 욕심에 빠져들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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