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적인 삶

<뿌리깊은 나무>를 사려고 했다. 한글창제와 관련한 살인에 대한 추리소설인 뿌리깊은 나무는 없고, 정조 독살 사건 같은 책 밖에 없었기에, 할 수 없이 <프랑스적인 삶>을 샀다. 요즘은 영화 뿐 아니라, 소설도  우리 것이 더 낫다.

<프랑스적인 삶>을 감싸고 있는 간지에는 <이 책의 처음 몇 페이지를 읽자마자 사람들은 단번에 사로잡히고, 손톱을 물어뜯고, 손수건을 준비한다. – 브와시>라고 쓰여 있다. 아마 브와시라는 작자는 <밝은 세상>이라는 출판사가 날조한 인물이며, 이 문구도 이 말을 믿고 책을 살 몇 명의 멍청이를 위하여 쓴 얄팍한 사기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손톱을 깨물고 눈물을 흘린다면, 감수성이 비정상적이거나, 특정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에 툴림없다.

이 책에서 무덤덤한 어조로 레고 블록인지, 블릭인가 하는 사람(놈)이 자신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특이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인생이지만, 이 놈의 삶은 프랑스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한국적이라는 점에서 일단은 보편성이 있다. 그만큼 놈의 삶이 생소하지는 않다.

늘 아버지의 세대는 힘이 들고 애환들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견고한  도덕율에 닻을 내리고, 가족과 자식에 대한 뚜렷한 애정에서 발원한 헌신으로 우뚝한 탓에, 우리의 세대처럼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지 않고 견고하다. 하지만 자식들인 우리들이 맞이하는 세계는 허무하고 난잡하여 한없는 나락으로 빠져드는 것이 아닌가하는 위구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프랑스적인 삶이란, 정체성을 잃은 이 세대가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며, 어중간한 자신의 현실을 토로하는 것이다.

문화와 예술이 이십세기처럼 대량으로 생산되고, 매스미디어를 통하여 다량으로 공급된 적은 없었다. 특히 이 책의 중간에 나오는 1968년은 이십세기 후반을 규정 짖는 시기였으며, 그 후로 우리는 모든 가치에 대하여 충분히 회의할 수 있는 시간들을 향유했다.

시간적으로 선후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모든 사람들이 문화와 예술을 통하여 성을 인식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상품으로서의 성의 가치를 처절하게 인식하기 시작하자, 성은 무한하게 생산되어 값싸게 거래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에 걸쳐서 중산층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돈, 즉 밥그릇에 대한 인식은 노동권의 신장과 함께 그저 그런 것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돈은 낭비되어야 하는 이념이지,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자리잡았다. 국가나 정당, 정치라는 이념적이거나 아니면 야바위적인 것들은, 학생운동과 함께 히피적인 요소들이 혼효되고, 반전과 환경 등의 문제와 함께 하면서, 귀찮거나 없어져야 할 사악한 것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윤리와 도덕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거나 삶의 건전성을 확보하는 수단이기보다, 바이러스와 같은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그때가 이십세기의 후반이며, 아직까지도 이십세기 후반적인 사고는 유효하다.

장 폴 뒤부아(Jean_paul Dubois: 1950~)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때부터 수음이나 즐기고, 68년 학생운동 덕에 어슬렁거리며 대학에 들어갔고, 평생동안 제대로 된 직업을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주인공 블릭을 통하여 프랑스적인 삶이 어떤 것인지를 샤를 드골에서부터 자크 시라크 정부에 이르기까지 연대기적으로 그린다.

이 친구는 친구의 엄마든 장모든 여자의 엉덩이만 보면, 어떻게 흘레를 붙어볼 수 없을까 하는 몽상을 하는 놈이면서도, 투표란 것은 한번도 해 본 적도 없다. 늘 룸펜으로 살면서 할 일이 없어서 찍은 사진으로 해서 책을 내게 되고, 떼돈을 벌었지만, 그 돈으로 집을 산다거나, 좋은 차를 개비할 생각조차 귀찮은 친구다. 그러니까 욕구는 넘쳐나되, 욕망은 없다. 돈 많고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을 하는 행운을 얻었지만, 오히려 장인의 회사를 때려치우고 애들이나 보면서 이웃집 여자와 그 짓거리(?)를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은 커녕, 자신의 와이프도 딴 놈과 그 짓거리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백수로서의 상당한 내공을 소유한 놈이다.

이런 블릭의 삶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프랑스에도, 한국에도, 중국과 미국 기타 등등 세계 각지의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이다. 성에 대한 윤리적인 갈등은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짜릿하게 즐길 것이냐 하는 문제들로 사람들은 고민하기 시작했고, 돈을 벌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대낮에 길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삶은 예전에 비하여 형편없이 골치가 아프지만, 그렇다고 이 놈의 삶을 고쳐나갈 길은 막연한 만큼 그냥 저냥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자식 때가 되면 그들의 삶이 희망적이라고 계산할 근거는 더욱 없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무의미한 만큼, 저들의 삶은 절망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며, 가족이라는 집요한 혈연도 의혹에 늘 휩싸여 있는 것이다.

결국 블릭은 아내가 죽으면서 아내에게 정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아내가 운영하던 회사의 파산으로 빚을 다 떠안은 채, 좌초하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좌초로부터 변태적인 프랑스적인 삶도 희망을 걸러낼 수 있다는 것을 작가 장 폴 뒤브아는 애써 강조하려는 듯 보인다.

블릭의 딸은 엄마의 죽음을 맞이하는 불운에 더하여, 엄마가 어떤 놈팽이와 놀아났다는 것을 알아서 인지, 그만 우울증에 빠져들고 결국 정신병원에 가게 된다. 블릭은 정원사 노릇을 하면서 얼마간의 돈을 벌면서, 돈의 필요에 대하여 인식하게 되고, 정신병원에 있는 딸아이를 데리고 오래전 외할아버지와 함께 올랐던 산 위로 올라가 딸아이를 포옹하는 것으로 책은 끝이 난다.

장 폴 뒤브아의 책은 어떠한 문학적인 수사도 없이 건조한 수다를 떨어가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직면한 것들, 절실하지 못한 삶의 파편들과 자신을 헤아려볼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으로 성에 도착되어 있는 현대에 대하여 그려나가고 있다. 이 책은 소설이라기 보다 르포르타주에 가깝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 소설에는 추구해야 할 이념이나, 사랑, 우정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어떠한 정언적 명법도 없고, 부모를 포함하여, 관련된 모든 사람에 대한 싸늘하고도 야비한 평가만이 남는 이 소설은, 삶의 가치에 대하여 아무런 연결고리를 갖지 못하는 현대인들이 붕괴되어가는 과정을 냉소적인 시각에서 잘 그리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 소설이 좋다고 해야 하는 지, 한번 읽어보라고 권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다지 재미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책은 제100회 페미나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하는 데, 그런 상은 불란서 친구들은 알지 몰라도 나는 금시초문이다. 이 책의 껍떼기를 둘러싼 각종의 서평을 보면,

『프랑스적인 삶』은 바로 우리의 책! (리베라시옹) — 어느 싸가지 없는 일본 놈들이 이 책을 가지고 자기네 책이라고 그랬니?

한 프랑스인의 욕망과 이상을 통해 한국인의 삶을 더불어 반추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소설! (조선일보) — 욕구는 있어도 욕망과 이상은 없다니까, 조선일보, 너희 딴 책 읽고 이 글 썼지?

『프랑스적인 삶』은 한없이 위대하고 한없이 작은 이야기다. 유머와 비극 사이를 오고 가는 이 소설을 읽다보면 입가에 슬그머니 공감의 미소가 떠오른다. (르 몽드) — 그래도 그럴듯한 평가야! 그런데 블릭에겐 비극은 없더군.

보통 사람들이 겪는 일상의 문제, 우리 모두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수 밖에 없는 문제, 이를테면 욕망·사랑·자기 정체성의 위기·늙어가는 것에 대한 고민·잃어버린 환상 등의 문제를 제기한 책. (피가로) — 대충은 그런 책이지, 맞아!

뒤브아는 차례로 계속되는 프랑스 현대사의 색조를, 모순되는 그 감동을, 그 갈등을, 그 환멸을 생생하게 다시 일으켜 세운다. (텔레라마) — 그런데 이 책이 무슨 역사소설 쯤 되냐?

『프랑스적인 삶』에는 생생하고 빠르고 짧고 단속적인 글쓰기가 있고, 행간 사이에 녹아든 유머, 메스를 들이대듯이 냉소적인 아이러니가 있다. (르 포앵) — 논술고사 참고서란 말이지?

그러니까 책의 겁데기에 쓰여져 있는 노가리를 읽고 책을 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참고> 프랑스적인 삶

This Post Has 3 Comments

  1. 클리티에

    프랑스의 치부를 솔직히 보여준 부분은 흥미로웠지만 인생에 대한 진지한 철학이 약한듯하여 좀 실망스럽기도 했던 책이었던 것 같아요.

    뿌리깊은 나무는 안 사시길 잘하셨네요..
    빌려서 봤는데 직접 사서 보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길 정도였어요.
    전형적인 마케팅의 승리 같은 이랄까요? 얼토당토않은 구성에 서문에 작가가 5년의 준비끝에 내놓은 작품이라고 하던데 개인적으로는 다빈치 코드이후 픽션 열풍에 기대서 기획된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취향은 서로 다르긴 하지만, 추리소설이나 스릴러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비추하게 되더라구요.

    그나저나, 태그구름 편하고 좋네요. 못보고 지나쳤던 예전글들을 엿볼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

    1. 旅인

      뿌리깊은 나무를 잠시 보니까 낙서의 방위(마방진)에 따른 수사와 추리가 등장하는 것 같기도 한데…

      내용보다도 마방진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 한번 보고 싶기는 합니다.

      예전에 테터툴즈를 할 때 좋았던 것은 Keyword를 만들 수 있다는 것과 Tag를 보여준다는 것이었는데, 텍큐는 그런 서비스가 안되는 것이 좀 섭섭합니다.

      이 태그구름의 Font는 한자나 기타문자를 인식하지 못하는 Font인 것 같습니다. 한자나 기타문자는 나오지 않아도 태그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습니다.

  2. 旅인

    목련
    친구를 선택하듯이 좋은 책을 선택하라.
    집은 책으로
    정원은 꽃으로 가득 채워라.~~
    나는 그게 안되요.ㅎㅎ
    여님님..넘 존경 스럽습니다.덕분에 좋은책 그냥 독서한것 같습니다.
    여인님..추석명절 보람있고 기쁘게 잘 보내시기를요..~~
    └ 여인
    참으로 좋은 말씀이네요. 그런데 아쉽게도 제 누옥에는 정원이 없어서 꽃을 채울 수가 없고, 한칸 방은 비좁아 몇권 안되는 책도 용납이 안되는군요.
    며칠의 휴일을 좋은 책과 함께 보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요즘은 하늘이 맑고 높으면 그저 머리 속이 마비가 되어서 책도 읽지 않게 되네요. 그래도 몇권은 읽어야 되겠습니다.
    한가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 목련
    여인님..아 웅 ^@^..
    울 여인님은 파란 하늘에 마비되실분 절데루 이니실것같은데…
    도사님이시니까요? 헤헤헤!!.
    └ 여인
    천고마비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늘이 높아지면 마비가 된다는…^^
    가끔 구름타고 다니다 보면 머리에 쥐날 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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